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 > 고정코너 >이한권의책
이성형의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서울대저널(snujournal@gmail.com)

조회 수:533


장재준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강사)
photo1“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항상 호기심을 갖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며, 그리고 항상 어떤 곳에도 뿌리 내리지 않는….” (체 게바라)

사르트르였던가.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의 체 게바라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the most complete human being of our age)”이라고 칭송했던 이가. 아마도 1988년 언저리일 것이다. 그 ‘완전한 인간’이, 가장 깨끗하게 살아 남아 주기적으로 ‘부활’하는 바로 그 ‘영원한 자유의 아이콘’이 볼리비아 밀림에서 겪었던 일들을 ‘게릴라체’로 써내려간『체 게바라의 일기』를 “그날이 오면” 책방에서 구해 읽었던 때가. 그리고 분명 그 무렵부터였다. 진부한 문화적인 이미지만을 즉각적으로 연상시키던 생경한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마치 ‘문화게릴라’처럼 가슴에 품기 시작하던 시절이. 미국을 코앞에 두었기에 늘 아픈 멕시코를 지나,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칠레 해안을 따라 사막을 횡단한 후, 아마존으로 뛰어드는 원대한 라틴아메리카 대륙횡단을 소망하던 때가. 굳이 누구처럼 ‘뽀데로사’라는 이름의 모터싸이클에 몸을 싣지는 못할망정! 라틴아메리카의 사람, 삶, 문화, 숨결을 가슴으로 읽고 싶었다. 눈으로 받아쓰고 싶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사 조금씩 “진정한 소명”이 스페인어권 “세계 곳곳을 (이방인처럼?)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아 가고 있는데”, 꿈꾸었던 나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orcycle Diaries)는 갈수록 요원하게만 느껴지는데, 얼마전에 나는 발품을 팔아서 쓴 라틴아메리카 문화여행기를 ‘봤다’. 우리들 귀에 익은 라틴음악 ‘라 팔로마’의 첫 소절을 제목으로 차용한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그야말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다시 ‘읽는 느낌’이었다. 그토록 내가 쓰고 싶어 했던 ‘라틴 여행 일기’였다. “항상 호기심을 갖고, 모든 것을 들여다 보며”, 문화라는 시대적 화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다. 이 한 권의 책! 그것이 지닌 자력에 이끌려 텍스트에 닻을 내리고 그 텍스트를(라틴아메리카를!) 관류하는 다성적인 울림에 오래도록 젖어 들기를 빌며. 이상하게도 우리들에겐 여전히 미지의 땅인 ‘라틴아메리카의 문을 여는 전주곡 1번의 역할을 하기 기대’하며.
라틴아메리카 전문가인 저자는 쿠바, 페루, 칠레, 멕시코를 여행하며 보고, 듣고, 찍고, 느낀 것을 맛깔스런 문체로 고스란히 되살린 이 기행 에세이를 통해 정형화, 박제화 혹은 지나치게 파편화되었던 종래의 스페인어권 세계의 문화읽기 관성에 체계적으로 제동을 건다. 얄팍하고 창백해진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리얼리티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우리가 작위적으로 제조한 ‘이미지’의 굳은 껍질을 부수고 리얼리티 그 자체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이해 속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다부지게 신발끈을 고쳐 매고 탐험적인 ‘문화 여행’, ‘문화 만남’, ‘문화 사귐’을 독려하고 있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으로” 왜곡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우리의 인식틀을 꼼꼼하게 해체시키는 도전적 통찰이 책 갈피마다 꽂혀있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워 경쾌하다. 전체적으로 이 책이 사고의 틀을 깨며 벌이는 스케일이 큰 싸움의 성격을 띠는 것은, 여느 문화기행서와 날카롭게 구별되는 것은, 바로 구미의 역사와 문화에 지나치게 경도된 우리의 서구중심주의적인 시각의 교정을 일관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새로운 만남이고 다원적인 소통이며 반성적인 성찰인 까닭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따라서 이 책의 이정표마다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공생의 대륙, 변화와 저항의 대륙, 경계 허물기를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대륙, ‘풍성한’ 혼혈의 대륙인 라틴아메리카는 세계사의 훌륭한 요약이다. 인류 문명사의 복잡한 단층들을 숨김없이 가장 ‘정열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실체가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가난과 풍요, 반미와 친미, 원주민 문화와 유럽 문화, 정복과 독립, 경계와 소통, 종속과 해방, 신자유주의와 반세계화, 다름과 섞임, 정주(定住)와 이주(移住), 이 모든 대비항들이 질펀하게 -퓨전의 원조 비빕밥처럼- 버무려진 라틴아메리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Salad Bowl’이다. 언어와 문화와 인종의 Mall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진부한 다양성이 아니라, 헐거운 끼워맞춤이나 짜깁기가 아니라, 이질적인 여러 문화와 인종 및 언어가 풍요롭게 한데 섞이고 어우러진, 지극히 가변적이고 복잡다난한 가능태다. 각종 ‘흐름’이 경계와 규제를 허물고, 유동적인 것이 고착적인 것을 용해시키며, 우리들을 모든 접점과 틈 사이를 문화적 난민으로, 신유목민으로 내몰아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라틴아메리카는 현대의 아이템과 아이콘을 매우 흥미롭게 포괄한다.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는 이러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문화적 다양성의 합리적인 핵심을 매우 ‘비주얼’하게 잘 보여준다. 다문화, 다인종 시대의 핵심 문화적 블루칩(Blue Chip)으로 각광받는 라틴아메리카를 여태 멀찍이서 수줍게 바라 보며 속짐작만 했던 사람들에게,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지녀 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는 매우 유용한 라틴입문서가 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화, 역사, 사회현실로 떠나는 ‘여행’에 입담 좋은 길벗이 되어 주리라. 물론, 우리 사회의 문화적 흐름을 빗대어 추적해 보는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여행이 유쾌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