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 특집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 미혼모, 동성부부, 마을공동체를 만나다
등록일 2018.06.07 12:04l최종 업데이트 2018.06.07 21:09l 박수현 기자(oksh4979@snu.ac.kr), 유지윤 기자(jiyoun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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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간 한국 사회는 생계부양자 남성과 전업주부 여성, 그리고 그 자녀로 이뤄진 가족만을 ‘정상적’인 가족 형태로 여겼다. 그러나 사회가 정한 틀 바깥에서도 다른 가족들처럼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미혼모자, 동성부부,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소개한다.


“아빠랑 살지 않지만, 우리도 하나의 가족이야”

  안소희(31) 씨와 이연지(40) 씨는 각각 9살과 7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미혼모협회 ‘인트리’에서 미혼모와 그 가족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기도 하다. 인트리는 작년 9월 서울 동작구에서 미혼모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경제적 자립과 소통을 돕는 카페를 열었다. 이곳 ‘카페인트리’에서 소희 씨와 지연 씨의 가족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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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미혼모자립카페 '카페인트리'의 내부



“무엇이든 하면서 키워야겠다”

  소희 씨가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임신 5주 차 때였다.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하며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 소희 씨는 출산 결정이 어렵지 않았지만, 당시 22살 동갑이었던 남자친구는 뚜렷한 직업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를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출산도, 육아도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당차게 다짐한 소희 씨였지만 가족과 친구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출산 결정이 가족에게 실망감을 줄 수도 있을뿐더러, 미혼모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을지 염려됐기 때문이었다. 소희 씨는 결국 친동생에게만 임신 사실을 알렸고, 부모님에게는 출산 1주일 전에야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처음에 입양을 권유했지만,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소희 씨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고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한편 연지 씨는 임신한 지 약 7개월이 됐을 때쯤 임신 사실을 알았다. 얼마 뒤 아이 아빠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곧 상대가 재산을 부풀려 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이 아빠는 돈을 갚으러 간다며 사라져 며칠씩 연락하지 않는 행동을 반복했다. 연지 씨가 아이 아빠와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부모님은 입양 혹은 낙태를 권유했다. 그러나 연지 씨는 ‘내 속에서 7개월을 자란 아이인데 내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한부모가정도 많다”며, “혼자 아이를 키우면 나도 돕겠다”던 동생의 말도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는 데 영향이 컸다.

  아이를 혼자 키우기 시작한 소희 씨와 연지 씨에게는 돌봄과 주거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엄마가 혼자 경제생활을 하며 아이를 돌보기란 만만치 않았다. 국공립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려면 오랜 시간 대기해야 한다. 한부모가정 아이는 어린이집 입소 1순위 대상이지만 함께 1순위에 포함된 맞벌이, 차상위계층, 다문화가정 조건에 중복 해당하는 아이에게 순위가 밀리는 경우가 많다. 대기 끝에 입학에 성공하더라도 경제활동을 하는 엄마는 선생님과 아이의 눈치를 봐야한다. 연지 씨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보통 7시까지인데, 일하지 않는 엄마들은 네다섯시면 아이를 데려간다”며, 일이 끝나고 7시에 맞춰가도 선생님에게 늘 미안함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어린이집 대신 지역아동센터에 가더라도 아이 돌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아동센터는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지역사회 아동을 위한 기관이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문을 닫아 휴일에도 일을 하는 엄마들은 아이를 맡길 수 없는 날이 많다. 또 방학 때는 센터 운영시간이 10시 반부터로 늦춰져 9시 반까지 출근하는 소희 씨 같은 엄마들은 한 시간 동안 아이를 혼자 둬야 한다. 그래도 소희 씨는 인트리 사무실에서 일하기에 대표님의 배려를 받아 조금 늦게 출근할 수 있다. 하지만 미혼모에 대한 배려가 적은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아이를 돌보느라 일을 포기하는 엄마들도 있다. 소희 씨는 과거 입사 면접에서부터 “아이를 맡길 곳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며 미혼모가 처한 현실을 토로했다.

  주거 문제도 미혼모에게 부담이 된다. 출산과 양육의 과정에서 가족과 단절되거나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의 주거실태조사(2016)에 따르면 한부모가정은 전국 평균에 비해 자가(自家) 비율이 낮지만, 정부 지원은 미혼모시설입소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러나 시설에서의 생활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많다. 시세보다 저렴하게 집을 빌려주는 공공임대주택 제도도 있지만, 주택 수는 절대적으로 적은데 다른 1순위 경쟁자는 많아 문제다. 결국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주거를 이동해 다니는 경우가 많다. 소희 씨 역시 아이가 네 살 때 돈을 벌기 위해 부모님 집을 나온 후 집을 많이 옮겨 다녔다. 동생네 집에도 잠시 얹혀살았지만 미혼모시설에서 5년을 지내며 전보다 안정이 됐다. 연지 씨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권유하는 부모님을 피해 잠시 시설에 거주했다. 지금은 작년부터 한부모가정이 된 동생네 가족과 한집에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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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 씨(왼쪽)는 9살 아들을, 연지 씨(오른쪽)는 7살 딸을 키우는 엄마다.



차별적 제도와 시선을 넘어

  살 곳 찾기는 어려웠고, 돌봄은 지금도 쉽지 않지만 아이를 낳아 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많다. 연지 씨는 7살 딸의 말에 종종 감동을 받는다. 며칠 전에는 벌써부터 자신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하는 딸의 말을 듣다가 “넌 잘 키울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어져 온 “엄마는 나 잘 키우잖아”라는 딸의 대답에 작은 한 마디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조금씩 저축을 시작한 아이가 “이 돈으로 엄마 먹고 싶은 거 사줄게”라고 말할 때는 “진짜? 엄마가 다 써도 돼?”하며 장난스레 묻기도 한다. 초등학교 2학년인 소희 씨의 아들은 잠들기 전 “엄마밖에 없다”며, “엄마와 결혼할 거야”라고 자주 말한다. “나는 별로인데?”라고 아들에게 말하는 소희 씨지만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래도 잘 키우고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이유로 인트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연지 씨는 아이에게 아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인트리를 찾아왔다. 연지 씨 부모님은 아빠가 사망하거나 외국에 나갔다고 말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연지 씨는 시간이 지나 사실을 알게 될 아이가받을 상처가 싫었다. 엄마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네가 더 커서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던 적도 있다. 연지 씨는 아직도 고민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 한편 소희 씨는 미혼모 친구를 통해 여성학 강의를 들으러 인트리에 처음 방문했다. 그때 대표님과 연이 닿아 이곳에서 함께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국가의 미혼모 지원시스템에 대해 지적하는 문제는 같다. 두 사람은 한부모 자녀양육지원금 제도가 한부모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짚었다. 현재 '한부모가족지원법'에서 아동양육비 13만 원을 지원받으려면 월급이 중위소득 52%인 148만 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올해 최저시급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약 157만 원이다. 양육비를 지원받으려면 최저월급조차 받지 않고 일해야 하는 셈이다. 연지 씨는 이를 두고 “어느 정도의 소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육비 지원자격을 유지해줘야 한다”며 “현재의 시스템은 엄마들이 자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소희 씨와 연지 씨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 사회에도 한부모가정이 있고, 이들도 부족함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두 사람 모두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타면 아이에게 “아빠는 어디 갔니?”라고 묻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연지 씨는 주민센터에서 자신의 이름 밑에 아이를 등록하려다 “아이 아빠는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 아빠 없는데요?”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아이 아빠가 왜 없어요?”였다. 이제는 회사에서도 혼자 아이를 키운다고 먼저 말할 정도로 담대해진 연지 씨지만, 당시 사건은 아직까지 상처로 남아있다. 또 연지 씨는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직장인 미혼모는 늘 더 높은 직급의 남성과 만나 ‘해피엔딩’을 맺는다며 이는 미혼모의 자립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소희 씨도 “엄마와 아빠가 같이 키워야 아이가 건강하다”는 사고방식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소희 씨와 연지 씨가 미혼모 인권과 제도 개선을 위해 힘쓰는 것은 아이를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인식 개선을 주장하는 인트리에서 일하는 자신도 때론 당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며,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 시선에 아이가 받을 상처를 걱정했다. 두 사람은 “아빠랑 살지 않지만 우리도 하나의 가족이야”라는 자신들의 말이 사회에서도 자연스레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국내 1호 '법적' 레즈비언 부부가 되는 날까지

  원흥역 근처 카페에서 레즈비언 부부 노유다(36) 씨와 나낮잠(40) 씨를 만났다. 11년 차 부부인 두 사람은 현재 독립출판사 '움직씨'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출판사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이들은 첫 만남부터 결혼생활까지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혼의 단짝이 만나 결혼하기까지

  두 사람은 2007년 여성 퀴어 사진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함께 출사를 갔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대화를 나누며 문예창작과 출신, 문화 예술에의 관심 등 접점을 발견했다. 유다 씨는 그날 오후 아르바이트까지 미루고 낮잠 씨를 만나러 갔다. 둘의 첫 만남은 이렇듯 끊이지 않던 대화로부터 시작했다.

  만난 지 6개월이 지나 유다 씨는 낮잠 씨에게 청혼했다. 유다 씨가 건강상의 이유로 구미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게 돼 장거리 연애를 하던 때였다. 유다 씨는 낮잠 씨와 주로 편지와 문자를 통해 소통했고 낮잠 씨가 구미로 내려오기도 했다. 유다 씨는 “이전에 연애를 3년, 5년간 할 만큼 신중한 성격이었는데도 낮잠과 운명이라고 확신했다”며 만난 지 오래지 않은 때 청혼한 이유를 밝혔다. 낮잠 씨는 유다 씨의 청혼에 ‘건강해져서 서울에 오면 다시 얘기하자’는 단서를 달았다. 그렇게 유다 씨가 청혼한 2008년 2월 27일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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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씨와 낮잠 씨는 비슷한 가치관과 관심사를 바탕으로 11년째 함께 하고 있다. 

ⓒ낮잠 유다 부부 제공



  결혼식은 따로 치르지 않았다. 각자의 부모님께 서로를 ‘부부로 함께 살아갈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상견례를 갈음했다. 하지만 결혼 결심을 가족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부부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유다 씨의 부모님은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두 오빠로부터 겪은 친족 성폭력 피해 사실을 유다 씨가 공론화하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별개의 두 사안을 동일 선상에 두고 협상하는 듯한 태도에 동의할 수 없었던 유다 씨는 그러한 제안을 거절했다.

  낮잠 씨 가족의 경우 나이 차가 많이 나 엄마나 다름없던 언니의 반대가 심했다. 언니는 기독교 교리를 근거로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낮잠 씨의 언니는 두 사람을 보지 않기로 했고 현재까지도 부부는 그와의 소통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큰언니는 유다 낮잠 씨 부부의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다. 그에게 낮잠 씨는 여전히 소중한 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사람의 주거비용에 보탬이 되고자 목돈을 빌려줬고 명절마다 유다 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일부러 챙겨놓기도 한다.


언어적 한계를 넘어 ‘부부’로 살기

  요양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유다 씨는 몇 개월 후 낮잠 씨와 함께 아현동 옥탑방에 둥지를 틀었다. 두 사람 모두 옥탑방에서 보이는 서울 시내와 방에 들어오는 햇볕을 좋아했다. 동성부부를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연애와 동거, 결혼의 경계가 뚜렷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함께 살림을 꾸리는 경제 공동체가 되면서부터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을 부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다 씨는 “국립국어원은 부부를 남성과 여성으로 이뤄진 관계라고 규정하지만, 언어적 차원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부부 개념에 대한 통상적 이해는 이들의 부부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 주변인들이 결혼한 부부를 이성애 부부로만 국한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 두 사람은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들도 부부임을 강조한다.

  유다 낮잠 씨 부부는 시종 결혼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내비쳤다. 유다 씨는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빼곤 항상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유다 씨는 낮잠 씨와의 결혼이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유다 씨 가족은 ‘미투(me too)’ 운동이 한창인 때 유다 씨가 친족 성폭력을 문제 삼을까 두려워 장례식 일정조차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낮잠 씨가 곁을 지켜줘 발인 직전 영정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와 복잡한 심경을 공유하며 아버지와 이별할 수 있었다. 낮잠 씨는 함께 소소한 일상을 나눌 동반자가 있다는 점을 결혼의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결혼 초에는 영화 관람이나 음악 감상을 함께 했지만 출판사를 운영하는 요즘에는 함께 산책하기, 책방 여행하기가 이들의 취미다.

  결혼생활이 늘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결혼한 지 11년이 흘렀음에도 가사분담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의 큰 숙제다. 유다 씨가 일하는 데 시간을 쏟느라 가사노동에 충분히 관여하지 않는 것이 낮잠 씨의 고민이다. 보통은 낮잠 씨가 요리와 가계 관리를, 유다 씨가 빨래, 청소와 쓰레기 처리 등을 맡는다. 그러나 세 끼 식사 준비의 비중이 워낙 크다보니 가사노동 비율을 따지자면 낮잠 씨가 70%, 유다 씨가 30% 정도를 분담한다. 지금도 평등한 분담을 위한 조정은 계속되고 있다.

  둘은 관심 사안을 두고 밤늦게까지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페미니스트이자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문학 비평이 주된 토론 거리다. 가령 소설가 김승옥의 글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를 두고 새벽 네 시까지 논쟁하는 식이다. 갈등이 발생할 때 이들의 대처법은 ‘5분 휴식’과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기’다. 다툼 도중 5분간 떨어져 시간을 갖다보면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먼저 방문을 두드린다.


가족으로 등록되지 않은 가족 

  노유다, 나낮잠 씨 부부는 의료서비스, 재산 상속 등 여러 측면에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한국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탓에 사실혼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은 법적으로 남남이기 때문이다. 만약 둘 중 누군가 돌연 사고를 당하더라도 서로의 수술 동의서를 작성할 수 없다. 또 재산 상속 과정에서도 순탄치 않은 과정이 예상된다. 원칙적으로 유언을 남기면 제3자에게도 재산 상속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정 상속인을 위해 법률상 유보된 상속재산의 일부인 유류분 청구 소송을 직계 가족이 제기하면 정해진 비율만큼 재산을 넘겨줘야 한다. 그에 따라 유다 씨에게는 가해 공동체나 다름없는 친족에게 인세, 저작권 등 재산의 일부를 넘겨줘야 하고, 그러한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을 수반하는 법적 분쟁이 필요하다.

  동성부부는 복지 서비스에서도 쉽사리 소외된다. 한국사회는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지속적으로 증세했지만, 막상 그 혜택은 남성 가장을 중심으로 한 정상가족에게 집중된다. 가령 배우자의 연간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일 때 받을 수 있는 기본 공제를 두 사람은 받을 기회조차 없다. 실질적으로 부부나 다름없지만 법적 부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금융권 대출도 쉽지 않다. 두 명의 ‘비혼’ 여성은 남성 가장을 중심으로 한 ‘정상가족’과 비교했을 때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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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부는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며 바닷가 결혼식을 생각해보게 됐다. 

ⓒ낮잠 유다 부부 제공



  최근 두 사람은 둘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사람들과 바닷가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졌다. 함께 제주도 출장을 갔다가 10년 전 낮잠 씨가 바닷가 결혼식에 대해 쓴 일기가 떠올랐고 이를 실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낮잠 씨는 “자칫 겉치레일 수 있는 결혼식보다 혼인신고 서류 작성을 더 원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한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는 날을 기다린다.

  유다 씨와 낮잠 씨는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이 부부이고 가족”이라고 힘줘 말했다. 전통적인 가족 구성과 다르더라도 마음 맞는 둘 이상의 존재가 만나 함께 꾸린 집합이 바로 가족이라는 생각이다. 유다 씨는 “우리를 굳이 정형화된 상을 가리키는 가족이라는 단어로 규정해야하나 싶기도 했지만 사회가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가족 개념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서로를 만나기 이전까지 오래 방황했다는 유다 씨와 낮잠 씨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온전해졌다. 사랑과 연대로 연결된 두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는 부부,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바 그 이상이다.


깊은 관계로 꾸려나가는 마을살이
  
  서로를 지켜주는 ‘가족 같은’ 관계가 혈연 가족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파편화돼가는 오늘날 사회에서 혼자 사는 삶보다 함께 살기를 택한 이들이 있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아이든 어른이든 서로를 지켜주는 공동체 ‘밝은누리’의 구성원들이다. 밝은누리는 서울 인수마을, 강원 홍천마을과 군포 대야미마을 세 곳에 생명과 평화라는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여 꾸린 공동체다. 이들은 마을밥상, 공동육아 어린이집, 생태 건축 등으로 마을을 일구고 있다. 서울 강북구 인수동에 위치한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인수마을 구성원인 명연(34), 선아(40), 신영(28) 씨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하는 것이 습관인 마을

  명연 씨는 친구들 세 명과 함께 사는 7년 차 직장인이다. 주말에는 홍천마을에 있는 고등·대학통합과정 삼일학림에서 철학과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근처 원룸에 혼자 살며 직장생활을 했다. 혼자 사는 것은 편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지는 불분명했다. 매번 배달음식을 먹고, 주말에는 한없이 게을러지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삶이 돈이나 먹을 것에 ‘끌려다닌다’고 느꼈다. 누군가 옆에서 나를 지켜준다면 중심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아 씨는 작년 2월 마주이야기를 연 찻집지기다. ‘밭’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성 공동체 방에서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지낸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살기 위해 밝은누리에 왔다. 남들과의 비교로 인한 불안이 삶을 흔들 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거나 교육 등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찾아 나선 결과기도 하다.

  신영 씨는 4년 차 회사원이다. ‘해가 잘 든다,’ ‘해처럼 든든하다’는 뜻의 ‘해든’ 방에서 세 명의 밝은누리 구성원과 살고 있다. 대학생이던 신영 씨에게 졸업과 취업은 또 한번 성인이 되는 관문처럼 다가왔다. 그런 어려운 관문 앞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게 더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선배를 통해 알게 된 마을공동체 생활은 그의 고민에 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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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누리 구성원인 선아, 신영, 명원 씨(왼쪽부터)



  밝은누리 구성원들이 마을공동체를 찾아온 이유는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모두 ‘공동체’라는 가치를 향하고 있다.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지만, 결국은 삶을 공유하겠다는 뚜렷한 지향점이 있는 것이다. 이곳 인수마을에서는 35명 정도의 비혼 구성원들이 주로 모여 서너 명, 혹은 한두 명씩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방세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공간을 공유하는 ‘셰어하우스’ 등이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밝은누리의 동거는 주거비 공유 차원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방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서로 관심을 나누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방마다 정하기 나름이지만 신영 씨의 경우 구성원 세 명이 각자 방을 쓰기보다, 자는 방, 옷 방, 짐을 두는 방으로 나눠 공동 생활구역을 늘렸다. 신영 씨는 “가족들도 요즘 대화를 잘 안한다는데, 여기서는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일상에서 많이 마주치는 구조가 그 배경이 된다고 설명했다.

  삶을 공유하는 일은 한 집안에서뿐 아니라 밝은누리 마을공동체에서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수마을에는 ‘마을밥상’이라고 부르는 식당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하는 품앗이 전통이 마을밥상 설립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식사뿐 아니라 육아와 교육도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마을 구성원들 간 아이를 맡아주던 육아품앗이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탄생시켰다.


함께 꿈을 이루며 나를 지켜주는 가족

  세 사람에게 비혼은 하나의 중립적 상태다. 결혼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독신주의와 구분되며 결혼에 ‘아직’ 이르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미혼과도 함의가 다르다. 미혼과 달리 비혼은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통념이 배제돼있다. 선아 씨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완의, 혹은 미숙한 상태로 남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 사람은 다른 비혼 친구들과 한집에 살고 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다. 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이들도 마을에서 계속 생활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세 사람에게 결혼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이후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밝은누리에서 친구들과 살다보면 혼인으로 가족을 꾸리는 게 지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 사람은 “이미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꼭 결혼이란 제도를 거쳐야 할까”라는 선아 씨의 말에 공감했다. 명연 씨는 결혼에 의해서도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중요한 건 결혼을 하냐, 안 하냐가 아닌 왜 결혼을 하냐, 그리고 어떤 삶을 사느냐”라고 덧붙였다. 결혼 적령기인 그가 “누구 없냐”는 질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 이유다.

  이들에게 밝은누리는 삶의 든든한 기반이다. 신영 씨는 감정 기복이 심하던 이십 대 초반 무렵 한 번 우울에 빠지면 쉬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우울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밝은누리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우울감을 느낄 때마다 함께 거주하는 언니들과 대화하며 금방 회복할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신영 씨는 밝은누리에 오길 잘했다고 느낀다. 언니들은 신영 씨의 얘기를 천천히 듣고 “너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일이 아니야”라며 신영 씨를 다잡아줬다. 함께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받을 때마다 그는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곳에 왔구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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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인수동에 위치한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의 간판



  선아 씨는 밝은누리에 살며 자신이 소망하던 삶에 다가가고 있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꿈꾸던 그는 소비와 자본에 길들여졌던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꼈다. 밝은누리에서의 생활은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히는 과정이었다. 이곳에서 농도상생과 같은 자신의 이상을 함께 실천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 친구들을 고마운 동반자로 느끼곤 한다. 선아 씨가 순 식물성 재료만 사용하는 마을찻집을 연 것도 그의 이상을 실현한 결과다. 친구들의 자극과 응원 덕분에 찻집을 차리기로 결심할 수 있었고, 찻집 설립도 혼자가 아닌 구성원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연 씨는 일상 속에서 친구들이 해주는 따끔한 충고와 지지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다. 하지만 관계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게 될 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연 씨는 “그만큼 깊은 관계를 맺은 이들과 삶을 꾸려나간다는 건 과분할 정도로 많은 걸 누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화된 사회에서 마을공동체 생활은 독특하게 느껴지고, 일면 불편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세 사람은 인수마을에서 “쭉 이대로 살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선아 씨는 “밝은누리에서의 삶은 ‘한몸살이’가 공동체의 순우리말임을 진정 느끼게 해줬다”고 말했다. 신영 씨에게 마을공동체는 “원래 사람들이 살던 자연스러운 모습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과거에 자주 쓰이곤 했던 ‘이웃사촌’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대로 피는 안 섞였어도 밝은누리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연 씨에게 밝은누리의 친구들은 “진정한 가족이자 식구”다. 

 
  ‘정상가족’은 이제 더 이상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족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집을 사랑으로 또 연대로 채우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게 바로 가족이 아닐까.


다시 가족을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