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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설명하는 과학사 이론 토머스 쿤,<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 교수 (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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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과의 유일한 외국인 교수인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 교수.


몇 년 전 학회 출장에서 미국 의 유명한 언론인인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의 인터뷰를 CNN에서 보았는데, 그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면 기사 작성에 정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10%정도밖에 안되고 좋은 기자가 되려면 그 10%를 알아낼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학문적 활동을 하면서 책을 읽는 것도 인터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많은 책 중에 학문에 대한 태도를 바꾸거나 인생관 형성에 도움이 되거나 하는 책은 몇 권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토머스 쿤(Thomas Kuhn)이라는 과학사가(科學史家)가 쓴 는 말 그대로 저에게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문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과학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었고 ‘이과’ 그 자체가 좀 먼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어 습득을 연구하면서 ‘가설’이라는 말을 자주 만났고 ‘경험적인’과 같은 전문적인 말도 접했습니다.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보다 깊게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과학사 책을 읽게 되었고 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저자는 당시에 지배적인 ‘직선의 과학사관’과 달리 ‘주기적 과학사관’을 주장하며 ‘패러다임 변화’라는 이론을 구축하고 과학사의 발전을 설명했습니다. 사전을 보면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이론적 틀’이라고 정의합니다. ‘패러다임 변화’는 한 패러다임이 길게 지배하는 시기와 그 패러다임이 붕괴하는 짧은 시기,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고 지배하게 되는 긴 시기를 말합니다. 패러다임의 붕괴와 출현에 따라 과학사가 발전합니다. 한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기에 연구자들은 그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연구하고 이 연구를 ‘보편적인 과학’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과학의 연구 활동은 한 패러다임의 지배시기처럼 길지만 연구 활동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패러다임의 한계를 점차 발견하게 되고 연구자들 사이에 불만이 쌓입니다. 결국 보편적인 과학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나고 설명을 찾는 과정에서 패러다임이 붕괴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이 나올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게 됩니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은 과학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학원 시절에 이 책이 저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연구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향상시켜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읽은 ‘새로운 논문’은 언젠가 낡아가고 연구사는 반드시 직선의 역사가 아니라서 ‘옛날 것’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보편적인 과학의 주변 또는 비판적인 연구 활동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유럽 이외 과학사의 예가 부족한 것이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읽으면 됩니다.
그 후에 패러다임 변화 이론은 과학사 이외에 여러 사회 현상에도 볼 수 있습니다. 2008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 한 예입니다. 2004년의 선거가 끝나고 다음 선거에서 주요 정당이 흑인 후보를 내고 그 후보가 당선할 거라고 주장했으면 아무도 안 믿었을 것이지만, 2008년에 버락 오바마가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민주당 후보로서 44년 만에 높은 득표를 얻었습니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 분야에서도 미국인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버락 오바마를 택했습니다. 사회, 문화, 교육 등의 다른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점은 과학 혁명에서처럼 갑작스럽게 오는 변화입니다. 물론 이 책은 과학사에 한정된 내용이라서 다른 분야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되고 다른 분야의 패러다임 변화와 과학사가 유사한 점이 있다는 참고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학문 분야 사이의 벽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학제적(學際的)인 분야가 탄생하고 있다는 것도 바로 학문의 패러다임 변화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혁명의 구조'가 앞으로 점차 없어질 '문과'와 '이과' 사이의 벽을 이어줄 가교(架橋)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