학생회와 학생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 학원 : 서울대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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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년 3 월 제 103 호

 
 

학생회와 학생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학생회 운동의 부활을 꿈꾸는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최우영 기자 / luckerk1@snu.ac.kr

 

지난 4월 30일 버들골 노천강당에서 열린 6기 한대련 출범식.

지난 4월 30일 저녁 버들골 노천강당에 전국에서 3천여명의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올해로 만들어진지 6년째를 맞이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의 첫 출범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운동권과 비권을 아우르는 전국단일조직을 표방하며 2005년 첫발을 내딛은 한대련. 대학생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창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총련과 같은 쇠락의 길을 답습할 것인가.

과거의 학생회 운동

최초 학생회 운동의 역사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숨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장례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의 총학생회장들은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전국 단일조직 결성에 합의한 총학생회장단은 그 해 8월 충남대학교에서 1기 전대협 출범식을 성사시켰다. 전대협 이름 앞에 으레 따라오는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수식어가 보여주듯 당시 전대협은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급진적인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1989년 3기 전대협 시기에는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외국어대 학생이던 임수경을 전대협 대표로 방북시켰다.

당시 3기 전대협 의장은 16·17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낸 한양대 총학생회장 임종석이었다. 변장 등으로 경찰의 이중봉쇄를 뚫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나는 그의 별명은 ‘임길동’이었다. 학생단체의 대표인 임종석은 당시 여고생 잡지의 인기투표 순위에서 홍콩스타 주윤발을 제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당시 학생운동은 학생대중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까지 사랑받았고 그것은 그대로 전대협의 위상이 됐다.

전대협의 뒤를 이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은 1993년 1기 출범식을 가졌다. “전대협이 ‘구국의 강철대오’를 지향한 것과 비교해 한총련은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의 조직 전환은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3기 한총련 의장을 지낸 정태흥 씨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전대협이 대표자들인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 수준이었다면 한총련은 학생총회 및 학생투표 등 협의와 합의를 중요시하는 대중조직으로 거듭났다고 자평했다.

ⓒhttp://hcy.jinbo.net
 

1998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린 9차 범민족대회. 한총련은 이때만 해도 학생들의 대표체라 자부할만한 대중동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한총련은 100만 대학생의 대표자를 자처할만한 대중동원력과 공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1993년 1기 한총련은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출범식에 8만여 명의 학생들을 결집시켰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학살자 처벌을 위해 40여개 대학이 동맹휴업을 하고 10만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실제로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우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1996년 전북대학교에서 열린 4기 한총련 출범식에는 유종근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가 “한총련은 민족의 미래”라며 현장에서 출범 축하발언을 하는 일도 있었다.

변화하는 조건들 속의 학생회운동

한총련으로 대변되던 학생회운동이 약화된 가시적 계기는 이른바 ‘96년 연대사태’로 불리는 한 사건에 의해서였다.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를 마치고 연세대학교에서 농성하던 한총련 학생들 중 5천여 명이 검거되며 한총련에 대한 여론이 악화됐다. 이듬해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낙인찍힌 한총련은 점차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가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해 선출된 의장은 임기 중 경찰에 의해 수배가 됐으며 4기 강위원 의장부터 15기 류선민 의장까지 모든 의장들이 경찰에 의해 구속됐다. 2008년부터는 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채 투쟁본부 형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학생회 연합체의 틀을 만들기 위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건설 논의가 2002년 말부터 시작됐다. 올해 한대련 의장을 맡고 있는 김유리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300만으로 늘어난 대학생들을 한대련 출범의 이유라고 말한다. “특히나 근래 들어 생긴 운동권 비권과의 경계, 4년제와 2년제, 지역과 수도권에 있다는 이유로 대학사회 안에 그어져 있는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대학생 조직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미가 컸다.” 다양한 지향과 요구를 담아내는 새로운 그릇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한대련 건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대련은 2005년 1기 출범을 시작으로 2010년 6기 한대련에 이르러 첫 공개적 출범행사를 치르게 된다. 출범한 지 6년째를 맞이한 한대련이 올해 처음 출범식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김유리 의장은 “300만 대학생들의 단일대표조직을 표방하며 출발했지만 한총련과 그 이외 다양한 학생조직들이 존재했다”며 말을 이었다. 한대련이 각 대학들에게 인지도가 없는 상황에서 한대련이 처음부터 출범식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지난 4월 30일 서울대학교 노천강당에서 열린 한대련 출범식에는 전국에서 3천여 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밤새 행사에 참여했다.

한대련의 활동들

김유리 의장은 한대련이 첫 공개 출범식을 진행한 것은 2005년부터 만들어온 한대련 본조직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말한다. “한대련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5년간 등록금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실천, 이명박 정부 이후 뒷걸음 치고 있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실천 등을 해왔다.” 이를 통해 이제는 다른 어떤 대학생 단체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이 이어졌다.

한대련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을 주된 사업으로 벌이고 있다고 한다. 김 의장은 “2008년부터는 등록금 인하를 주장해 왔다. 그 결과 문제점이 많기는 하지만 올해 ICL(취업후상환제), 등록금 인상률 상한제 등이 마련됐다고 평가한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한대련은 2007년부터 청년실업해결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들을 지속하고 있다. 김 의장은 “단순히 이유 없는 정부 비판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시절에 내세운 반값등록금, 청년고용대책과 같은 공약을 불이행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말한다. 그 공약이란 반값등록금과 청년고용대책 등이다. 그 외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여러 행태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한대련의 활동이 계속 되고 있다. 올해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는 대학생들의 투표율을 역대 최대로 높이고 진보개혁정당·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해 MB정부를 심판할 것을 당면한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한대련의 활동에 대해서 외부의 평가들은 엇갈린다. 2009년 한대련 산하조직인 서울대련에서 활동했던 이경환(물리 05) 씨는 초기 한대련과 지금의 한대련은 의제 설정의 차이점이 생겼다고 했다. “교육의제를 중심으로 한 초기 활동들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최근 이명박정권 이후 한대련은 그런 실질적인 의제에서 반MB 정치투쟁으로 회귀했다” 초기 한대련이 해왔던 유의미한 활동들을 스스로 해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이었다.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의 정구현(정치 06) 씨는 최근 한대련의 ‘대학생 유권자연대’ 주도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보였다. “지방선거 투표로 대학생들의 저항의 열망을 가두는 것은 결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각 대학의 구조조정 사례에 반대하는 투쟁을 아래에서부터 조직하며 실업과 해고의 문제· 88만원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와 연대투쟁을 형성해야 한다.”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을 많이 진보인사를 채우는 것으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고 투표의 효과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직접행동을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학생회는 여전히 유효한가

학생회운동의 형태를 계승해 전국 대학생의 대표조직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하는 한대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도 존재한다. 학생회를 통한 학생운동의 유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들이 그러한 의견들의 출발점이다. 정구현 씨는 학생운동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학생회라는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학생회 간부로 활동가들의 역할이 국한될 때 때로는 전사회적인 변혁전망을 잃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학생회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지, 학생회 운동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2003년 7월 PD계열 학생회 연합체였던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은 내부의 논의를 거쳐 조직체계를 해소하고 학생회 선거 중단을 선언했다.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최지선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학생회는 보편적 자치권력으로서의 성격을 이미 상실했다”며 조직 해소의 이유를 밝혔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학생회 중심의 대중 동원 정치를 넘어서서 자율과 연대에 근거한 학생사회의 재구성을 실현해낼 것이라는 향후 학생운동에 대한 전망도 밝혔다.

ⓒ대학생신문
 

2003년 7월 해소한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의 마지막 총회. 지난 학생회운동을 평가한 후 조직 해소를 결정하며 일부 대의원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러한 의견들에 대해 2008년 사회대 학생회장을 지냈던 임대환(사회 03) 씨는 의미없는 비판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조합이 조합주의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해서 노조운동을 포기하는 활동가는 없다. 학생회의 자기 특성을 한계라고 쉽게 판단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조합주의에 빠지는 학생회 운동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현황에 대한 비판과 학생회 운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엄연히 다르다는 그의 의견이었다. 김유리 의장 또한 “학생회는 여러 방면에 걸친 학생들의 이익과 권익을 보호하고 실현하는 대학내 유일한 기구”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학생회 운영상의 부족한 점은 개선하고 학생회의 본분을 더욱 강화하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6기 한대련 김유리 의장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심각한 문제들을 우리 대학생들과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해결방도를 모색해 학우들의 대중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참여 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대련의 숙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과연 학생운동의 대안이 될 것인가.

한대련은 다양한 지향들을 끌어 안고 운동권·비권의 경계를 넘어 300만 대학생의 요구를 담는 큰 그릇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일각에서는 의제설정 및 인적 구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김재의(사회복지 06) 씨는 한대련의 가장 큰 문제로 구조적인 모순에 침묵하는 의제설정 방식을 지적한다. “한대련은 등록금투쟁이나 학사개편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하지만 구체적인 의제가 드러나는 구조적인 요인들에 침묵한다”며 한대련이 대중적인 학생회연합체 운동을 전개하면서 구조적인 문제에 입을 닫는다고 말했다. 이경환 씨는 “현재 명목상 한총련과 한대련이 공존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초기 한대련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한총련 활동을 하던 사람들로 구성돼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유리 씨는 “한대련은 특정정파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하지 않는다.”며 한총련 계승 가능성을 일축했다. 다만 출범 초기와 다르게 이른바 비운동권 단위들의 참여가 지난 몇 년간 한대련 활동에 저조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김 의장은 이를 ‘한대련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라고 말했다.

대중조직인 학생회연합체와 새로이 만들어나갈 학생운동. 한대련은 이 중간 즈음에 서있다. 과연 한대련이 표방하는 대로 3백만 대학생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되어 다시금 대중적 학생운동의 부흥을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대중과 괴리된 채 잊혀져가는 후기 한총련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태어난 지 여섯 해가 됐으나 이제 첫 출범식을 마친 전국 최대 학생조직 한대련의 앞날을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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