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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공부의 실천윤리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윤세진(고고미술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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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할 시간이 아직도 오지 않았다라든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의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과 흡사하다. 늙은이는 늙어가면서 과거의 자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인해 더 젊어질 수 있도록, 또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비록 젊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음으로써 또한 노인과 같이 될 수 있도록,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철학해야 한다.”(에피쿠로스)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오랫동안 근대에 매여 있었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기원으로서의 근대. 그런 점에서 근대라는 시공간을 탐사하는 작업은 한동안 무척이나 스릴 있고 흥미진진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내게 새롭게 던져진 문제는, 근대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시공간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였다. 근대가 잃어버린 것, 혹은 근대의 이름으로 추방했던 것을 되찾기. 그것을 ‘아직 오지 않은 것’의 관점에서 다시 사유하기. 그 때, 막연하게 진부하다고만 생각해왔던 동양 고전의 텍스트를, 운명처럼 만났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왕양명의 이다.

‘삶도 모르는데 하물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했던 공자의 말은 유학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유학은 늘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다. 현실 저 너머의 세계, 삶 너머의 지평은 유학에서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때문에 유학은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한다. 현실 질서를 옹호하고, 그런 점에서 위계적이며, 의무와 도덕법칙들에 사로잡혀 있다는 등등. 하지만 이러한 오해가 비단 유학의 텍스트뿐이겠는가.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로 무수히 많은 오해들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의 오해나 이해가 아니라, 유학을 삶에 ‘유용한’ 철학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쓰이기를 원했던 공자의 끝없는 방랑,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무인(武人) 왕양명의 행보는, 그들의 철학이 단 한 순간도 현실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들에게 문제는 삶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주어진 삶’이었으며, 따라서 그 삶을 어떻게 보다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가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의 대부분은 학문에 대한 이야기, 고전이나 옛 성현들의 가르침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매우 고답적이고 진부한 텍스트로 읽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인물들이 세상을 잊지 않을지라도 유능한 잠수부만이 물에 빠진 사람을 파도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뚜 웨이밍)고 보았던 왕양명에게, 사유한다는 것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였으며,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의 문제였다. 이 단순한 어록이나 사변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지침서로 느껴지는 것은, 왕양명의 사유 전체가 하나의 실천, 하나의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를 두고 말했던 것처럼, 양명의 텍스트에서도 “개념과 삶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위대한 사유가 그러하듯, 양명의 사유 역시 ‘百死千難’을 뚫고 체득된 것이다. 따라서 왕양명에게 있어 앎이란 대상에 대한 인식의 내용이나 가치판단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얻은 지혜에 가깝다. 그에게 지식이란 마음의 문제이자 신체의 문제이며, 의지의 문제고, 세계의 문제다. 즉, 안다는 것은 ‘동시에’ 행위하는 것이며, 행위하는 것은 ‘동시에’ 사유하는 것이다. 양명에게 있어서, 앎과 행위와 사유 사이에는 어떠한 시간적 격차도, 위계도 없다.
은 사유의 어떤 ‘체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서 이끌어낸 개념의 지층들을 규정하고, 의미의 층위를 배열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것은 다만 물음과 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한 상이한 대답들이, 구체적인 질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대답의 스펙트럼이 펼쳐진 텍스트가 바로 이다. 때문에 을 읽는 것은 어떤 개념을 배우고,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수준에서 실천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어떤 질문을 들고 텍스트를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기쁨들이 생성되겠지만, ??전습록??은 무엇보다도 ‘공부’ 자체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텍스트다. 왕양명에게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단순한 자족적 수양도 아니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습속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행위와 마음과 삶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변화시키는 것! 왕양명이 말하는 ‘공부’가 ‘학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일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없는 공부다. 특정한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과 공명하기 위해 ‘자아’라는 경계를 허물고 역동적인 세계 속으로 투신하는 것. 그런 사유와 실천이 바로 공부다. 따라서 공부는 사욕과 습속을 버리고 다른 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에서 나는 비로소 삶과 괴리되지 않는 공부의 존재론을 발견한다.
왕양명이 생각하기에 학문을 아는 사람의 가장 큰 병통은 “바로 ‘선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善與人同’ 못하는 것이다.” ‘선물할 수 없는 善’, 세상에 나눠주지 못하는 철학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성인들의 위대함이란 결국 “선을 남과 함께 하시어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시며, 남에게 취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셨다.樂取於人以爲善”()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며, 사욕을 지키려는 탐욕, 실체적인 ‘주체’에 대한 집착,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에서 왕양명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무지’다. 그리고 그 무지를 이겨내기 위해, 다른 자아를 횡단하기 위해, 습속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공부’하라는 것이다. ‘좋은 사회’를 구성하려면 자신을 먼저 혁명하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라는 짧은 글에서 들뢰즈는 스프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그는 어떤 준비도 필요치 않은 직접적인 만남의 대상이기 때문에, 비철학자, 혹은 전혀 교양을 갖추지 못한 어떤 사람도 그로부터 갑작스러운 영감과 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를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스피노자라는 환경에 다다르는 것이고, 그의 체계 혹은 구성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이끌리는 것이다.” 어쩌면, 왕양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은 모든 사람을 위한 텍스트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수준에서 아주 구체적인 깨달음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말로 ‘열린 텍스트’다. 그가 무인으로서, 때로는 유배자로서 세상을 떠돌며 ‘길 위에서’ 실천한 가르침들은, 어떻게 ‘지식’이 무기가 될 수 있는지, 공부가 어떻게 삶을 단련시키고 매순간을 혁명으로 만드는지, 철학이 왜 삶에 대한 선물인지를 감동적으로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