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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 재개발 소동, 무엇을 남겼나? 비리로 얼룩진 상도4동 산65번지 재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왕희대 기자 (wang431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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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에서 원하지 않는데도 쫓겨나게 된 사람들, 임대아파트를 분양받기는커녕 이주비용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 오늘날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개발의 피해자들이다. 상도4동에도 이처럼 기구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0~30년간 산65번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주민들이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진 혼란 속에서 이들이 겪었던 사연을 듣고자 상도4동 세입자 철거민 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들은 매일 사무실에 나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상도4동 산65번지는 6.25 전쟁 이후 지주인 지덕사 측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대를 받고 땅을 빌려주면서 형성된 달동네다. 재단법인 지덕사는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지덕사는 정치인들과 막역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넓은 땅을 소유한 지주이기도 하다. 이곳 주민들은 지덕사에서 빌려준 땅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전에는 산이었던 곳에 직접 길을 내고 상하수도를 만들었다. 산을 주택가로 만든 만큼 이들이 집에 부여하는 의미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이사를 가는 경우가 드물어 이웃들끼리도 유달리 사이가 좋았다.
상도4동 산65번지는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경치가 좋아 예부터 재개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 한국경제신문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의 시작
상도4동 산65번지 가옥주들은 이 지역을 재개발하고자 2005년 4월 재개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동작구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후 2007년 6월 21일 서울시가 이곳을 재개발 지역인 상도 11구역으로 지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지리적 요건이 좋은 이곳을 개발·분양하면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건설업체 (주)세아주택은 이 지역 재개발 사업에 참여하고자 금호건설에 시공사업을 제의했다. 금호건설도 상도동 재개발이 충분한 수익성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세아주택의 제안을 수락했다.
가옥주와 세입자들이 바라던 재개발은 공적개발의 형태였고 세아주택이 추진한 재개발은 민간개발의 형태였다. 공적개발의 경우 주민들에게 임대아파트 제공과 이주비용 지급이 법적으로 보장되지만 민간개발의 경우 주민들을 위한 이주대책 마련은 의무사항이 아니다. 세입자들과 세아주택 사이의 갈등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세아주택은 금호건설과 계약을 맺은 다음 대지주인 지덕사로부터 땅을 사들이고 이미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던 조합 및 주민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공적개발 방식을 지지하면서 민간개발 방식으로의 전환을 극구 거부했다.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세아주택은 철거용역업체를 고용하면서 물리력을 동원했다. 상도 11구역 곳곳에 용역직원이 배치됨에 따라 주민과 용역직원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용역직원들은 동네에 항시 대기하면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한편 주민들을 방문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물품 검사를 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취재기자들과 다투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2008년 10월 10일의 비극
세아주택 측에서는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상도 11구역에서 진행되는 재개발을 취소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또한 소송이 진행되는 도중에 법원으로부터 상도 11구역에 건물철거 단행 가처분을 얻어냈다. 2008년 10월 10일, 상도 11구역에 남아 적절한 보상과 이주대책을 요구하던 주민들에게 수백 명의 용역직원들이 몰려와 강제로 철거를 집행했다. 전날에 법원으로부터 철거를 예고하는 소장이 주민들에게 전해졌지만 법적 용어를 잘 알지 못하는 일부 주민들은 설마 하는 마음에 철거 당일에도 집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날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일방적인 철거 집행에 저항하고자 했던 주민들은 용역직원들에게 무차별한 폭행을 당하며 집밖으로 강제로 쫓겨났다. 김두근 씨는 당뇨병을 오랫동안 앓고 있어 집안에 누워있었으나 용역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끌어내 길 한복판에 버려두고는 철거를 단행했다. 철거민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영순 씨의 경우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문 앞을 막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역직원들이 다른 집을 통해 지붕으로 침입했다. 김 씨와 남편 강광헌 씨는 폭행을 심하게 당하고 집밖으로 끌려나왔다. 이날 이루어진 강제 철거로 인해 40여명의 주민과 10여명의 용역직원들이 다쳤으나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119구급대 대원들은 용역직원들만을 싣고 가버렸다. 주민들이 119에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서야 뒤늦게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는 주민들을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었다.
철거 당일, 한 주민이 아픈 몸을 차에 기댄 채 서럽게 울부짖고 있다. ⓒ 빈민해방 철거민 연합
이처럼 주민들에게 불리한 행동을 취한 것은 비단 119구급대뿐만이 아니었다. 철거를 집행하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하는 집행관이 해당 지역에 도착해 철거할 집의 상태나 사람이 없는지의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만 한다. 하지만 10월 10일에 주민들이 본 사람들은 집행관이 아니라 철거인부와 용역직원뿐이었다. 집행관은 주민들이 갖은 수모를 당하고 나서야 용역직원들에게 둘러싸여서 현장에 도착했다.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경찰들도 주민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폭행으로 얼룩진 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전경을 태운 버스는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정차해 현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제했을 뿐이다.
비리의 발각, 그리고 상도4동의 현 상황
공권력, 금력, 폭력을 등에 업고 상도 11구역의 재개발을 민간개발 방식으로 전환하려던 세아주택의 계획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도중 저지른 비리가 들통 났기 때문이다. 2009년 7월 검찰은 재개발 추진을 위해 뇌물을 건넨 세아주택 대표를 비롯해 뇌물을 받고 이에 협조한 사람들을 구속 혹은 불구속 기소했다. 지덕사 이사장은 돈을 받는 대가로 세아주택에게 재개발 지역의 땅을 시세보다 비싸게 팔았다. 주민들이 조합설립 인가를 신청했지만 동작구청 담당과장은 이와 관련한 행정 업무를 지연시켰다. 세아주택 대표를 비롯해 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음에 따라 세아주택 측의 재개발 시도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대법원이 재개발 지역 취소에 관한 소송에서 1심, 2심에서와 마찬가지로 원고인 세아주택의 손을 들어줬다. 재개발 추진위원회의 설립에 동의한 이들의 대다수가 무허가 건물을 소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서울시의 재개발 구역 지정은 무효라는 판결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2010년 7월 26일 상도 11구역 재개발 지정을 취소했다.
결국 상도 11구역은 재개발이 되지도 못한 채, 상도4동 산65번지로 돌아오게 됐다.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집들과 그 위에 무수히 자라난 잡초들, 그리고 상처받은 세입자들의 몸과 마음뿐이다. 현재 상도4동 산65번지의 땅값은 과거보다 몇 배로 껑충 뛰어오른 실정이다. 지덕사는 토지 매매 거래를 무효화하기 위해 세아주택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세아주택과 시공 계약을 맺었던 금호건설은 매우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 여러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섰으나 세아주택이 이자를 감당 못하자 상도동 재개발 건을 금호건설에 넘겼기 때문이다. 말이 많았던 상도동 재개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호건설은 민간개발 방식이 아닌 공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겠다며 사전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작구청 측에서는 이미 서울시에서 재개발 취소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만큼 더 이상 구청 측이 관여할 수 없다며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불투명하다고 이야기했다.
상도4동 세입자 철거민 대책위원회를 찾아가다
300여세대가 살았던 상도4동 산65번지는 이제 70여세대만 남아서 생활하는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부서져버린 집과 텅 빈 집이 많다보니 밤이 되면 집에서 새어나오는 빛 대신 희미한 가로등불만이 고요한 동네를 비춘다. 건물 벽 곳곳에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적힌 여러 문구가 눈에 띈다.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투쟁 투쟁!’, ‘악덕지덕사는 각성하라’, ‘강고한 연대 투쟁, 생존권을 쟁취하자’ 등. 상도4동 철거민 대책위원회 부위원장 김영순 씨와 빈민해방 철거민 연합 정책위원장 서효성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간 사무실에는 주민들이 여럿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08년 10월 10일에 벌어진 일들을 묻자 김영순 씨는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집안에서 농성을 하던 이들에게 용역직원들은 분말소화기를 연신 뿌려대고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온갖 폭언과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박천순 씨는 “분말소화기를 막 뿌려대는데 눈이 맵고 숨을 쉴 수가 없는 게 최루탄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하며 그때 맞은 것 때문에 아직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용역들에게 둘러싸여서 폭행을 당하는 순간에는 ‘지금 맞아서 죽게 되면 정말 개죽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요즘도 집회에 참석해 주거권 보장을 외치고 있는 상도4동 철거민 대책위원회 부위원장 김영순 씨.
김영순 씨는 재개발을 둘러싼 지독한 투쟁 속에서 남편 강광헌 씨를 영영 만날 수 없게 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던 강 씨는 2008년 10월 10일에 집안의 가구를 미처 빼지도 못한 상황에서 집이 강제 철거당했다. 이후에는 상도4동 산65번지 내에서 4번이나 쫓기듯이 이사를 다녀야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하던 2009년 7월 어느 날, 강 씨는 심한 복통 때문에 대림동 성모병원을 찾았다. “묵묵히 참아내는 성격에 아파도 말을 안했을 남편이 일을 하다 말고 병원에 가자고 했을 정도니 남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간다”며 김 씨는 눈물을 흘렸다. 병원 검사를 받은 결과, 강제 철거 때 폭행을 당하는 과정에서 갈비뼈에 금이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설상가상으로 암을 확정 받았다. 1개월 반 동안 암치료를 받았으나 강 씨는 결국 아내와 초등학생 딸을 남겨둔 채 2009년 9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강제 철거 당시 맞은 곳을 치료하기 위해 동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암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강 씨가 재개발로 인해 1년간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급성 암에 걸린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빈민해방 철거민 연합 정책위원장 서효성 씨는 현재 주민들의 보상에 대해 동작구청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서효성 씨는 “군사 정권 시절에도 사람이 들어가 있는 집은 함부로 강제 철거를 집행하지 않았다”면서 그날 있었던 비민주적인 철거 집행에 대해 비판했다. 재개발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나서 세입자는 안중에도 없듯이 행동한 그들이 요즘도 당당히 거리를 걸어 다닌다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어 그는 “현재는 재개발 논의가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결국 상도4동 산65번지가 재개발이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주민 폭행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이주비용과 임대아파트 분양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서울대학생이 과거에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가졌던 관심을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적잖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서있는 입장에서는 사회 구성원, 특히 학생들의 관심이 도움이 많이 된다면서 학생들이 약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