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호 > 특집
연대로 지켜온 5년간의 사랑방 광화문 장애인권운동 농성장의 하루를 함께하다
등록일 2017.09.03 19:49l최종 업데이트 2017.09.06 15:26l 박수현 기자(oksh497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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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농성 종료가 결정되기 이전에 취재 및 작성됐습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8월 25일 광화문 농성장을 찾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했으며, 농성은 9월 5일 종료될 예정입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해치마당으로 이어지는 9번 출입구 아래편 길목에는 5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광화문 농성장(농성장)’의 활동가들이다. 농성장은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국면 이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수용시설 폐지 공약을 요구하며 광화문역 지하보도에 어렵게 자리를 틔웠다. 정부청사와 청와대가 가까이 있어 광화문이 상징적인 거점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였다. 물론 당시에는 농성이 5년이나 이어질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농성장이 차려진 지 1,810일째 되던 2017년 8월 4일,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돼버린 그곳의 하루를 함께했다.


1.jpg 농성일 달력과 여러 현수막이 걸린 농성장 입구의 모습


광화문역의 오랜 살림집

  장애인 복지제도의 비합리성을 알리고, 시민들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농성장에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100만인 서명운동’이 진행된다. 오전 9시 50분쯤 찾아간 농성장에선 이미 세 명의 활동가들이 서명을 받고 있었다. 경산장애인부모회 소속인 세 활동가는 전날의 야간조를 담당해 하룻밤을 농성장에서 보내고 난 뒤였다. 그중 문형숙 씨는 여름이라 텐트 안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며, “잠자리가 어색해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푸념을 했다. 연일 폭염이 계속되는 날씨에 서명을 받는 책상 뒤로 두 대의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농성장 내부에는 야간조를 위한 이층침대를 비롯해 5년 동안 불어난 살림살이가 가득했다. 시위할 때 사용하는 앰프와 피켓, 야광조끼 같은 물품도 쌓여있었다. 리모델링을 세 번 거쳤다는 농성장은 그럼에도 편한 집이 될 수는 없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활동가들은 다른 사람이 천막을 잡아주지 않으면 농성장 안팎을 오가지 못하며, 딱딱해 보이는 이층침대는 2인용인 탓에 세 명 이상이 야간조를 담당할 경우 누군가는 깔개를 편 바닥에서 자야한다.


2.jpg 농성장 안에 이층침대를 비롯한 살림살이가 가득하다.



  책상 반대편 벽에는 13개의 영정사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사연을 설명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활동보조인이 없을 때 화재가 발생해 질식사한 故김주영 씨, 장애등급심사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고 생계에 대한 막막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박진영 씨 등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사각지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유독 어린 아이들이 영정사진 앞에 멈춰서 보다가, 먼저 간 엄마를 쫓아가 저게 뭐냐고 물어보곤 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철균 활동가는 영정사진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게 장애인의 현실이고, 바로 그 불편함을 알리기 위해 농성장이 5년째 계속되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책상 왼편에 자리한 두 개의 큰 유리 상자 안에는 분홍색종이배들이 가득 차있었다. ‘분홍 종이배 접기 프로젝트’는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시작됐다. ‘정말 죄송하다’는 메모와 함께 목숨을 끓은 세 모녀의 이야기는 당시 복지제도에 경종을 울렸다. 농성장의 활동가들 역시 세 모녀의 죽음을 추모하고, 차별 없는 복지를 기원하고자 농성장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벽면 포스터에는 “누가 ‘구명보트’에 탈 것인지 선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보트의 숫자를 늘려야 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이 수백 개의 종이배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농성장을 지켜온 이유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는 농성 첫날을 치열한 싸움의 연속으로 회상했다. 높은 기온에 비까지 오던 2012년 8월 21일 활동가들은 12시간가량 이어진 경찰과의 대치 끝에 지금의 자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박 대표는 “기자회견을 한 다음 광화문역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경찰들이 처음부터 입구를 다 막고 있었다”며 “진입을 시도하다 타박상을 입거나, 휠체어가 부서지고, 응급차에 실려 간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팽팽한 대치는 자정까지 이어져 ‘휴전상태’가 되고 나서야 활동가들은 맨몸으로 자리를 얻어냈고, 20여 일 후에야 온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초기의 농성장은 지금과 달리 매우 불안정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절실하게 농성장을 꾸리고 지켜왔을까. 농성장 주변 수많은 포스터들은 입을 모아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를 외치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누구보다 큰 목소리를 내던 ‘장애여성공감’ 조미경 활동가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두고 “사람이 살아가며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를 예산 때문에 박탈시키는 제도”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장애등급제는 국민연금공단의 심사를 통해 결정된 6개 장애등급을 기준으로 장애인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다. 농성장의 활동가들은 사람에 등급을 매기는 일 자체가 잘못됐다며, 장애등급제는 행정상의 편의만을 고려한 제도라고 소리를 높였다. 서류상의 절차를 통해 등급이 판정될 뿐 장애인은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서비스를 요구할 수 없다. ‘혼자 옷을 입을 수 있는가?’ 등의 질문으로 구성된 설문지 하나로 일상생활이 결정되기 때문에, 정민지 활동가(가명)가 지적한대로, 장애인은 “끊임없이 얼마나 자신이 무력한지 보여줘야 한다.” 춘천에서 온 유상민 활동가(가명)는 “등급제가 없어지거나 완화되면 중증장애인이 자기 몫의 서비스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지만, 더 많은 파이를 경증, 중증 장애인 모두 골고루 나누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공감을 호소했다.

  한편 부양의무제는 부양의무자(배우자, 부모, 자녀, 자녀의 배우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벌 경우 기초생활수급자가 최저생계비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부양의무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꼽았다. 장애여성공감 이은지 활동가는 “부모가 수급을 받으려면 자식은 부양의무제가 정한 소득 기준을 넘지 않기 위해 ‘가난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밖에도 가족과 오래 전 연락이 끊겨 부양받을 수 없음에도 수급권을 박탈당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촘촘하지 못한 사회안전망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 박철균 씨는 국가가 부양의무제를 통해 국가 책임의 복지를 ‘정상가족’의 의무로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부양의무제 때문에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가 자녀를 죽이거나, 동반 자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해왔다. 농성장 벽면에는 ‘부양의무제 폐지되면 좋은가배?’라는 제목 아래 활동가들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족과 연락할 수 있겠네’라고 적힌 한 조각이 오랫동안 시선을 끌었다.


3.jpg 부양의무제가 폐지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한마디들이 분홍종이배 조각을 채웠다.


  소속도, 개인적 상황도, 장애 정도도 다 다르지만, 활동가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현행 장애인복지제도의 부당함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농성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장애인복지제도가 비장애인과 무관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도 의견을 같이했다. 지금 장애가 없는 사람도 언제든지 장애등급에 따라 삶이 좌우되는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부양의무제는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는 가난의 굴레를 견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조미경 씨는 “비장애인도 남의 일이라 단정하기보다 본인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안내소이자 사랑방이 된 농성장

  농성장을 지키는 활동가들은 이따금씩 시민들을 향해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서명운동 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혹은 휠체어를 탄 채로 농성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서명을 유도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미 익숙한 풍경인 듯 농성장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가끔 다가와 말을 거는 시민들 중 열에 일곱은 교보문고로 가는 길을 물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농성장에 온다는 박철균 씨는 “농성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서명을 해주는 시민이 많이 줄었다”며, “시민들이 자주 묻는 곳들의 위치를 암기해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편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며 서명을 하러 오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서명지에 이름을 적으며 자신도 장애인이라고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고 밝힌 한 시민은 “하다못해 기차를 탈 때마저 등급에 따라 다른 서비스를 받게 하는 장애등급제가 불공평하다고 느낀다”며 서명에 참여했다. 책상에 사탕만 올려두고 가려던 한 시민은 활동가들이 서명을 권유하자 이미 세 번이나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옆에 서서 활동가들의 설명을 듣던 초등학생도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으면 좋겠다”며 응원의 말을 전했고, 호주에서 온 관광객도 어렵사리 영어로 전달한 설명을 들은 끝에 서명지에 이름을 적고 갔다.

  이은지 활동가는 농성장을 사랑방에 비유했다. 그는 농성장을 지키는 연대 단위가 다양한데다가, 한 단위 내에서도 돌아가며 농성장을 지키기 때문에, 농성장에는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농성장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모두 뜻을 함께 하기 때문인지, 자리에 모인 활동가들은 자연스레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얘기하곤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소속 출신지를 물었고, 비장애인 활동가는 장애인 활동가들을 위해 선풍기의 위치를 조정해줬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 씨의 비유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내부로부터의 시선, 외부로부터의 시선

  어느덧 살림집, 안내소, 사랑방이 된 농성장에도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이은지 씨는 “지하보도는 바깥보다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더 추운 것 같다”며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농성장에서의 고충을 토로했다. 실제로 더운 날씨에 지하보도에 종일 앉아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투쟁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역에도 예외 없이 장벽은 존재했다. 기자와 함께 광화문역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 이 씨는 “입구에 턱이 없는 음식점을 찾기 어렵다”며 서울한복판에서조차 장애인의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춘천에서 온 장애인 활동가들은 저녁을 먹으러 나간 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늦은 이유를 묻자 김학수 씨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고르기 힘들어 좀 더 멀리 다녀왔다”고 설명했다.

  또한 광화문역 지하철에서 내려 농성장으로 오는 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따라서 휠체어를 타는 활동가들은 느리고 위험한 휠체어리프트를 이용해야만 한다. 조미경 씨는 일부러 서대문역에서 내려 한 정거장 거리를 휠체어로 이동한다. 그는 “오늘처럼 땡볕이 내리쬐는 날이나 추운 겨울엔 농성장 오기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4.jpg 여러 단위들이 돌아가며 농성장을 밤낮으로 지키고 있다.


  장기간의 농성에서 오는 정신적, 물리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활동가들과 지지를 보내는 시민들이 있기에 농성장은 계속해서 지켜진다. 박철균 씨는 “모두의 마음이 농성장을 유지시키는 동력”이라며 “모든 활동가들이 농성장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런 한명 한명이 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조미경 씨도 “많은 연대 단위 덕분에 5년간 농성장을 지켜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현수막을 읽다가 서명을 남기고, 활동가들과 얘기하며 “장애등급제의 대안에 대해서도 설명해주는 자료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는 시민들이 있어 농성장은 지속할 힘을 얻는다.

  1,810일 중 단 하루, 10시간 동안 기자는 농성장 안에서 ‘내부인’의 시선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농성장의 활동가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듯 농성장 앞을 빨리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원망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농성장 바깥으로 나오자 문득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외부인’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란 이처럼 유동적이고 무의미하다. 농성장 밖의 시민들이 농성장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농성장에서 만난 유상민 활동가는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위해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보편적인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5년을 견뎌온 사람들의 소망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장애인권운동, 다 끝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