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호 > 특집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녹두 대학동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다
등록일 2017.12.04 15:42l최종 업데이트 2017.12.06 20:46l 허유진 기자(qq8779@snu.ac.kr)

조회 수:18

  2017년 5월, 인문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이 녹두거리 건너편 서림동 골목으로 축소 이전했다. 2014년 6월, 술집 ‘임꺽정은 살아있다’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들이 녹두거리에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올해 치러진 마지막 사법시험을 기점으로 고시촌의 분위기도 변화하고 있다. 18년 동안 고시촌에서 수험서를 팔았던 ‘한국서점’은 지난 6월 문을 닫았고, 1978년부터 운영된 ‘광장서점’은 2013년 부도를 맞았다. 대학가와 고시촌의 색이 옅어져가는 지금,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대학동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봤다.



녹두, 학생들 간 유대감을 확인하던 해방구


  1975년 2월 28일,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관악골프장 부지로 이전하면서 철거민이 모여 살던 대학동의 분위기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녹두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됐다. 당시 학생들은 동맹 휴업, 단체 가두행진 등 민주화 운동을 활발히 진행하면서도, 본부 직원과 사복 경찰의 감시를 피해야 했다. 학생들은 얼굴을 가린 채 자보를 붙였고, 학생과 전경이 대치하는 상황도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해방구를 찾아 녹두에 모여들었다. 이현주(언어 85) 씨는 “복사집에서 신문과 유인물을 만들며 시위를 준비하거나, 시위가 끝나고 녹두거리에서 뒷풀이를 하곤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의 김동영 대표는 “서점이 학내 시위의 기점 역할을 했다”고 돌이켰다. 김 대표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쇠파이프, 깃발, 화염병과 책가방을 서점에 맡기고 시위에 나갔으며, 시위가 끝나면 서점에 돌아와 다음 시위를 위해 함께 읽을 책을 정하곤 했다.



사진1.PNG

▲1988년, 녹두거리에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학생운동 현장 ⓒ『대학신문 사진으 로 본 서울대학교 50년』



  녹두거리는 1990년대 학생들의 생활 중심지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녹두에서 각종 모임을 가지며 유대를 다졌고, 녹두의 술집들은 ‘홈커밍데이’, ‘일일호프’ 등 각종 행사와 뒤풀이 장소로 사용됐다. 특히 서점 ‘그날이 오면’ 앞 메모판은 학생들이 약속시간과 장소를 적어놓은 메모로 가득 찼으며, ‘그날이 오면’ 앞은 말 그대로 1990년대 학생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김동영 대표는 “1차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 녹두거리는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로 가득 찼다”고 회상했다. 학생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 카페도 많았다. 서점 ‘그날이 오면’ 2층에 위치한 카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날개를 편다’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총학생회 문화국은 ‘구석말 가라사대’ 팀을 꾸려 세미나 카페 등에서 정기 공연을 진행하거나, 교내 동아리와 함께 문화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주점 ‘태백산맥’에는 학생들이 공연할 수 있는 무대 ‘비누방울 혹성’이 조성됐고, 여기서 노래패와 밴드, 연극회의 공연과 전시가 다수 이뤄졌다.


  당시 학생들은 녹두거리를 캠퍼스보다 더 친밀하게 느끼며 깊은 애정과 유대감을 가졌다. 1994년에는 학생들과 녹두 지역상인들이 ‘제1회 녹두문화제’를 함께 개최하기도 했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들’의 요리경연대회, 녹두거리 상인회의 일일합동 주점 등의 행사가 열려 큰 호응을 받았다. 이후 문화제는 총학생회 지역연대사업부의 주관으로 넘어가 1999년까지 이어졌다. 녹두 지역상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연대의 손길을 내민 것도 역시 학생들이었다. 1997년 ‘그날이 오면’ 대표가 ‘이적표현물에 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학생들은 서점 앞에 모여 경찰의 서점 침탈을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김동운 대표는 “학생들이 자기 공간, 자기 조직이 침탈당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녹두, ‘벼슬산’에서 고시생들의 마을로

 
  한편 산세 좋은 절에서 공부하는 선비가 많아 ‘벼슬산’으로 불렸다던 관악산 자락에, 1970년대부터는 ‘고시 문화’가 그 자리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대학동에 등장한 일명 ‘돼지막(1평짜리 방에 책걸상, 침구만 놓인 무허가 건물)’은 고시생들 사이에서 최적의 공부 장소로 입소문이 퍼졌다. 1980년대에는 고시원이 늘어나며 본격적으로 고시촌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1980년대부터 대학동에서 고시서적을 판매해온 ‘법문서적’ 사장 A 씨는 “80년대에 고시 독서실, 고시식당이 들어오며 지금과 같은 고시촌의 모습이 갖춰졌다”며 “당시에는 대다수가 사법시험을 공부했고, 그 외에도 행정고시(준비생)뿐이었다”고 회상했다. 2000년대에는 사법시험 응시제한 연령이 사라지고 선발인원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많은 고시생들이 고시촌을 찾아왔다. 



사진2.JPG

▲고시원과 원룸으로 구성된 고시촌의 풍경 ⓒUrbanpoly 네이버 포스트



  현재도 ‘고시 문화’는 이어지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녹두 고시촌의 고시생들은 주로 고시학원에서 수업을 듣거나 독서실에서 자습을 하며 일과를 보낸다. 식사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뷔페 형식의 고시식당에서 한 끼당 3-4000원인 식권을 월 단위로 끊어 이용한다. 고시생들은 고시촌 언덕 인근의 ‘고시공원’이나 야외 헬스장인 ‘산우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가기도 한다. 또 고시촌에는 고시생들을 겨냥한 각종 서점과 복사 가게가 밀집돼있어 고시촌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법문서적’ 사장 A 씨는 이전부터 고시생들이 독서실에서 스터디를 하기 위해 서점 앞에서 만나곤 했다고 돌이켰다. 한편 고시생들은 저렴한 가격에 녹두의 식당과 카페를 이용하며 활력을 찾기도 한다. 2016년 초부터 1년 동안 고시촌에서 공인노무사 자격시험을 준비했던 김동유 씨는 “일요일에는 고시식당이 문을 닫기 때문에 (녹두거리에서) 평소 먹고 싶던 음식을 먹고 쉬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녹두의 최대 장점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학업분위기”라며 “물가도 저렴하고 고시를 위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편리하다”고 덧붙였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새로운 문화가 조성된 경우도 있다. 처음 녹두에 고시촌이 형성되던 1980년대 초반, 관악산 사찰에서 공부하던 이들이 고시촌으로 몰려오며 언덕 인근에는 고시촌 ‘윗동네’가 형성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윗동네의 시설은 점점 낙후됐고, 현재는 ‘고시낭인’, ‘신선’으로 불리는 장기 고시생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됐다. 대신 도림천 인근 ‘아랫동네’에 깔끔한 원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며 고시촌의 중심은 아랫동네로 이동했다. 한편 2015년에는 고시생들이 고시촌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9동여지도’가 출시됐다. ‘9동여지도’ 이용자들은 고시 식당의 메뉴를 찍어 올리며 음식을 평가하거나, 주인이 친절한 복사 가게, 카페의 한적한 시간대 등의 정보를 공유한다. 또 고시별 게시판에서 소통하며 삶의 시름을 덜기도 한다.



녹두,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다


  하지만 2007년 사법시험 폐지가 발표되면서, 고시촌 분위기는 점차 옅어지고 있다. 2017년 사법시험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고시촌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떠나갔고, 고시촌은 위기를 맞이했다. 7급 공무원과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유입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 고시촌 상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태성 독서실’의 관리자 최 씨는 “학생 수가 7-8년 전부터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는데, 최근 2-3년 사이에는 고시촌 전체적으로 불황이 심했다”며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사라지고 행정고시 준비생들이 노량진으로 유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그는 “(불황 속에서) 살아남은 대형 학원들도 경찰 공무원 강의를 개설하는 등 (고시촌에) 고등고시 준비생들이 있던 때와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DSC09959.JPG

▲사법시험 폐지 이후 경찰 공무원 학원이 들어선 현재의 고시촌 ⓒ박윤경 기자



  고시촌뿐 아니라 녹두거리 전체의 거주자와 방문자 모두 줄어들고 있다. 서울대 입학생 중 지방 출신이 감소하고, 서울대입구역과 낙성대역 인근이 떠오르면서 녹두에 자취하는 학생은 줄어들었다. SNS를 통해 ‘샤로수길’의 맛집들이 유명해지며 학생들의 생활 중심지도 교통이 편리한 ‘샤로수길’로 옮겨갔다. 평일 저녁에도 왁자지껄했던 녹두거리는 한산해졌다. 김동운 대표는 “9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학생이 줄고 자취생도 감소해서 녹두거리에 오는 학생들의 수가 점진적으로 줄고 있다”며 “학생들의 해방구라는 (녹두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영채(언론 16) 언론/꼼반 학생회장 역시 “학생자치활동 영역으로서 녹두는 많이 몰락하는 것 같다”며 “학생자치가 위축되고 학생들의 참여가 저조하다 보니 그나마 교통이 편리한 서울대입구역에서 신입생환영회나 종강파티를 잡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별과제나 동아리 모임도 녹두에서 하지 않아 저학년들 사이 녹두의 존재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가와 고시촌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상권 역시 위축됐다. ‘녹두부동산’ 사장 조형진 씨는 “고시생들이 감소해 영업이 안 되는 고시원들은 원룸으로 개·보수된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상점이 들어섰다 금세 빠지는 경우가 빈번하고, 권리금도 낮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성 독서실’의 관리자 최 씨 역시 “고시촌의 독서실들이 많이 폐업했고 고시식당들도 힘들어한다”며 “고시 서점이나 학원도 이전, 폐업하는 등 고시촌으로서의 특색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녹두에 거주하는 신영채 씨도 자주 가던 술집이 새로운 식당으로 바뀌어있는 등 녹두가 낯설게 보일 때가 많아 발길이 잘 향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DSC09957.JPG

▲녹두거리의 상권 쇠락으로 인해 상점들이 자주 바뀌곤 한다. ⓒ박윤경 기자



녹두,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한편 고시생과 대학생이 떠나간 자리에 직장인들이 저렴한 물가와 임대료를 찾아 들어오며 대학동의 인적구성도 변화하고 있다. 대학동은 역세권이나 도심 인근보다는 물가가 낮으면서도 직장으로의 이동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4년 강남순환도로가 신림-봉천터널 구간으로 연장되고, 지난 2월 신림 경전철 공사가 착공된 것도 큰 몫을 했다. 직장인들의 유입에 따라 상권과 부동산 업계도 변화하고 있다. 태성 독서실 관리자 최 씨에 따르면 고시촌은 낮에는 학생이 줄어 한산하지만, 밤에는 직장인들이 퇴근해 들어오며 거리가 활기를 띤다.


  상권 쇠락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서울대는 창업 지원 및 녹두상권 활성화를 목표로 ‘서울대 스타트업 캠퍼스 녹두.zip’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녹두.zip’ 사업은 ‘녹두.zip’ 건물을 기점으로 지역사회와 대학교가 협업해 녹두를 대학가 및 창업단지로 탈바꿈시키고자 한다. 서울대는 지난 11월 6일부터 20일까지 ‘녹두.zip’ 건물에 입주할 청년창업가를 모집했다. 이 건물의 2층은 청년창업가들이 창업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1층과 지하 1층은 서울대학교 구성원들과 지역 주민이나 상인이 함께 어울려 녹두거리를 활성화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대학동 지역사회도 녹두의 재도약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날이 오면’은 녹두지역 청년모임인 ‘얼룩말 공작소’와 함께 ‘북토크쇼’ 등 행사를 기획하며 서점 운영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관악구는 서울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되새기고자 마을관광사업 ‘관악, 민주주의의 길을 걷다’를 추진한다. 이는 서울대 정문부터 신림사거리에 이르는 ‘민주화운동 탐방길’을 만드는 사업으로, 지난 11월 故박종철 열사의 옛 하숙집이 있던 골목을 ‘박종철 골목’으로 조성하며 시작됐다. 사업 담당자인 ‘서울대학교 민주동문회’ 회원 이현주 씨는 “도덕소공원에 민주열사들을 모티브로 벽화작업을 하는 등 대학동을 민주열사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변모시키려 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대학동이 예전 같지 않다는 목소리가 많지만, 여전히 대학동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있는 한, 대학동은 살아 숨쉬며 오늘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