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호 > 학술 >심포지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가야 하는 것’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설립총회 및 기념 심포지움
등록일 2016.03.12 01:30l최종 업데이트 2016.03.13 23:34l 선창희 기자(sch716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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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9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설립총회 및 기념심포지움’이 개최됐다.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후원하고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연구회를 출범시키고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를 학문적으로 검토하는 토론장을 만들려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서울대 양현아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사회를 맡은 이날 행사는 총 2부로 진행됐다. 제1부 연구회 설립 총회에서는 연구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경과보고와 회칙 의결, 회장 선출이 진행됐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설립 준비는 2015년 12월 5일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입장서 발표와 함께 시작됐다. 이날 행사는 그 준비가 결실을 맺는 행사였다. 연구회는 학문적 연구를 기반으로 여러 방법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고, 관련 사안에 대해 토론하며 입장을 발표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취지를 밝혔다.


  이날 신임 회장이 된 경북대 김창록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인사말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우리들 연구자·활동가들은 오늘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를 출범시킨다”고 발표했다. 또한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외교장관 합의에 대해서 “가해국인 일본이 명확한 책임을 짐으로써 진정으로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그 정의로운 해결을 통해 비로소 보편적 여성인권과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연구회의 입장을 밝혔다.


  제2부 심포지엄에서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의 문제점을 검토하는 발표가 이뤄졌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이나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 | 첫번째 발표를 맡은 이나영 교수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외무장관 협의로 포스트식민 대한민국의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지금 일본 정부와 일제강점기의 일본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불가역적인 역사적 부정의를 반복해서 저질렀고 여전히 미국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한일협정’에서 그러했듯 박근혜 정권은 역사적 과오를 반복했고 여전히 탈식민이 되지 못한 포스트식민 국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해방 후 양 국가의 무시, 대중적 무지, 그리고 피해자들의 오랜 침묵을 뒤로 하고 새로운 역사의 태동이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던 윤정옥 교수와 그의 오랜 친구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 그리고 1987년도 민주화 운동과 함께 성장한 여성단체들이 있었다. 그들의 헌신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됐다. 1998년 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 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발제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1990년 11월 16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탄생해 동시대의 여성단체들과 시민단체들, 학생, 종교단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졌다. 그 다음해에 김학순 씨의 최초 피해자 공개 증언이 있었고 이에 고무된 해외의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재 1200차를 훨씬 넘긴 ‘수요 집회’는 정대협의 주최로 1992년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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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연구회


  운동이 진화하면서 담론도 변화했다. 민족담론과 피해자담론이 80년대에 지배적이었다면 90년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담론은 성폭력문제와 민족문제의 경합이었다. 2000년대 이후 담론은 더욱 확대돼 전시성폭력, 평화, 그리고 여성인권문제를 포괄하게 됐다. 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공식적 독립 이후에도 잔존하는 식민주의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또한 피해국 여성들과 연대하는 ‘아시아연대회의’가 지난 해 13주년을 맞이하는 등 초국적 연대도 이뤄지고 있다. 2012년 나비기금, 2013년 나비네트워크가 결성된 것은 시민적 차원에서 역사적 책임이 전승됐음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생존자들의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는 사실 우리 모두가 안아야 하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발제를 마쳤다.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의 역사학적 검토


이신철 교수(동아시아역사연구소) | 이어진 발표는 이신철 교수가 맡았다. 이신철 교수는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에 대하여 “한국정부가 역사적 정당성을 전제로 한 가치 중심의 외교 정책을 포기하고 한미일 공조체제라는 외교적 현실 중심의 정책을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이 선택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외교에서 역사적 가치를 포기하는 선택은 국가의 역사적 책임과 관련돼 있다”면서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 번째 문제는 ‘‘위안부’ 피해 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책임은 무엇인가?’다. 이 교수는 “식민지 과거사와 관련한 한국정부의 역사적 책임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 피해 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적 책임 인정이 완성되려면 진상규명으로 시작해 사과와 배상까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당시 일본이 재산상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한 것을 전후처리의 문제로 등치시킨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는 그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역사적 책임을 결여했다. 또 합의문 조항에서 암시된 것처럼 ‘아시아여성기금’의 전례를 따르는 것으로 예상돼 진상규명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는 ‘국가가 개인을 대신한 역사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다. 이 교수는 “독일의 경우도 대통령의 사과는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하고 그 이후에 개인 배상과 개인 책임은 별도로 진행된다”고 지적했다. 역사적 책임이 인정되면 역사 화해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고 역사 화해는 기억, 기념, 교육의 문제를 통해 발현되고 완성된다. 2015 한일 외무장관 합의는 화해의 내용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한국 교과서 기술 내용에 대해 일본이 검열이나 압박을 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 교수는 “결국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청산을 마지막으로 일본의 전후 청산이 완성됐다는 인식을 국민교육에 확대, 재생산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세 번째 문제는 ‘식민지 피지배국 한국의 세계사 측면의 역사적 책임은 무엇인가?’다. ‘국제사회’ 또는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견해’는 여전히 제국주의 경험을 가진 몇몇 국가들의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세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역사적 책임이 필요하다. 이 교수는 한국의 행보를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이해와 ‘지역 패권 추구’라는 일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들러리 외교”라고 비판하며 “이는 결국 세계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탈식민주의, 탈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동의 길이자 신(新)냉전에 대한 공조의 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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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 합의가 타결됐다. ⓒ시사뉴스투데이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의 법적 검토


김창록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 마지막 순서를 맡은 김창록 교수는 2015 한일외교장관 합의의 형식에 대해 “정식 조약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법적인 의무가 대한민국 정부에게 발생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합의가 전권위원의 임명·합의 및 서명·비준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고 오직 양국 외교장관의 회담 결과를 기록한 양국 정부의 게시물, 그리고 기자회견 내용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한일 양국 정부사이의 합의인 이상, 비록 정치적·외교적인 의미라고 하더라도, (합의가)일정한 구속력을 발생시키는 것은 사실이며 합의에 이르게 된 국제정세에 비추어볼 때 그 구속력의 강도가 약하다고 보기b어렵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를 1995년 일본 내각총리대신 명의의 ‘사과의 편지’와 비교하면 “내용상 차이는 단 하나”라고 지적했다. ‘사과의 편지’에서 ‘도의적 책임’이 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에서는 ‘책임’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도의적’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암시한다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 이후 아베 신조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하여 한일 사이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경제협력 협정으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됐다는 우리나라의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도의적’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지만 그 ‘책임’이 ‘도의적 책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정리했다.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2006년에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위헌을 선언한 것에서 출발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1965년 청구권협정에 관하여 해석 분쟁의 존재를 인정하며 ‘한국정부는 그 해석상의 분쟁을 「청구권협정」 제3조의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해결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그 해결에 나서지 않아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한국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수용해 일본 정부에 구상서를 두 번 보내면서 양국은 지난 12월 27일 제 12차 국장급회의에 이어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에 도달했다.


  김 교수는 “문제는 2015 합의에서 해석상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합의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 정부는 2015 합의에 의해 위헌 상태에 재진입했다”고 판단했다. 2015 한일 외교장관 합의의 효력은 한국 정부의 외교적 보호권 포기에 국한되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피해자 개인이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발표를 마치며 “한일 과거청산에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2015년 합의가 한일 과거청산을 위한 국내적, 국제적 노력에 악영향을 미칠 현실적인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우려를 표하며 “그 점에서도 2015년 합의는 파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세계 전시성폭력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되길

  제2부 심포지움이 끝나고 동국대 박정애 박사(대외교류연구원)와 김재영 독립영화 감독의 특별프레젠테이션이있었다. 박정애 박사는 인사말과 함께 이나영 교수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일본인 학자가 이나영 교수에게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 교수는 ‘해결되지 않으면 어때요’라고 답했다. ‘‘위안부’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가야 하는 것이다. 그 해결은 100년, 200년, 500년이 걸리더라도 계속 해 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할머니들이 겪었던 피해가 아직까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박 박사는 “해결을 해 나가는 움직임으로서 오늘 연구회가 출범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며 발표를 마쳤다.


  서울대 정진성 교수(사회학과)는 1부의 시작을 열었던 축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가 정치적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성장하기를,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크나큰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그것이 한국과 일본, 아시아 피해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전시 여성인권 침해 문제에 있어서 정말로 무거운 사회 정의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며 지지와 축하의 말을 전했다. 주최 측의 초대글이 밝히고 있듯이, 이날 심포지엄은“연구회의 학문적인 확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해결이야말로, 보편적 여성인권을 추구하는 동시에, 한일과거청산을 통한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긴 여정임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자리매김”하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