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 특집
"극장은 낮아져야 한다" 김슬기 작가에게 블랙리스트 이후를 묻다
등록일 2017.04.24 14:14l최종 업데이트 2017.05.15 14:48l 박윤경 기자(pyk94111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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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단이 지난해 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작품의 방향을 작가들에게 강요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립극단은 국내창작극 개발 프로젝트 ‘작가의 방 낭독극장(낭독극장)’을 기획해 지난해 11월 5-13일 신인작가 6인의 작품을 낭독공연으로 선보였다. 다수의 참여 작가는 국립극단 측이 계속해 작품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고 증언했다. 이내 국립극단이 블랙리스트를 의식해 자체검열을 진행했다는 비판이 연극계 안팎에서 일었다.

 

  한편 연극계 내부는 이번 사태를 블랙리스트의 연장선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참여 작가들은 이 일을 계기로 연극계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분위기를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저널>은 낭독극장에 참여해 연극 ‘김치녀 레볼루션’을 선보였던 김슬기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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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작가는 창작인과 극단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한종 사진기자



국립극단 측으로부터 작품의 방향을 강요하는 듯한 발언을 들었는가?


  낭독극장이 시작하고 작가들과 국립극단 직원들이 처음 모이는 자리에서 국립극단 정명주 기획팀장이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정 팀장은 ‘‘개구리’때의 일 기억하시죠, 그런 일이 없도록 작품을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2013년 박근형 연출가는 국립극단에서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를 풍자하는 내용의 연극 ‘개구리’를 올렸다. 이후 박 연출가는 각종 정부 지원에서 배제됐고 손진책 당시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사퇴했다). 이후에도 국립극단 측은 ‘국립극단을 위한 작품을 써달라’, ‘해외 연출에게 피드백을 받을 예정이니 해외 연출이 모르는 정치·역사 분야는 피해 달라’고 전해왔다. 국립극단 측은 해외 연출을 들어 요구했지만, 예술성이 있으면서도 풍파를 겪지 않을 안전한 내용의 극을 올리라는 것 아닌가. 충분히 검열 로 작동할만한 발언이었다. 낭독극장에 함께 참여했던 구자혜 작가는 정 팀장에게 ‘정부 혹은 국가를 비판하는 극을 써도 되냐’고 물었다가 ‘노(No)’라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작가 측에서 문제제기는 이뤄졌는가. 이뤄지지 못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 발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문제제기를 하진 못했다. 국립극단에 참여하는 창작자는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공연 기회가 적을 뿐더러 작가 급여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에, ‘신인’ 창작자로서 국내 최대 극단인 국립극단과의 협업은 큰 기회로 다가왔다. 어떻게든 남고 버텨야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작가들은 스스로를 ‘을’ 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낭독극장이 끝나고 난 후에야 고연옥 작가의 기고문을 필두로 비로소 문제제기가 이뤄질 수 있었다.


 
문제제기가 이뤄진 후 국립극단과 정명주 팀장의 대응은 어떠했나.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3월 17일 국립극단 공식홈페이지에 해명문을 올렸다. 해당발언은 한 직원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 국립극단 측 지시나 압력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더라. 정명주 팀장 개인의 실수로만 환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해 화가 났다. 얼마 되지 않아 정 팀장도 SNS를 통해 입장을 밝혔는데,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중 ‘실제 검열이 이뤄졌다면 작가들이 왜 프로젝트에 남았겠느냐’는 말이 가장 상처였다. 정 팀장은 왜 작가들이 국립극단에서 창작활동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지를 정말 알지 못하는가. 국립극단 기획자의 발언은 어떤 의도에서건 작가들에게 일종의 검열이자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국립극단이 ‘선호’할만한 주제의 극을 쓰지 않았다. 결과는 어떠했나.


  국립극단은 애초 경쟁구도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하고, 6개의 낭독공연작 중 1개를 본 공연작, 3개를 쇼케이스작으로 선정, 나머지 2개를 탈락시켰다. 공교롭게도 탈락한 2개는 ‘김치녀 레볼루션’을 비롯해 모두 여성주의 희곡이었고, 노인문제나 가족 서사 등 비교적 ‘안전한’ 주제의 작품이 선정됐다. 본래 연극계는 폐쇄적이고 마초적이다. 중견 연극인은 대부분 남성이며 남성 중심 서사에서 여배우의 역할은 도구적으로 다뤄지기 일쑤다. 성폭력을 경험해도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구조다. 여성주의 희곡을 준비할 때에도 선배들에게 ‘세계관이 좁다’는 등의 말을 들었고, 김윤철 예술감독이 김치녀 레볼루션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로서는 여성주의를 다뤘기 때문에 최종 탈락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김치녀 레볼루션은 낭독공연 당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였다. 국립극단은 탈락된 작품도 ‘작가의 방 2기’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을 예정이다. 내 작품세계를 포기하고 결국 극단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을 쓰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국립극단이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와 연극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일까.


  비단 국립극단뿐 아니라 블랙리스트 이후 연극계 전반에서 내부성찰이 빈곤했다는 생각이 든다. 검열을 연극계 외부, 정부의 블랙리스트 문제로만 조명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이야기가 연극계 도처에서 폭탄처럼 터져 나올 수 있도록 연극계 내부는 더욱 예민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성 창작자가 자기의 작품세계를 신인 창작자에게 강요하는 관행이 근절돼야 한다. 연극계에는 중견 작가가 신인 작가의 ‘멘토’로 나서서 지도·교육하는 소위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중견 작가가 일방적으로 신인 작가의 창작물을 교정하려 든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낭독극장은 신인 창작자의 창작극 개발을 격려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창작자가 공연 기회를 얻기 위해 ‘을’이 되는 상황에서 다양하고 참신한 예술이 나오기란 불가능하다. 국내 창작자가 작품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립극단은 창작자의 공연을 ‘올려주는’ 주체인 양 선정과 탈락의 칼을 쥐고 창작자들에게 권위를 내세울 때가 많다. 국립극단을 비롯한 국공립 기관은 ‘갑’의 위치에서 내려와 창작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작품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작가는 극단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교정과 검열의 칼을 내려놓고, 작품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극장은 낮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