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호 > 학술
한국 주식시장의 큰 손, 국민연금이 나아갈 길 ‘스튜어드십 코드’가 단순히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등록일 2019.02.27 00:10l최종 업데이트 2019.03.09 22:59l 왕익주 기자(dlrwn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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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17일 국회서 열린 한 토론회는 제목을 통해 국민연금에 질문을 던진다.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국민연금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연대지부 박창진 지부장의 답변은 명확했다. 그는 “대한항공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이 오는 3월 열리는 주주총회서 조양호 회장의 이사 연임을 막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패널들의 의견은 대체로 박창진 지부장의 주장과 맥을 같이 했다.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이사 해임 주주 제안 등의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해 불법을 저지른 총수 일가를 견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토론회가 제시한 방향성은 분명하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느린 보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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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국회의원 회관서 열린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국민연금의 역할을 무엇인가?' 

토론회의 모습



‘스튜어드십 코드’,
국민연금의 역할 변화를 말하다

  한진 총수 일가의 갑질이 일으킨 파문이 국민연금에게까지 닿은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의 주주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주식을 10.57% 보유한 3대 주주다. 자본시장법은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주주를 ‘주요 주주’로 분류한다. 그만큼 유의미한 액수다. 국민연금이 주요 주주로 있는 기업은 대한항공뿐만이 아니다. 2018년 11월말 기준 기금적립액 644조 중 36.6%를 주식에 투자한 국민연금은 현재 코스피 상장사 중 약 96개 기업에 대해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4년 사이 52개 증가한 수치다.

  주식 시장의 큰 손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오랫동안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가진 영향력은 미미했다. 토론회서 발제를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김남근 부회장은 “2004년 국민연금이 보유지분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그동안 국민연금은 주주총회의 다수 의견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지적했다. 김 부회장을 비롯한 패널들은 국민연금이 더 이상 침묵을 지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토론회의 방점은 ‘대한항공 정상화'에서 '국민연금의 역할'로 옮겨진다.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근거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에 있다. 이를 제정한 한국지배구조연구원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투자대상회사의 중장기 발전과 고객 및 수익자의 이익을 위해 회사와의 대화 등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수행하도록 유도하는 자율규범’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관리하는 수탁자인 국민연금이 국민의 이익에 충실하기 위해선 주주로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 투자대상회사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미다.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을 위해 국민연금은 투자대상기업 중 주주 가치를 훼손한 기업을 중심으로 ‘중점 관리대상’을 선정하고, 이들 기업에 대해 비공개 대화 진행, 경영참여 주주 제안, 주주대표소송제기(주주가 회사를 위해 이사 등의 책임을 추궁하며 제기하는 소송)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내용의 로드맵을 발표한 바 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하지 않으면
수탁자 책임도 없다

  국민연금연구원 원종현 부원장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가 자본시장의 건전화를 위해 도입됐다”고 분석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불건전성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오명을 얻을 만큼 유명하다. 책임투자 자문기관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자본 시장의 건전성이 가장 떨어지는 나라”라며 주요한 원인으로 취약한 기업지배구조를 뽑았다.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기업지배구조라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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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주가수익비율(Price-to-Earning Ratio)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가수익비율은 한 기업의 주식을 주당순이익(EPS)로 나눈 값으로, 기업의 일정 순이익에 대한 투자자의 평가를 반영하게 된다. 주당수익비율이 낮은 경우 해당 기업 혹은 자본시장은 저평가됐다고 인식된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통해 한국 자본시장의 효율성이 타 아시아 국가의 자본시장보다 떨어지는 현상을 다룬 적 있다. ©<이코노미스트>



  오늘날의 기업지배구조는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발달했다. 기업의 주인인 주주는 기업으로부터 배당을 받을 권리와 의결권을 갖는다. 다만 주주 모두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업은 전문 경영인을 두고, 이들을 감독하고 주요 경영 사항을 의결하기 위해 이사회를 구성한다. 이사회의 이사진은 일 년에 한 번 이뤄지는 주주총회의 투표를 통해 구성된다. 주주총회는 이외에도 경영진의 보상 방식, 정관 개정 등에 대해 제안하고 의결한다. 기업지배구조의 대략적인 상이다. 

  취약한 기업지배구조는 이해관계의 상충을 방지하지 못하고 주주 이익을 훼손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대표적인 예다. 당시 양사의 합병 비율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에 유리한 반면 삼성물산의 주주에게 불리하게 산정됐다. 삼성물산의 지분을 다수 보유한 국민연금은 3000억 가량의 손실을 예상하고도 이를 그대로 승인해 문제가 된 바 있다. 대한항공 역시 조양호 일가의 밀수 등 배임 혐의가 시장에 알려지자 주식이 큰 폭으로 하락해 국민연금을 비롯한 주주의 이익이 훼손됐다.

  서울대 박상인 교수(행정대학원)는 이처럼 기업지배구조가 불건전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수탁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주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국민연금은 부작위를 통해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를 가능케 했고, 이는 연금 가입자인 국민의 손실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며 “스튜어드십 코드가 제대로 이행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우리나라”라고 강조했다. 서스테인베스트 류영재 대표 역시 “북미의 공적 연금도 한국 금융 당국자를 만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정책을 묻는데 정작 한국 국민연금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소극적”이라며 국민연금의 역할 변화를 촉구했다.


국민연금, 대한항공에 대해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하지 않기로

  대한항공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첫 사례다. 그렇기에 개별 기업 수준의 문제를 넘어 선례로서 의미가 컸다. 토론회서 발제를 맡은 민변 김남근 부회장 역시 이를 강조했다. 그는 “대한항공 주주총회는 향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의지를 가늠할 시금석”이라며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대해 제대로 된 주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도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1월 토론회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1일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에 관한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운용위)는 주주총회에서 대한항공에 대해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대신 대한항공의 모기업인 한진KAL의 주주총회서 정관 개정 주주제안을 통해 주주권을 행사한다는 입장이다. 주주제안은 주주총회에 참가한 주주 모두에게 주어지는 권리로, 정관 개정, 이사 선임 등의 사항을 표결에 부치길 건의하는 수준의 행동이다. 주주가 사용하는 가장 일상적인 권리 행사 방식 중 하나로 분류된다. 결국 토론회에서 제시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방식인 사외이사 추천, 조양호 이사 등에 대한 주주대표소송제기, 타 기관투자자와의 연대를 통한 조양호 이사 재선임 반대표 결집 등은 선택지에 들지 못한 셈이다.

  기금운용위는 대한항공에 이사의 선임과 해임에 영향을 주는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근거로 자본시장법상 ‘단기매매차익반환’을 들었다.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의 지분목적을 기존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바꿀 경우, 6개월 내 발생한 해당기업의 매매차입을 기업에 반환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할 위험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대한항공 주주총회와 관련, 기금운용위의 자문을 맡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자전문위) 위원들은 기금운용위의 판단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수탁자전문위 김경율 위원은 “국민연금은 장기투자를 원칙으로 한다”며 “그럼에도 단기투자를 상정한 채 매매차익환수를 이유로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수탁자전문위 이상훈 위원 역시 기금운용위의 결정이 수탁자책임위의 자문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3년간 조양호 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져 온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며 총수 일가를 견제하는 기조를 유지·확대하고자 했다”며 “다만 주어진 논의 시간이 짧아 주주권의 구체적인 행사 방식을 확정하지 못한 정도”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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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서 발언 중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김경율 위원과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연대지부 박창진 지부장(각각 좌우)



스튜어드십 코드는 경영권 침해가 아닌 견제

  이처럼 스튜어드십 코드가 선언적인 수준에 그친 것은 그간 ‘어떻게’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진전되지 못한 결과다. 국민연금연구원 원종현 부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선 투자 철학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수익률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재무적 투자에서 경영참여 투자로의 전환은 큰 과제인 만큼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이 아직 이를 위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본 그는 토론회 당시에도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갖는 선택지가 제한적일 것이라 봤다. 원 부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른 행동계획을 미리 구체화하지 않고 매번 개별 사안에 대해 사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준비의 부족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원종현 부원장은 사전적인 행동계획이 더욱 구체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가 모델로 삼는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캘퍼스)의 경우 이사 해임을 주도하는 등 굉장히 적극적인 수준의 주주권을 행사함에도 문제제기를 받지 않는다”며 이는 “캘퍼스가 세부적인 행동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행동계획을 강조하는 원 부원장은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신중론자기도 하다. 그는 “국민연금이 기업에 가진 지분이 총수 우호 지분에 비해 크지 않고, 장기투자자로서 개별 기업에 대한 투자 철회가 쉽지않은 만큼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압박 수단이 많지 않다”며 “국민연금이 재벌 개혁의 칼로 인식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수탁자전문위 이상훈 위원은 국민연금이 사전적인 행동계획에 따라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는 원종현 부원장에 동의하면서도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관련된 보수적인 언론 환경으로 인해 국민연금의 역할이 위축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경영권 침해, 연금사회주의 등 스튜어드십 코드에 씌워진 편견이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차분한 토론을 막아선 안 된다는 의미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은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는 결국 연금사회주의로 흐르는 징표가 될 것”이라고 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가 연기금을 활용해 총수 일가의 경영권을 간섭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상훈 위원은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경영에 대한 간섭이 아닌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한 견제와 감시”라고 일축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라는 비판과 달리, 주주로서 기업의 불법행위를 견제하는 것은 오히려 시장친화적인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박상인 교수 역시 토론회서 “주주가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반자본주의라는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로 밖에 볼 수 없다”며 재벌 기업의 주인은 재벌 총수라는 잘못된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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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운용위원회 회의가 열리던 1월 16일 아침, 플라자호텔 앞에서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연대지부와 참여연대 관계자가 함께 기금운용위원회에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를 요구하고 있다. ©참여연대



  이상훈 위원이 말하듯 “재벌의 문제는 재벌 총수의 문제”다. 총수 일가가 문제시된 것은 대한항공 뿐 아니다. 그간 재벌 기업은 취약한 기업지배구조 속에서 일반 주주의 부를 희생해 총수의 승계, 이익의 사적 편취를 허용했다. 많은 경우, 희생당한 일반 주주 중 하나는 국민의 노후연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었다. 이 위원은 “한국에 있는 대다수 기관투자자(자산운용사)는 재벌의 계열사인만큼 투자대상기업의 취약한 지배구조에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며 국민연금이 견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상훈 위원 역시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가진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국민연금이 “앞으로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사례를 축적해가면서 취약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한항공 사태 앞에 주주 국민연금이 무력하지 않기 위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