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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치를 찾습니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박하정 기자 (polly60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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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이었습니다. 5시간 정도 걸려 부산을 찾아간 그 날은 바로 어린이날이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씨 속에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조선소를 찾았습니다. 100일 넘게 집에 오지 못한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하늘 위로 솟은 크레인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아빠를 찾으러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습니다. 또 몇몇은 조선소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던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게 공장 설비 사이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오랜만에 만난 아빠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해고는 살인이다’, ‘노동자가 우선이다’. 붉은 글씨로 쓰인 플래카드와 그림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조선소 마당 앞에서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불었습니다. 아이가 쉴 새 없이 비눗방울을 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 마련한 무대 위에서 아이들은 입을 모아 ‘아빠 힘내세요’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아빠는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마술쇼를 보고 박수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 엄마는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정치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앞에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또 다른 기획 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의 동향을 알아보는 기사였습니다. 서울대생의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6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렸습니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설문조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겠다는 학생도 있었고, ‘이런 것’에 관심 없다며 응답을 모두 1번으로 몰아 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곳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어느 정당 소속인지 알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각 정당이 내세우는 정책과 입장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공약집을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신바람 나는 기업과 상생의 노사관계’, ‘생애 희망 디딤돌 복지의 구현’. 공약집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는 벌써 전 세계의 칭송을 받는 선진국이 됐어야 하고,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희망으로 가득한 문구들을 찬찬히 읽어내려 가고 있던 저의 머릿속에는 부산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냐”던 한 엄마의 하소연에, 공약집에 너무나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서민을 위해 정치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은 많은데, 정치가 무엇인지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말들은 많은데, 그 ‘서민’은 자신을 위해 정치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정치’는 많은데, ‘정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실종’돼 옅어져 가는 ‘정치’를 우리가 그저 무덤덤하게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