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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전자 구사옥 풍경, 스프레이로 마구 갈겨쓴 글씨가 5년내내 자리를 지켰다. |
문자 한 통에 직장을 잃은 그녀들
기륭전자 분회장 김소연씨는 2005년 3년간 일했던 현장에서 해고를 당했다. 그녀가 해고 당하기 전에도 기륭전자 회사측은 현장직 노동자들을 20~30여명을 해고하고 재고용하기 일쑤였다. 이른바 ‘물갈이 해고’였다. 가끔 월요일 휴가를 내고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동료들이 ‘또 잘렸나봐’하고 걱정할 정도로 해고는 기륭전자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다. 해고 여부는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김 씨는 “반장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들을 해고했다”고 말했다. 현장 관리자의 말에 순응하지 않거나 잘못된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면 해고를 당했다. 관리자들의 기분에 의해 한 가정의 생계가 좌지우지되는 꼴이었다.
조합원으로 활동하는 윤종희 씨는 문자메시지를 통해 해고통보를 받았다. 주말 특근까지 하고 집에 가는 길에 그녀의 핸드폰엔 해고를 통보하는 문자메시지가 와있었다.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해고 됐으니 다음 주부터 출근할 필요가 없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윤 씨는 파견업체를 찾아가 해고사유를 물어봤다. 해고사유는 ‘근무시간 중 잡담’이었다.
| ⓒ기륭전자분회 | |
덜컥 해고 문자가 핸드폰으로 날아들었다. |
‘파견직’, 해고대상자의 다른 이름
회사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녀들을 해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여성 노동자의 대다수가 ‘파견직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김소연 씨는 “휴먼닷컴이라는 곳에 이력서를 내고 그 곳에 찾아갔더니 기륭전자를 알선해줬다”며 취업과정을 설명했다. 김 씨는 면접도 기륭전자에서 봤고, 일상적인 업무지시도 기륭전자에서 받았다. 심지어는 작업복, 출퇴근 카드까지도 모두 기륭전자 것이었다. 월급 통장에 찍히는 이름이 기륭전자가 아니라 휴먼닷컴이었다는 것만 빼면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륭전자 노동자였다. 서류상 김 씨는 휴먼닷컴 소속의 정규직이면서 기륭전자로 파견 받은 파견노동자였다. 파견노동자는 언제나 저임금과, 임금의 중간착취 사이에서 시달려야 했다. 당시 제조업은 파견이 불법인 상태였다. 2005년 기륭전자에는 250명의 파견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정규직은 5명, 비정규직은 15명이었다. 당시 기륭전자는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사측은 파견직 노동자들을 2년 이상 고용할 경우에는 휴먼닷컴과 같은 파견업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측은 직접고용을 피하기 위해 2년이 되기 전날 노동자들을 해고하기도 했다. 조합원 윤종희 씨는 “파견이 불법이라는 판정만 받으면 회사측에서 우리를 직접 고용하고 해결될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에서 불법 판정이 내려진 후 사측은 고작 500만원의 벌금만 냈을 뿐이다.
파견직은 사내에서도 많은 차별을 겪어 왔다. 파견노동자들이 받는 기본임금은 최저 임금보다 10원을 더 쳐준 금액이었다. 기륭전자에서 2005년까지 일을 하고 조합원으로써 현재 투쟁에 동참하고 있는 오화숙씨가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주말 내내 근무하고, 야근하여 월말에 손에 쥔 돈은 90만원에서 100만원 가량이었다. 주말 다 쉬고 주중에 8시간씩 일한 달에는 5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근속년수와 상관없이 파견직은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돈만 받았다. 조합원들에 따르면 상여금도 정규직은 700%, 비정규직은 400%, 파견직은 0%였다. 현장 안에서도 정규직은 정규직,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끼리 어울렸다. 조합원 오화숙 씨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정규직이 계약직이라 그러면 말도 안걸어요. 밥 먹으러 갈때도 자기들끼리 가고”라며 “정규직이 스스로 뭐라도 되는 양 행동했어요”라고 말했다. 정규직 딴에는 어차피 몇 달 안에 해고될 사람인데 정 붙일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사내에서의 차별과 고용불안에 파견직 노동자들은 하루하루를 분노와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다. 현 정부는 파견 직종을 제조업, 건설업, 운수업까지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길고 긴 싸움의 시작
파견이 횡횡한 현실과 기륭전자의 고압적인 태도에 해고된 그리고 해고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2005년 7월이었다. 노동조합 조합원은 대략 200여명 가까이 됐다. 노조는 직접고용으로 전환을 통한 고용불안 해소와 임금인상을 주장했다. 회사는 임금인상은 전적으로 수용하겠으나 노동자들을 계속 해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김소연 씨는 “해고당하기 싫어서 노조를 결성했는데, 회사가 ‘해고당하고 싸울래? 해고 안당하고 싸울래?’라고 협박하는 꼴”이었다고 밝혔다. 기륭전자는 강도를 높여 1년 미만의 직원들을 해고하겠다고 나섰다. 만약 1년 미만으로 일한 직원들이 모두 해고된다면 노조원의 절반가량이 직업을 잃게 되는 상황이었다. 긴박하고 절실한 상황 속에서 노조는 2005년 8월 24일자로 파업에 들어갔다. 이미 파업 전에 회사는 부서별 간담회를 통해서 노조 탈퇴를 회유하고 심지어 협박도 일삼았다. 또한 공장 내에는 이미 파업전에 CCTV를 설치해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감시했다.
파업을 시작한 3일간 조합원들은 집에 가지 않고 농성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노조는 공장을 점거해 55일간 파업 농성을 진행했다. 회사에서는 남성 노동자들로 구사대를 조직했고, 용역업체를 통해 용역깡패를 고용했다. 이들은 수시로 파업 중인 공장에 쳐들어와 집기를 부수고 조합원을 폭행했다. 기륭전자 파업으로 노조활동을 처음해본 오화숙 씨는 “밤에 2명씩 조를 짜서 공장을 사수할 때가 가장 무서웠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해줬다. 건장한 남성들로 구성된 구사대, 용역깡패와 여성 노동자 사이에는 ‘싸움’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폭행이고 그에 대한 저항 내지 반항일 뿐이다. 김 씨는 “그래도 언제나 가해자는 우리고 피해자는 그 사람들이었어요”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몸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고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한 조합원도 있었다. 경찰에 맞았다고 신고를 하면 경찰은 늘 증거를 요구했다. 조합원들이 맞는 장면을 채증하려고 하면 구사대가 채증자 주위를 에워싸 촬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었다. 늘 경찰은 약한 노동자들을 연행해갔다. 공장 점거 파업 당시 노조에서 공장안에서 용역의 폭행이 있다고 신고하자 ‘구사대와 용역이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겠다’, ‘공장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던 경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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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씨의 16개월된 아이는 컨테이너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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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들의 생활터전인 컨테이너 박스의 안과 밖 |
1731일
“이렇게 길어질 준 몰랐죠”라며 5년간 싸우고 있는 조합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5년 새에 많은 일이 있었다. 1차, 2차 단식을 했다. 수차례 크레인에 올라 고공 농성을 했다. 원정투쟁을 하러 미국까지 가기도 했다. 숨돌릴 틈 없이 1731일을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파견법이 해지되기는커녕 점점 더 확대되는 추세이다. 파견을 통하지 않고서는 취업이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녀들 또한 여전히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김소연 씨(기륭전자 분회 분회장)는 “이런 현실이 조금 답답하다. 고강도투쟁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김 씨는 “늘 억울해요”라며 현실을 설명한다. 고강도 투쟁을 다짐해야 하는 현실, 이제는 기륭전자 대표이사까지 나서서 폭력을 휘두르는 현실, 해고 안당하려고 노조 만들었는데 노조 만들었다고 비정규직까지 해고하는 현실, 직접고용으로 전환되는 기간인 2년이 넘지 않았다며 파견직 노동자들을 기륭전자 사원으로 인정하지 않은 현실. 모두 그녀에게는 억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5년째 미동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점점 변화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다. 기륭 이후 많은 사업장에서 변화가 있다. 또한 법원의 판결도 조금씩 비정규직을 배려하고 있다. 김 씨는 “온전한 승리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1700여일을 이어온 투쟁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김 씨는 “잘못은 회사가 했는데. 잘못의 고통은, 책임은 고스란히 노동자들이 지고 있다”며 “우리가 포기하면 희망조차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포기 이후의 예상되는 그녀들의 모습은 똑같이 파견직이고 똑같이 비정규직이다. ‘노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여기서 한번 결판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차비조차 쥐어주지 못하고 투쟁을 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투쟁을 이어온 김 씨는 “투쟁과정에서 흘린 피와 땀 그리고 고통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물론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분명 올 것이고 하루라도 당겨보자는 마음”이라고 굳은 의지를 밝혔다. 파업에 참가한 120명의 조합원 중 현재 남은 사람은 8명이다. 투쟁 현장을 떠나간 사람들의 일부는 생계를 방치할 수 없어 다시 생계전선으로 뛰어 든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미 2,3번씩은 해고를 당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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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전자 신사옥 앞 아파트에 내걸린 플랑. 김소연 분회장은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 처지를 몰라서 그렇지 속사정을 알고나면 이해해 줄 것”이라며 섭섭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
이런 아픔 속에서도 그녀들이 싸움을 이어가는 2평짜리 컨테이너 박스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조합원들끼리도 가족보다 더 가까워졌다. 오 씨는 “투닥투닥 싸우기도 해도 늘 붙어 자고, 같이 밥 먹기 때문에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에요”라고 말한다. 김 씨는 “투쟁 과정 중에 5명의 아가씨들이 결혼을 했어요. 아기도 많이 태어났구요”라며 웃는다. 오화숙 씨의 16개월 된 아기는 날마다 컨테이너 간이 사무실을 지킨다. 날씨가 좋을 때는 엄마를 따라 집회에 나가기도 한다. 아기의 엄마인 오화숙 씨는 “아이랑 나들이 가고 장보고 그런 일상에서 사는 엄마들이 너무 너무 부러워요”라고 말한다.
기륭전자 투쟁으로 인해 그녀들의 모든 일상이 뒤바뀌었다. 폭행과 실랑이 그리고 경찰서가 일상이 됐다. 그러기를 벌써 5년. 그러나 그녀들은 “분명히 희망은 있다”며 다시 한 번 다부지게 마음먹는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여름 햇볕아래 까까머리에 94일간에 단식사진이 제일 먼저 뜨는 김소연 분회장, “비정규직은 죽음의 문제”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윤종희 씨, 5년전 노조활동이 처음이라 입에만 맴맴 돌던 민가와 투쟁구호를 이제는 누구보다 씩씩하게 외치는 오화숙 씨. 그녀들의 뒤바뀐 일상과 5년간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줄 유일한 방법은 우리들의 기억과 관심 그리고 ‘작은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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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분회장은 많은 이들의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