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 샤오강 감독, 한국인들에게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유명영화 <쿵푸허슬>에서 악어파 보스를 연기했던 이라고 하면 그제서야 ‘아’ 소리가 나지만, <야연>과 <집결호>의 감독이라고 말하면 슬슬 사람들이 표정이 다시 뚱해진다. <천하무적>의 감독이라고 하면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을 볼 수 있다. 그는 10편의 영화를 만든 중국 스타감독이다. 2004년에는 <비즈니스 위크>가 ‘아시아스타 25인’에 선정하기도 했다. 일명 ‘중국의 스필버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한 영화감독의 이름은 잊혀진다. 그가 아시아스타가 되던 그해 발표되고 한국에서는 2009년 개봉된 <천하무적>은 흥행의 성공 여부를 떠나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홍콩영화치고는 그다지 화려한 특수효과 없이 인간 본연의 순수성, 그 의미가 알찬 구성 속에 담겨있다.
순수인가 호구인가
한 사업가를 등치고 BMW를 강탈한 왕보(유덕화 분)와 왕려(유약영 분)는 실력파 소매치기 커플이다. 사기행각 이후 라마교 사원에서 절을 올리며 왕려는 이제 손을 씻겠다고 다짐한다. 예불 와중에도 직업정신을 발휘하는 왕보는 그런 왕려를 이해할 수 없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티벳고원 중간에 왕려를 내려놓은 채 왕보는 BMW를 타고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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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려는 조건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근의 순수성에 물들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쓰촨의 아름다운 뒷배경도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
탈진하기 직전까지 길을 걷던 왕려를 구해준 이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근(왕보강 분). 그는 사원 보수공사를 위해 고향 허베이를 떠나 5년간 일한 21살 고아청년이다. 사근은 고향에 돌아가 장가를 갈 요량으로 그간 모은 6만 위안을 전부 현금으로 받는다. 송금에 붙는 6백 위안의 수수료가 아까운 그는 전액 현금을 들고 기차에 탄다. 사근의 순수한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던 왕려는 기차에 오르기 전 돈을 잘 간수하라며 주의를 준다. 하지만 세상에 도적이 없다고 믿는 사근은 오히려 큰 소리로 “도둑아 나와보라!”며 큰 소리를 내며 적(賊)들을 도발한다. 이는 전설적인 소매치기조직인 호려(갈우 분) 일당에게 먹잇감으로 찍히는 계기가 된다. 기차역에서 왕려와 재회한 왕보도 사근의 돈을 탐내며 왕려 일행에 합류해 기차에 오르게 된다.
이제부터는 영화의 주무대, 쓰촨을 떠나 허베이로 향하는 기차 안이다. 식당 칸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 왕보와 호려는 서로의 손놀림을 은연중에 과시하며 상대의 실력에 적잖이 놀란다. 왕보는 호려에게 동업자 정신을 운운하며 자신의 먹잇감에 손 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호려는 왕보의 실력에 반해 조직 가입을 제안하며 사근의 돈을 양보한다. 돈 주인 사근의 의사는 전혀 상관없다. 소매치기들의 눈에 한없이 멍청한 사근의 돈은 ‘먼저 가져가는 놈이 임자’인 눈먼 돈일 뿐이다. 충동을 참지 못한 호려의 수제자 둘은 사근의 돈을 노리며 선제공격을 시작하고, 왕보는 마치 자신의 돈을 지키는 것 마냥 사근의 돈을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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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도둑이 어디 있냐고? 여기 전설의 소매치기 호려가 있다! 도둑은 얼굴에서 티가 나지 않는다. 약자의 모습으로 변장해 순수를 갉아 먹는다. |
세상에 도둑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근은 그저 호구 취급만 당할 뿐이다. 순수를 지닌 이들로 세상이 가득 채워져 있다면 오죽 좋으랴만, 적(賊)들로 가득찬 세상 속의 순수는 웃음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직 사근의 순수성에 감화된 왕려만이 속상해하며 사근의 세계관을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왕려는 여행 내내 호려 일당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앉아있는 왕보까지 경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형이 만약 도둑이라면 내 두 눈을 뽑아버리겠어요!” 사근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울리는 왕보. 그 옆자리에 앉은 왕려의 속은 타들어간다.
순수를 순수로 남길 수 있는 힘
사근의 눈에 비친 세상은 도둑이 없는 천하무적(天下無賊)의 세상이다. “제 고향에서는 길 위의 짐승 똥에 씌울 바가지가 없을 때는 옆에 돌을 쌓아놓으면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요. 일을 하면서는 친구가 없어서 항상 늑대들과 대화하며 지냈어요. 늑대도 날 해치지 않았는데 사람이 날 해치겠어요?” 왕려는 이런 사근의 순수성에 감응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힘이 된다. 그녀는 순수에 물들어 그것의 방패가 되는 자다. 하지만 앞에 앉은 애인 왕보는 왕려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사근에게 사기를 친다. “왕려 누나는 불치병에 걸려서 곧 죽을 거야.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지내게 내 말은 꼭 비밀로 해줘” 마음 여린 사근는 곧바로 몇천 위안을 왕보에게 건네며 왕려 누나 병원비에 보태달라고 부탁한다. 6백 위안 수수료가 아까워 현금을 들고 기차에 탄 바로 그 사근이 말이다.
여행 중 왕보는 호려 일당의 견제를 물리치며 사근의 돈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중간정차역에서 사근에게 인생 공부를 시켜준다며 즐겁게 기차에서 내린 왕보는 왕려에게 붙들린다. 며칠 사이에 소매치기를 그만 두겠다며 태도를 바꾼 왕려를 이해할 수 없던 왕보는 그녀의 뺨을 때린 후 충격적인 고백을 듣는다. 왕려의 배 속에서 왕보의 아기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왕보는 사원에서 절을 올리며 비장하던 왕려의 표정과 기차를 타며 그녀가 보여온 언행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기 앞에 더 이상 죄를 짓기 싫다는 왕려에게 왕보 또한 동조하게 된다. 왕려 몰래 열차에 따라 탄 왕보는 문자를 보낸다. “내가 있으니 너무 걱정마.” 태중의 아기는 왕보와 왕려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보며 느끼는 왕보와 왕려의 죄책감이 바로 순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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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으니 너무 걱정마.” 왕보 또한 사근이로부터 시작돼 왕려에게 물든 순수를 받아들이게 된다. |
호려 일당과 계속되는 암투 끝에 끝내 왕보는 사근의 돈을 지켜내지 못한다. 호려는 의기양양하게 돈뭉치를 풀어헤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지전(紙錢)이다. 왕보가 승부의 룰을 어겼다고 생각한 호려는 응징을 결심한다. 한편 왕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근의 돈이 바꿔치기 당한 것을 알고 열차 안 또 다른 고수의 존재를 자각한다. 그 고수는 바로 기차역에서 왕보에게 지갑을 털렸던 화가 아저씨다. 실제 신분은 열차에 잠입한 형사다. 그는 순수를 침해하는 불의를 공격하는 창이다. 그는 왕보와 왕려가 진심으로 사근의 돈을 지켜주던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하지만 이전 사기 사건을 덮어둘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커플들을 구제해주지 못함에 인간적인 고뇌를 느끼게 된다. 사근으로부터 시작되어 왕보와 왕려에게 전해진 진심어린 순수가
형사에게까지 닿은 것이다.
현실 속의 순수가 겪는 시련
뜬금없이 벌어진 열차강도 사건을 계기로 형사는 자신의 존재를 공개하고 왕보·왕려 및 호려 일당을 모두 체포한다. 커플 구금 이후에도 끊임없이 그들의 진심 앞에 미안해하는 형사다. 왕보와 왕려가 사근의 순수에 감화 받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고민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커플 모두 손목에 수갑을 차고 ‘마지막이 될’ 시간을 함께 나눈다. “이번에 들어가면 오래도록 서로 만나기 힘들 거야.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 전에 이야기 많이 나눠” 아기가 감옥에서 태어나도록 놔둘 수 없던 왕려와 왕보는 수갑을 풀고 열차 탈출을 감행한다. 그 시각 소매치기 집단의 보스 호려도 경찰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열차 천장의 공간으로 탈출한다.
좁은 공간을 기어가는 커플을 뒤에서 지켜보며 따라서 탈출을 감행하던 호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의무실에 누워 자고 있는 사근과 곁에 놓인 돈가방이었다. 탈출 직전 탐욕을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왕보·왕려와 경찰로 인해 갖지 못하게 된 돈가방에 오기가 생긴 것일까. 호려는 마지막 범행을 감행하고 사근의 돈가방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곧바로 이를 눈치 챈 왕보는 왕려를 도망시킨 후 호려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한다. 왕려는 아기를 위해 기차에서 먼저 떠나면서도 남겨진 왕보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기차는 경찰들로 둘러싸인 역에 정차한다. 영화 초반과 같이 노인으로 분장한 호려는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시도하지만 형사는 호려를 알아보고 수갑을 채운다.
이윽고 몇 개월이 흐른 후 부푼 배를 안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왕려가 보인다. 그 앞에 나타난 것은 기차에 탔던 형사다. 왕보 이야기를 하려는 형사에게 왕려는 “밥 다 먹고 나서 이야기해”라며 쏘아붙이지만 그는 먼저 말을 꺼낸다. 열차 사건이 있던 날 천장에서 죽어간 왕보의 이야기였다. 왕보는 목숨을 걸고 사근의 돈가방을 지켰지만 실력이 월등한 호려에게 찔리고 목이 졸려 천장에서 죽어갔다. 목이 졸려 죽어가던 왕보는 열차 천장을 주먹으로 쳐 형사가 천장 위 상황을 눈치챌 수 있도록 했다. 위험을 느낀 호려는 왕보의 목숨을 끊지도, 돈가방을 챙기지도 못한 채 다시 열차 안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호려와의 결투로 많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왕보는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일을 한다. 우선 목숨 걸고 지켜낸 돈가방을 잠들어있는 사근의 곁에 조용히 내려준다.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사근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돈가방을 내려보내는 왕보의 손은 이미 흥건한 피로 물들어 있다. 그 다음 먼저 탈출한 왕려에게 문자를 보낸다. “사근 일은 해결됐어. 곧 따라갈게 기다려” 문자를 다 써놓은 왕보는 끝내 마지막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눈을 뜬 채 숨이 멎는다. 그 문자를 왕려에게 전송해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한 사람은 부하들과 천장을 수색하던 형사였다.
순수가 만들어낼 적(賊) 없는 세상
이야기를 마친 후 형사는 왕려를 체포하지 않고 떠난다. 처음과 같이 홀로 식당에 남은 왕려는 임산부 특유의 먹성으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댄다. 창 밖의 빗줄기가 진해질수록 왕보의 눈에 흐르는 눈물도 짙어지지만 절대로 손과 입은 쉬지 않는다. 곧 태어날 아기, 자신을 순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 아기에 대한 생각만이 왕려를 지배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이가 죽은 소식을 몇 달 만에 들으면서도 왕려를 쓰러지지 않게 지탱한 힘은 아기의 순수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형사가 왕려를 체포하지 않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사근과 왕려에 대한 왕보의 진실한 마음이 형사를 끝내 바꿔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영화 중반부 즈음 열차가 중간역에 정차했을 때 왕려는 사근에게 돈가방을 돌려주면서 계란마술을 선보인다. 마술에 사용한 삶은 달걀은 떠나는 기차 뒤 선로에서 찌그러진 채 클로즈업된다. 영화 속 왕려가 사근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세상은 사근이 믿는 순수한 세상이다. 왕보에 대한 사근의 믿음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왕려는 마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왕보가 훔친 돈을 사근에게 다시 전해준다. 하지만 달리는 열차 속에서 순수는 마술로 보호받지 못한다. 사근은 믿는 왕보에게 돈을 털리고 그의 언변에 속아 스스로 돈을 갖다 바친다. 나중에 사근에 의해 순수하게 정화된 왕보는 천장 속 먼지구덩이에서 목이 졸린 채 숨져간다. 올해 초 작고한 하워드 진의 말을 빌자면 “달리는 기차 위에 순수는 없다” 어디론가 달려가는 세상사 속에서 순수를 찾기는 이렇게나 힘들다.
이 영화의 제목을 풀이하면 ‘도둑없는 세상’이다. 제목을 정확히 안 보고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 중 일부는 “순수하면 세상에 적수가 없다는 뜻인가”하고 헛갈릴 수도 있다. 비록 펑 샤오강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관객의 착오 또한 감상의 일부다. 천하에 도적이 없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는 그 순수로 타인을 감화시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 순수가 세상을 덮는 순간 현실의 호려 일당은 발 붙일 곳을 잃는다. 그 순수한 마음이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등극하는 세상이 펑 감독과 관객들이 지향하는 올바른 세상이 아닐까. 비록 왕보의 피와 왕려의 눈물을 필요로 할만큼 그리로 가는 길이 험난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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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眾生皆善良 天下是否太平?” 뭇 사람들이 모두 선량하면 천하가 태평하지 않겠는가. |
가십1. 소매치기 조직의 실력파 보스 호려 역을 맡은 갈우는 1994년 47회 칸영화제에서 장예모 감독의 <인생>으로 아시아 최초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가십2. <천하무적>은 2009년 영화관 개봉 전 2005년에 비디오로 먼저 국내에 출시됐다. 비디오 제목은 <유덕화의 열혈전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