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호 > 특집
저기, 사람들이 복작이는 소리 고시촌과 녹두 사람들이 일구는 공동체를 만나보다
등록일 2017.12.05 20:36l최종 업데이트 2017.12.06 20:59l 박고은(rmutt1917@snu.ac.kr)

조회 수:18

  고시원에서 ‘속세’와 단절된 채 공부에 집중하는 고시생들이 이웃과 교류하는 공동체를 일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녹두거리와 고시촌에도 잠시나마 삶을 나누고 함께 쉴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녹두의 ‘복작이는 소리’를 만들고 있는 이들을 만나봤다.



물건도, 이야기도 공유하는 ‘공유창고’


 청년창업공간 ‘녹두.zip’ 건물의 1층과 지하 1층에서는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는 다가오는 12월 ‘고시촌 공유창고(공유창고)’가 들어설 예정이다. 공유창고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학생들이 글로벌사회공헌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고시촌 주민들 간 중고거래를 통해 마을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로젝트의 팀장인 박경선(환경조경학과 석사과정) 씨에 따르면 고시촌 공유창고는 청년창업가 지원사업인 ‘녹두.zip’ 프로젝트와 함께 2년 동안 진행될 계획이다. 공유창고 장소 중 절반은 물물교환을 위한 공간으로, 나머지 절반은 지역주민과 서울대 학생들을 위한 대화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박 씨는 “고시촌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도 다른 곳에 비해 활기가 없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고시생, 지역상인 등 녹두 주민들이 대화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공유창고에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공유창고는 강연이나 세미나가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는 공간도 구상하고 있다. 



1.jpg

▲공유창고의 운영방식을 설명한 다이어그램  ⓒ서울대학교 학생프로젝트팀 공유창고



 공유창고는 녹두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공간을 추구한다. 그 첫걸음으로 지난 9월 14일 공유창고는 첫 주민워크숍을 열었고, 녹두에 거주하는 학생, 고시생, 상인 등 18명이 한 자리에 모여 공유창고 운영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박경선 씨에 따르면 지역 소식을 나눌 수 있는 온라인 창구도 마련할 계획이다. 박 씨는 공유창고를 통해 녹두에 지역공동체가 형성되고, 나아가 고시촌에 활기가 가득 찼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낡은 고시원이 ‘공유형 생활주택’으로


 고시촌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동시에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 바로 사회적 기업 ‘선랩 건축사무소(선랩)’의 ‘셰어어스(Share-us)’ 프로젝트다. 선랩의 김혜진 팀장에 따르면, 셰어어스는 낡고 잘 사용되지 않는 고시원을 수리해 청년들에게 다시 저렴하게 임대하는 사업이다. 이미 녹두에는 많은 셰어하우스가 운영되고 있지만, 셰어어스는 셰어하우스 대신 ‘공유형 생활주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김 팀장은 이를 “셰어하우스가 여러 채 모여 있는 공동주택”이라고 설명한다. 셰어어스는 2014년 서울시 혁신형 사회적기업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15년 1호점을 열었다. 2017년 12월 기준 3호점까지 확대된 상태다.



2.JPG

▲셰어어스 1호점의 공용라운지는 입주민은 물론 지역주민들에게도 열려있다.



 셰어어스는 사람들 간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셰어어스 1호점은 부엌, 라운지, 공부방 등 입주자 공동 공간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또 1층 라운지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셰어어스의 소식을 공유하고 공과금 납부, 소음 처리 등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반상회가 열린다. 모든 입주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입주자와 관리자 역시 활발히 소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외에도 셰어어스는 지자체의 지원금으로 입주자와 지역주민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1호점에서는 1인 가구 청년들의 건강한 식단을 위한 요리교실이 열리고, 전문가와 함께하는 집단 심리상담도 진행된다. 수공예품 만들기 등의 원데이 클래스가 열릴 때도 있다. 김혜진 팀장은 입주자와 녹두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동네 친구’와 같은 ‘헐거운’ 동네 공동체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잊혀져가던 ‘언덕마을 고시촌’의 변화


 녹두 중심가에서 버스를 타고 급경사의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면 대학18길에 자리한 ‘언덕마을 고시촌’이 나온다. 1975년 서울대 캠퍼스가 관악구로 이전하며 처음으로 고시촌이 형성된 곳이다. 그중 ‘태학관’은 이곳에 다섯 번째로 지어진 고시원으로, 1983년부터 자리를 지켜왔다. 1990년대 초, 이우진 씨는 부모님이 태학관을 운영하게 되면서 언덕마을 고시촌으로 이사를 왔다. 이 씨는 태학관을 “사회 유명인사들이 거쳐 갔고, 서울대와 역사를 함께한 유서 깊은 곳”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 씨가 수년간의 외국생활을 하다 한국에 잠시 돌아온 2014년, 상황은 예전 같지 않았다. 언덕마을 고시촌이 중심가로부터 멀리 떨어진데다가 사법고시 폐지로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주변 환경이 급격히 열악해진 것이다. 이 씨는 “치안이나 쓰레기 무단투기 문제가 심각했고, 수십 년간 고시원을 운영하던 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급기야 부모님이 운영하던 태학관까지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이우진 씨는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는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고시원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기 시작했고, 민원을 넣어 치안과 쓰레기 무단투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고시촌에는 주민 협의체가 없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이 씨는 ‘글로벌 고시촌 아트타운 프로젝트’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시작했다. 지역문제는 결국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원주민이 나서야 한다는 판단 하에, 첫 고시촌 주민회의가 열렸다. 더불어 글로벌 고시촌 아트타운 프로젝트는 홍익대 건축과 학생들과 협력해 새로 디자인한 분리수거함을 마을 곳곳에 설치했으며, 예술인들을 초청해 고시원에 벽화도 그렸다. 3년간 서울시에 민원을 넣은 끝에 대학18길 곳곳에는 CCTV도 설치됐다.


 3.jpg

▲글로벌 고시촌 아트타운 프로젝트가 폐자전거를 재활용해 만든 언덕마을 고시촌 지도 ⓒTHG House



 또한 이우진 씨는 고시촌 주민들이 품고 있는 고시촌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이 씨는 “고시원 운영으로 대부분의 일생을 보낸 주민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모여 지역의 귀중한 역사가 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모인 주민들의 이야기는 한 권의 책이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고시촌 관광 프로그램과 지도도 제작됐다. ‘대학동 고시촌 언덕마을투어’는 고시촌 산책길이나 공동우물터 등 고시촌의 이곳저곳을 탐방하며, ‘언덕마을 고시촌 지도’에는 고시촌의 수십 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시촌 주민들은 주체가 돼 지역 문제를 해결하며 스스로 고시촌의 가치를 발견해냈다.


 이우진 씨의 최종 꿈은 언덕마을 고시촌에 전 세계 청년들이 모여 정보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태학관은 IT나 예술분야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 수차례 강연을 열었고, 예술 프로젝트 역시 진행했다. 이 씨는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이 모여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조성 중”이라며, 청년들에게 고시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인생이 180도 변하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람이 모이기에 살아있는 동네


 녹두 근처에 위치한 삼성고등학교의 생활협동조합도 녹두 주민들과의 교류에 힘쓰고 있다. 삼성고 생활협동조합은 학생들의 교육과 복지에 수익을 환원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조합은 학생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2015년 처음 결성됐다. 이은영 이사장은 “지역에 자원이 있으면 학교와 최대한 연결하려고 노력한다”며 생활협동조합과 지역사회 간의 활발한 교류를 강조했다. 이 이사장에 따르면 지역과 연계해 운영하는 학교협동조합은 서울시 내 삼성고가 유일하다.



4.jpg

삼성고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매점 '푸드득'에서 조합원들이 바른 먹거리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고 생활협동조합과 지역의 교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삼성고 매점 ‘푸드득’의 지원을 받아 특수학급 학생들이 천연 비누 등 친환경 상품을 만들면, 지역 상점과 바자회에서 이를 판매한다. 고시촌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광태소극장’ 배우들은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은영 이사장은 “학생들에게 사회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학생들이 주체적인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조합의 목표”라고 말한다. 실제로 삼성고 학생들은 특별활동 수업시간을 통해 사회적 경제와 노동, 인권 문제에 대해 배운다. 이 이사장은 협동조합을 통해 “학생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모두가 이웃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고시촌에서도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어울리고,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오늘도 녹두의 시간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