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호 > 학술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을 위해 정치적 올바름, 타자화와 배제의 벽을 무너뜨리는 상상력
등록일 2018.12.17 22:24l최종 업데이트 2018.12.18 14:58l 왕익주 기자(dlrwn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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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 절대로 거들떠 보지 말아라. 저 년은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수 작가가 ‘단풍’이란 제목으로 SNS에 게재한 이 글엔 독자의 항의가 이어졌다. 시대에 뒤쳐진 여성혐오 표현을 쓴다는 비판이었다. 반대로 ‘시는 시로 읽어야지’라며 작가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성을 비하할 의도나 남성우월을 표출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는 작가의 해명과 함께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사소해 보이는 이 사건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 ‘문학은 문학일 뿐이다’ 단정하기엔 여러 가닥의 문제의식이 얽힌 무거운 질문이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는 믿음, 혹은 환상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김현 평론가의 글엔 오랜 믿음이 하나 담겨 있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실제로 개발독재 시절, 문학은 자주 민주주의와 민중처럼 억압받는 편에 섰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쉽게 떠오르는 예시 중 하나다. 수많은 문인이 그 대오에 합류했고, 이들은 넓게는 민중문학을, 좁게는 5·18문학 등의 장르를 일궜다. 문학이 억압이 아닌 자유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믿음은 이러한 경험 속에 강화됐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란 명제는 사회 참여적인 차원에서만 사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내면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측면에서도 문학은 자신이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필요로 했다. 문학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없고, 또 완전히 자유로워야만 인간의 내면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문학은 검열될 수 없는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김수영의 주장엔 문학이 완전한 자유를 필요로 한다는 그의 시각이 잘 담겨 있다. 이러한 신념 속에서 그는 문학이 준 자유를 십분 활용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옹졸함을 표현하기 위해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죄와 벌」)힌 장면을 내보이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당 장면은 ‘폭력의 재현과 재현의 폭력’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치졸함을 드러내기 위해 ‘여편네’를 때리는 장면을 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작가가 택한 폭력의 재현은 그 재현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폭력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재현도 폭력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은지 평론가는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란 글을 통해 폭력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여전히 의의가 있다고 답한다. 그는 ‘정말로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문학은 좀더 ‘오염’되어야 한다’며 ‘세월호 문학에는 세월호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현실 또한 기입되어야 하고, 페미니즘 문학에는 페미니즘을 모르는, 혹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현실이 기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의미 있는 문학은 현실과 유리될 수 없기에 현실이 더럽고 지저분하다면 문학은 그 현실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조연정 평론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라는 근본 전제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에서 그는 ‘가령,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끔찍한 폭력과 착취가 자행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그러한 폭력적 현실을 그려내는 작가의 의도를 해로운 것’이라고까지 여기지 않았고, 이는 ‘작가에게는 당연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도가 전제되어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 유명 작가의 표절 사건과 문단 내 미투 운동 등을 거치며 ‘문학적 재현의 ‘선한/올바른’ 의도’라는 믿음이 계속될 수 없게 됐다고 본다. 그는 ‘문학에 종사하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량한 시민일 것이라는 어떤 생각들이 오히려 문단을 우리 사회의 가장 고인 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반성하지 않는다면,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란 전제는 맹신이 된다고 강조한다.

  오혜진 평론가에게도 문학의 자율성은 현실이라기보단 신화에 가깝다. 그는 “정치도, 경제도, 그 어느 것도 절대로 억압하지 않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오혜진 평론가는 “만일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여성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재현한다면, 그래서 피해자는 자신의 만신창이를 온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면, 피해자는 그것을 원하겠나” 물으며 “그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작가로서의 직업정신이 불철저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폭력의 재현을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는 “폭력의 재현과 재현의 폭력을 민감하게 구분해 다루는 게 작가적 역량”이라고 봤다.


다시, 감수성의 혁명을 위해

  그렇다면 독자는 재현의 폭력이 담긴 작품을, 가령 김수영의 시를 버려야 할까? 오혜진 평론가는 “이는 비생산적 논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오 평론가가 생각하는 생산적인 논의 방식은 작품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읽는 것이다. 그는 “김수영은 시를 쓸 당시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이 자유에 대한 메시지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라며, 이는 역사적 감수성의 발현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문인이 처한 역사적 한계를 인식한다고 해서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까지 중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인 역시 자신의 재현 방식이 계속 승인되고 정당화되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 시대의 문학적 감수성이 무엇이 돼야 할지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과 정치적 올바름 사진1.JPG



  오혜진 평론가가 기획한 책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은 그 뜻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은 서문에 자신들이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기존 문단에서 문학적인 것과 비문학적인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등을 구분 짓는 원리와 그것이 생겨난 배경이라고 밝힌다. 이들은 책에 ‘그 원리가 여성과 성소수자를 비롯한 타자(성)에 대한 모종의 배제와 위계화를 경유·승인함으로써 성립해 온 것이라면, 새 세대 문학주체들에 의해 도래할 새로운 ‘문학(성)’은 그런 낡고 비민주적인 상상력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여기서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문학이 타자를 배제하고 부조리한 위계를 용인하는 언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뭉뚝’하지 않으려면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의 바람처럼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을까. 최근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 등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의 약진은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오혜진 평론가는 “《82년생 김지영》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한 문학의 대표처럼 읽히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 되묻는다.

  오혜진 평론가가 지적한 《82년생 김지영》의 한계는 작품이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혔다는 세간의 비판과 궤를 달리한다. 그는 오히려 해당 작품에서 나타난 정치적 올바름이 충분히 예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82년생 김지영》이 “주인공이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어떤 비규범적인 일도 하지 않고 살았으니 차별이 아닌 인정을 해달라는 플롯”이라고 지적한다. 만일 김지영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고 일탈을 저질렀다면 지금처럼 많은 공감을 사지 못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문제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새로운 성적 질서를 상상하지 못하는 뭉뚝함”에 있다고 그는 분석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뭉뚝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곧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오혜진 평론가는 정치적 올바름이 “소수자가 다수자처럼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니게끔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사회적 약자가 다원성을 박탈당하고 타자화되지 않는 사회가 정치적 올바름의 지향이라는 설명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은 몇몇 혐오 표현을 쓰지 않는 수동적인 규범이 아니라 다원적인 사회를 그리는 능동적인 개념이다. 오혜진 평론가는 문학이 능동적이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에 대한 안전한 순응이 아닌 새로운 질서에 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에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가 ‘기존의 이성애중심적 성체계를 상대화하는 일과는 무관‘하며 그곳에는 비혼·성소수자·트랜스 여성 등 다원적 주체의 공간을 확보하는 움직임이 없다고 비판한다.

  정치적 올바름의 문학은 단순히 특정 표현에 ‘혐오’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현실에서 타자화된 이들이 문학 속에서 타자화되지 않도록, 그래서 다시 현실 속에서 주체로 돌아설 수 있도록 기성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타자화의 높은 벽을 허물지 못한다면 문학은 그간 벽 바깥에 있던 이들과 소통할 수 없다. 문학이 단절이 아닌 소통을 지향하는 한, 정치적 올바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