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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갇히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기 아리엘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김명환(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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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으로서 기초적인 자양분이 될 독서를 대학에 와서마저 제대로 해볼 여유 없이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내 전공인 문학 분야에서도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많다. 가령 최근의 우리 소설로 신경숙의 , 황석영의 등은 곰곰이 음미하며 읽어볼 작품이며, 우리 현대사에 대한 지적 탐구의 동기를 얻게 될 좋은 책들이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에 휘둘리는 젊은이들을 보면 기성세대로서 죄책감마저 든다. 그러나 우리를 옥죄는 여건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공부를 못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패배주의이다. 젊은이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그것을 뚫고 나가는 끈기와 배짱, 저항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새로운 세대가 어떻게 기성세대의 한계를 뛰어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칠레 출신 미국 거주 작가인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선 를 소개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마침 내가 이 책의 공역자이기도 하고, 수록된 희곡작품들이 비교적 짧아 바쁜 요즘 학생들이 읽기 좋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 힘든 강렬한 독서 체험을 얻기 때문이다.

칠레 작가 도르프만은 1970년 선거로 탄생한 좌파 정부인 아옌데 정권에 열렬히 참여했다가 1973년 삐노체뜨의 군사쿠데타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활동과 함께 칠레의 현실을 그리는 작품을 시, 소설, 희곡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칠레가 제한적으로 민주화되지만, 그것은 삐노체뜨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그가 장악한 군부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가운데 이루어지는 아슬아슬한 과정이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표제작 의 배경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보자. 한밤중에 인적 드문 길에서 자동차가 펑크난 빠울리나의 남편 헤라르도는 로베르또 미란다라는 의사의 도움으로 겨우 귀가한다. 로베르또는 자신의 집을 향해 떠났다가 라디오 뉴스에서 헤라르도가 독재정권의 범죄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맡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경의를 표할 겸 차 수리에 도움을 주고자 돌아온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 너무 늦어져 로베르또는 헤라르도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한다. 이미 잠든 척하며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던 빠울리나는 잠든 로베르또의 방으로 들어가 그를 때려 기절시킨 뒤 의자에 꽁꽁 묶는다. 아침에 잠에서 깬 남편에게 빠울리나는 군사정권 시절 그를 찾던 정보기관에 자신이 끌려가 모진 고문과 강간을 당할 때 고문자들 편에서 일한 바로 그 의사가 로베르또라고 주장한다. 로베르또는 사람을 잘못 봤다며 결백을 주장하고, 헤라르도 역시 확실한 증거가 없을뿐더러 이런 행동이 적법한 절차가 아니라며 아내를 만류한다. 그러나 빠울리나는 권총으로 두 사람을 위협하며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로베르또가 과거의 범죄를 자백하는 것이고, 그가 자백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한다. 과연 로베르또는 빠울리나의 확신처럼 범죄자에 틀림없는가? 아니면,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그녀가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것인가? 이 이상으로 작품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소위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주연 여배우의 이름을 따서 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어 지금도 어렵지 않게 빌려볼 수 있다.)

로베르또는 과연 군사정권에 협력한 범죄자인가? 저자는 결코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작품은 작가가 작품 후기에도 쓴 대로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할 것인가? 미래에 과거가 되풀이될 위험을 방지하면서 어떻게 과거를 잊을 것인가?”라는 난제를 다룬다. 이는 우리도 6월항쟁 이후의 민주화과정이나 근자의 과거사 진상규명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며,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민들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고통스럽게 경험한 일이다.

도르프만의 작품은 삶의 난제들과 거짓 없이 대결한다는 점에서 저항문학, 민중문학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다. 즉, 삶의 근원적 문제를 가차없이 파고듦으로써 고전적인 품격을 성취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정치적이지만 정치 팸플릿과는 다른 언어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라고 물을 때 누구나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브레히트의 서사극과도 흡사한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라진 두 진영을 무대 위에 세우지만 평면적인 이분법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며 또 벌어질 수밖에 없을 복잡한 갈등의 축들을 온전히 무대 위에 살려내면서, 지극히 정치적이지만 정치 팸플릿과는 전혀 다른 삶의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대학생활에서 한번쯤 꼭 읽어볼 작품들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