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호 > 특집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에너지빈곤층의 발단-위기-절정-결말을 살펴보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이지윤 기자 (liy44@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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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예고지. 3개월이상 체납되면 단전 대상 가구가 된다.


에너지기본법에 이은 새로운 개념 하나를 소개해본다. ‘에너지빈곤층’에 대해 들어는 보셨는지. 에너지빈곤층이란 전체 가계수입의 10% 이상을 광열비와 난방에 지출하는 계층을 말한다. 이들을 위해 정부에서는 2007년 에너지복지원년 선포와 함께 에너지재단을 설립하고 가열차게 각종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들이 노력에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기는 어렵기만 하다.

은 가상인물 윤정호(70) 씨를 통해 에너지빈곤층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찾아봤다. 윤 씨는 에너지빈곤층이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기름보일러를 쓰고 있고, 단전률이 가장 높은 계층인 차상위계층에 속한다.(서울시의회 이수정 의원 자료)

발단 : 비싼 등유 쓰는 빈곤층, 연탄이 차라리 부럽다

현재 서울시 근교 쪽방촌에 살고 있는 윤정호 씨의 집에는 기름보일러가 설치돼 있다. 싼 도시가스나 연탄을 쓰면 좋겠지만 월세방 형편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돈도 없는데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기름값이 너무 부담된다.

역설적인 것은 에너지빈곤층의 대다수가 난방을 위해 싼 에너지원인 연탄이나 도시가스가 아닌 가장 값비싼 등유를 사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차상위계층의 경우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가정(54%)보다 가스보일러를 사용하는 가정(24.1%)의 비율이 2배 이상 높다. 도시가스 보급률이 64%임을 고려할 때, 싼 에너지가 빈곤계층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문제는 빈곤주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재개발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판자촌이나 비닐하우스촌 같은 달동네가 사라지고, 갈 곳 없는 빈민들은 도심 속 쪽방촌이나 고시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새로운 주거공간에서는 달동네에서 주로 이용하던 연탄난방방식이 아닌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를 이용하기 위해 등유나 가스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등유는 너무 비싼 연료다. 2008년 기준으로 등유의 1일 난방비용은 연탄의 9배가 넘는다. 이는 ‘무엇으로 방을 데우나’가 에너지빈곤층의 양산에 큰 영향을 줌을 알 수 있다. 빈곤층은 상대적으로 연료지출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빈곤층에게 연탄보일러는 오히려 특권이 될 수 있다.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은 기름값이 너무 비싸 보일러를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때문에 전기장판이나 전기판넬만으로 겨울을 버티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이들을 ‘전기장판계층’이라 이름붙인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의 생필품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전기장판이다. 하위 10%의 극빈층이 전기장판계층에 속하는데, 에너지기본권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계층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 그녀는 에너지빈곤의 문제는 주거빈곤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료문제는 정부의 지원사업에서 가장 곪은 상처를 드러낸다. 통계를 보나 현실을 보나 등유를 사용하는 빈민들이 확연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에너지보조금을 월 2만원씩 지원하는 것 이외의 연료별 지원사업은 연탄쿠폰제뿐이다. 연탄쿠폰제는 올해 들어 50%나 오른 연탄 값의 완충을 위한 일종의 바우처제도다. 정부는 연탄 값을 올린 이유를 빈곤층 가운데 연탄사용자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등유 소비자에게 큰 혜택이 돌아오지도 않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의문이 남는다.
최근 집수리 사업에도 활발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주택의 단열효율을 높여 방열비용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사업 역시 악용될 여지가 있다. 단열사업이나 가스보일러로의 교체 등으로 주거환경이 좋아지더라도, 집주인에게만 이득일 뿐 세입자는 더 비싼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도시연구소 김윤이 연구원은 “(집수리 사업이) 세입자에게 혜택을 주기보다는 주거비 상승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며 민간단체 지원의 경우 집수리 전 집주인과 미리 약정을 해 임대료를 올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위기 : 일상을 앗아가는 소전류제한기

높은 기름값에 치인 채 버텨오던 윤 씨가 전기요금을 3개월째 체납하자 단전원이 왔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윤 씨의 집을 방문한 단전원은 소전류제한기를 설치해주며 돈을 내면 다시 전기를 이어주겠다고 말한다. 소전류제한기를 달고 몇시간 째, 이게 이렇게 사람을 옥죄게 만드는지 미처 몰랐다.

한국전력 수금팀 배정주 과장.

한국전력공사(한전)와 당시 산업자원부는 2005년 여중생 화재사건을 겪은 후 혹한기와 혹서기간동안의 단전유예를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단전상태에서 촛불로 생활하는 이들의 화재를 막기 위해 ‘소전류제한기(제한기)’라는 장치를 도입했다. “한전은 제한기를 설치해 최소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한다”고 말하는 수금팀 배정주 과장은 내심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단전된 가정은 제한기를 통해 극소량(220W)의 전기를 공급받게 된다. 이 장치는 프랑스의 에너지복지사업을 벤치마킹한 것이지만, 프랑스 정부가 설정한 최저 전력량인 3kW와의 간극은 크다. 만일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의 최저생계비 산정 시 포함된 전체 가전제품을 모두 동시에 사용한다면 순간적으로 5219W의 전기가 소모된다. 이는 한전이 설정한 최소 생활에 필요한 전력량 220W를 훨씬 초과하는 수치다. 220W로는 형광등 2개, 텔레비전 1대, 냉장고 1대 정도를 매 시간 켤 수 있지만 그 상태에서 밥솥에 취사버튼만 눌러도 즉시 전기가 끊기게 된다. 가구 수와 가족의 특성 또한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가정이든 220W만큼만의 ‘생명수’를 공급받는 셈이다. 이마저도 가정용 전력사용자에게만 제공되는 장치라 가건물이나 상가, 판자촌 등에 살고 있는 빈민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류 소장은 소전류제한기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화장실 불만 켜면 전기가 끊기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라며 “일상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판을 가했다.
실제 소전류제한기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전류가 끊기고 나면 단전상태를 방치하곤 한다. 2006년 부산의 한 단전가정에서 9살짜리 어린이가 촛불을 켰다가 화재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이 가구 역시 소전류제한기가 부착돼 있었다. 2005년의 악몽을 막기 위한 조치가 다시 화를 부른 참극이었다. 이렇듯 일상 행위를 방해하는 이 작은 장치는 오히려 단전가정 구성원에게 인권 향상보다는 박탈감을 안겨준다. 실제로 2005년 단전에 의해 소전류제한기를 부착한 경험이 있는 전국 256가구 중 163가구가 일주일 이내에 요금을 납부해 제한기를 철거했다.(한국빈곤문제연구소 자료) 도입 시부터 소전류제한기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닌 체납요금을 받기 위한 재촉 수단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절정 : 복지의 그물망에서 한참 벗어난 에너지빈곤층
현재 정부와 공기업에서 추진하고 있는 에너지복지 정책들. 주로 국민기초생활대상자를 위주로한 정책이 많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다. 꽤나 힘들다. 소전류제한기는 여전히 말썽이고, 돈은 없고…. 언젠가 본 보건복지가족부에서 ‘긴급구조지원’을 실시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어 복지부에 가서 이를 신청했지만, 기준이 충족되지 않는다며 탈락했다. 윤 씨는 ‘나 역시 지원대상이 아니면 누가 될 것인가’라며 분노의 주먹을 쥐었다.

한전 배정주 과장은 “한전의 수입원은 대부분이 전기요금”라며 전기요금을 안 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단전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전은 수익을 내는 기업이라 수금이 확실해야 하지만 생계적 측면에서 요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공성 확보차원에서 지원을 해야만 한다. 때문에 한전은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 한해 요금할인을 제공해 가난한 자에게 싼 전기를 보급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이런 지원을 받아야할 이들은 복지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있다.
올해 연탄은행에서는 지식경제부, 한국광해관리공단과 함께 연탄쿠폰제도를 구상해 지자체에서 지원대상 명단을 받아 직접 지원활동을 했다. 인천연탄은행 정성훈 대표가 동사무소에서 받은 인천 남구 숭의동 11통의 지원대상 가구 목록에는 3가구가 지원대상으로 적혀있었다. 실제 인천연탄은행 측에서 직접 현장에 나가 조사한 바로는 8가구가 연탄지원 없이 겨울을 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정 대표는 “동사무소마다 1~2명 있는 복지과 직원으로는 현실적으로 숨어있는 어려운 분들을 찾기 힘들다. 특히 차상위계층의 경우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보다 더 힘든 경우도 많다”며 실태조사의 필요성을 운운했다.
단전가구에 대한 조사현황을 관악구청과 몇몇 관악구 내 동사무소에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우리 동에는 단전가구가 없다’, ‘수급자중에는 없다’, ‘한전에 문의하라’ 등이었고, 구체적인 답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너지재단에서 실시하는 에너지 복지사업들은 지자체의 신청을 받아 이뤄진다. 부실한 실태조사에 대해 의문을 던지자 에너지재단의 장성호 사회사업부장은 “그래도 지자체 복지 담당자들이 복지 분야에서 가장 전문가”라고 밝혔다. 하지만 생계곤란으로 전력 사용이나 난방에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을 전담해 발굴해낼 전문가는 부족한 현실이다. 류 소장 또한 “공무원 한 명이 온갖 일을 다 해야 하는데, 이제는 복지 전문 공무원을 늘려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개인이 신청하는 경우에도 기준에 미달돼 필요한 지원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2006년 단전·단수·단가스를 겪은 차상위계층 중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의 전향 지원이나 기타 지원사업 대상가구에 속한 경우는 전체의 7.1%에 불과했다. 보건복지가족부 긴급구조지원제도 관계자는 “단전이나 가스가 중단된 경우만으로는 ‘긴급구조지원제도’의 지원대상에 포함시키기 힘들다”고 밝혔다. 결국 비수급 저소득층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 주로 독거노인 중 자식이 있는 경우 자식의 부양도, 정부의 지원도 못 받는 낙동강 오리알의 신세가 된다. 이들이 ‘전기장판계층’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