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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중의 『황진이』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정옥자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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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의 인물 중 황진이만큼 많은 작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도 드물다. 1938년 나온 이태준의 를 비롯하여 2004년 전경린의 까지 무려 10개의 황진이 소설이 확인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애독되어지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한 공중파 TV에서 황진이를 소재로 사용한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북한 문인 홍석중이 써서 2002년 평양에서 출판된 가 단연 주목된다.
주지하다시피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야사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의 인생역정은 기구하여 그야말로 소설 형상화에 적합한 주제로 여겨지는 것 같다.
작가 홍석중은 의 작가 홍명희의 손자이자 국어학자 홍기문의 아들로 조손 삼대로 이어지는 풍부한 인문학적 토양에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금강산과 개성의 문화유적에 대한 역사적 지식은 물론이려니와 남한의 표준어인 서울말과 북한의 문화어라는 평양말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우리말의 지평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그가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서울에서 자라다가 조부를 따라 월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지금까지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은 ‘놈이’라는 의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아마도 북한의 계급사관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의 조부 홍명희의 을 계승하는 임협소설의 맥락에 맞닿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는 황진이가 여성이고 서출이면서 기생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갖고 있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황진이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놈이와 황진이의 어린 시절은 의 길상과 서희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황진이의 몸종 이금이와 놈이를 모시는 괴똥이는 의 향단과 방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근한 인물배치 때문에 이 소설이 더욱 호소력을 갖고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유려한 문장과 서정적 서사구조로 우리 문학이 잃어가고 있는 건강성을 깨우쳐주는 힘도 갖고 있다. 최근에 나온 젊은 작가들이 도회적 세련미와 문학적 완성도를 갖고 있음에도 어딘지 작위적이고 건조하며 관념화되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에 비해 이 소설은 고전적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역사적 개연성을 충분히 살린 적절한 창조를 가미하여 설득력 있는 팩션(faction)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황진이의 용모를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눈이 어떻고 코가 어떻다는 식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우러나오는 광채, 아우라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이는 그녀의 정신력이나 거기서 연유하는 정채(精彩)에 대한 작가의 관심의 표현일지니 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듯 싶다. 황진이의 정체성도 지적이면서 중성적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지향하고 있는 양성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책은 북한의 문학작품이 주체사관에 입각한 조선민족제일주의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남녀의 사랑과 과감한 성애장면 묘사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소설이니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