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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대학노조 서울대지부 지부장을 만나다 노동조합과 함께한 19년의 굴곡
등록일 2017.03.11 00:19l최종 업데이트 2017.03.30 12:46l 신일식 기자(sis62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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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에는 서로 다른 업무와 직 책을 가진 이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사무직만 하더라도 법인직, 무기계약직, 비학생조교 등 다양한 직군이 있다. 이 외에도 청소·경비 노동자, 기계·전기 노동자, 조리사, 카페 노동자 등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직군의 노 동자들이 캠퍼스를 지탱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들의 삶을 대변하는 노동조합도 여럿이다. 법인직 중심의 서울대학교 노동조합(서울대노조), 기계·전기 분회, 청소·경비 분회, 시설관리노동조합 등의 노조가 있다. 이처럼 서울대학교에는 한 대학으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여러 노조가 있다. 

  그중에서도 민주노총 대학노조 서울 대지부는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다. 한 노동조합에 법인직, 무기계약직, 비학생 조교 등이 함께 소속돼있고 올해는 사무직이 아닌 생활협동조합 노동자까지 받아들였다. 거의 매해 새로운 성과를 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법인화 당 시 기성회직들이 좀 더 나은 조건으로 법인직으로 편입되도록 했고, 작년에는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던 비학생조교의 고용 안정을 보장받기도 했다. 그 결과 2017년 2월 대학노조 서울대지부는 조 합원만 360명인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이는 대학노조 소속 지부 중에서도 최대 규모다. 하지만 대학노조 서울대지부가 지금과 같은 모습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직원 사회 내부의 갈등과 대학 본부로부터의 압박을 견뎌 내며 대학노조 서울대지부를 이끌어온 홍성민 지부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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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대학노조 서울대지부 지부장



우연 혹은 필연, 노동조합에 가입하다 

  홍성민 지부장은 81년 기성회직 전화 교환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담당 주임의 눈에 들어 타자를 배웠고, 사무원 보조 직무로 자리를 옮겼다. 법인화 이전 서울대학교 사무직은 크게 공무원과 기성회직으로 나뉘었다. 국립대 당시 사무업무는 교육부 소속 공무원들이 전담해야 하지만 그 수가 크게 부족했고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은 별도의 재원을 마련해 기성회직을 고용했다. 기성회직 역시 학내 구성원이고 일부 기성회직은 공 무원과 유사한 업무를 함에도 당시 이들에 대한 유무형의 차별은 심했다. 기성회직의 임금은 공무원 임금의 70%가 안 됐고 이들은 여러 잡다한 일을 책임져야 했다. 홍 지부장은 “‘청소는 기성회직이 해야지 우리가 하냐’고 말하는 공무원이 있었을 정도”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기성회직은 88년 자신들을 대변할 기성회직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듬해 노동조합 관계자는 당시 노동조합에 대 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홍성민 지부장에게 가입을 권유했고, 홍 지부장은 엉겁결에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 간부 에 대한 불이익이 심했던 시기라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간부직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조합에 가입한 홍 지부장은 “이름은 올려달라”라는 부탁에 법규부장을 맡게 됐다. 그는 임명되고 나서야 노조에서 구입해준 근로기준법과 노조법 책을 가지고 처음으로 노동법을 배웠다. 홍 지부장의 우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세균 명예교수(정치학과)의 형이자 노조 운동에 관심이 많던 故김진균 명예교수(사회학과)는 처음 홍 지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홍 지부장은 “지금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전에 밥 한 번 먹은 적 없는 사이였는데”라며 기묘한 인연을 소개했다. 그렇게 가입한지 몇 달되지 않아 홍 지부장은 기성회직 노조를 책임지게 됐다.
 
  95년 기성회직 노조는 123일(*)에 이르는 파업에 나섰다.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홍성민 지부장은 주변에 적극적으로 노조 가입을 권고했고, 80명밖에 되지 않던 조합원이 파업 당시 280명이 넘게 늘어났다. 당시 기성회직 노조의 상급단위였던 한국 노총이 “조직 방침 상 연대 투쟁을 지원 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민주노총 소속 으로 조직 변경을 결의하기도 했다. 파업이 시작되자 학교는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과 회유를 시도했다. 기성회직은 공개 채용 방식보다 지인의 권유로 입사한 경우가 많았다. 학교 관계자들은 입사를 소개한 지인들을 찾아다녔고, 지인으로 하여금 조합 탈퇴를 종용했다. 파업이 끝날 무렵 280명이 넘던 조합원들은 겨우 33명이 남았다. 홍 지부장은 “나를 추천했던 주임이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느냐. 이제 (파업을) 그만두라’며 연락 오기도 했다”라며 자신에게도 회유 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노조원들이 줄어갔지만, 그는 7개 대학 연합 ‘대각선 교섭’ 을 하며 버텼다. 공동 교섭단을 꾸려서 울대학교 노동자들이 제주대와도 교섭하고, 대신 다른 대학 노동자들이 서울대 교섭도 함께 하는 방식이었다. 홍 지부장은 “세 살, 다섯살짜리 아이를 업고 걸리고내 돈으로 제주도 비행기에 탔다”라며 당시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제주대에 도착해 서는 안면이 있는 공무원에게 아이를 맡겨 놓고 교섭에 매진했다. 오랜 싸움 끝 에 기성회직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기성회직 임금은 공무원 기본급의 96% 수준까지 올라갔다.
 
  홍성민 지부장이 교섭을 끝까지 마무리하진 못했다. 95년 말 본부와의 교섭 타결 직전 홍 지부장은 지부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긴 투쟁 기간 동안 노조 내에 홍 지부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늘었고, 그 역시 지쳤기 때문이다. 98년 공대 한민구 명예교수(전기공학부·당시 공대 부학장) 비서실에서 일하던 그는 셋째 아이를 가졌다. 그는 “노조 활동을 잊으려고 일부러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출산 중 홍 지 부장에게 의료사고가 찾아왔고, 비서실 일조차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홍 지부장은 일을 그만두려 했지만 한 교수는 “그 런(몸이 상한) 일로 그만둬선 안 된다”라며 홍 지부장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 교수는 몇 달간 직접 다과를 챙기고, 개인 비서를 따로 고용해 몸이 불편한 홍 지부장이 사직하지 않도록 도왔다. 하지만 홍 지부장이 노조 업무 전면에 나서기는 어려웠고, 수 년 간 그는 직원 업무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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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관 5층에는 대학노조 서울대지부 사무실이 있다. 


법인화 이후, 다시 노동조합 

  홍성민 지부장이 지부장으로 복귀한 것은 2012년이었다. 기성회직에 대한 수당 지급 여부, 법인화 후 기성회직 처우 문제 등으로 기성회직의 불만이 다시 커졌을 때였다. 2011년 홍 지부장을 기 억하는 이들은 다시 그를 찾아왔고, 특별위원장 형식으로 노조에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듬해 홍 지부장은 다시 정식 지부장에 당선됐다. 

  지부장 취임 직후 홍성민 지부장 앞에는 여러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첫 과제는 기성회직의 퇴직금 문제였다. 학교는 퇴직금을 기본급뿐만 아니라 각종 수당과 정기 상여금 등을 기초로 산 정해야함에도, 기성회직들에게 기본급만을 기준으로 퇴직금을 지급했다. 홍 지부장은 수차례 학교에 시정을 요구했 지만 실무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법적 절차까지 가야만 했다. 소송 결과 기성회직은 학교로부터 10억 원에 달하는 추가 퇴직금을 받아 냈다. 

  법인화 이후 기성회직의 대우 문제도 논란이었다. 대학 본부는 기존에 공무원과 기성회직을 법인직으로 통합하면서, 기성회직에게 낮은 급수와 승진의 제약을 강요했다. 기성회직 노동자들은 사실상 업무에 차이가 없다며 불합리하게 직급을 구분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홍성 민 지부장은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75여 일(*)을 본부 앞에서 농성으로 보냈다. 그 결과 승진과 직급에 일부 차등은 있었지만 상당 부분 요구안을 관철시켰다. 홍 지부장은 “그때 까맣게 탔던 피부가 이제야 좀 돌아오고 있다”라며 그리운 듯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짧은 성공 뒤에는 다시 어려움이 찾아왔다. 법인직으로 인정받은 기성 회직들이 민주노총 대학노조 서울대지부를 떠나 서울대노조로 옮겨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홍성민 지부장은 “기성회직 출신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일 것” 이라고 그 이유를 추측했다. 서울대노조는 법인화 이후 생겨난 곳으로, 공무원 출신 법인직원 중심의 노동조합이다. 기성회직 노동자들이 학교뿐만 아니라 직 원사회 내에서도 동등한 법인직원으로 대우받고자 서울대노조로 옮겨갔으리라는 뜻이다. 홍 지부장은 “거기 간다고 (공무원 출신들이) 같은 법인직원으로 생각하겠느냐, 옮겨갈 때 노조 임원직 자리라도 인정받고 가야지 그냥 가면 되느냐”라며 소속을 옮기려는 노조원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다수의 노조원들은 홍 지부장을 논의에서 배제한 채 서울대노조로 옮겨가기로 말을 마쳤다. 13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노조원들이 서울대노조로 자리를 옮겼다. 95년 당시 33명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새로운 시작과 일상의 변화 

  여러 조합원이 노조를 떠난 이후, 홍성민 지부장은 80여 명의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을 조합에 받아들였다. 이들은 옛 기성회직과는 또 처지가 달랐다. 법인화 이전 공무원과 기성회직은 대학본 부에서 직접 인사를 관리했던 노동자였다. 하지만 각 단과대나 연구소 등은 공무원과 기성회직만으로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단과대 학장 이나 기타 기관장들은 기관별 재원을 마련해 직원을 뽑았고, 이들은 학교 본부가 아닌 개별 기관에서 자체적으로 관 리한다는 의미에서 ‘자체직원’으로 불렸다. 자체직원 중에서도 2년 이상 근무해 기간제법에 따라 계약이 자동으로 갱신 되는 직원을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 다는 뜻에서 무기(無期)계약직이라 부른다. 이들은 각 단과대나 기관의 재정 사정에 따라 그 대우가 천차만별이었고, 대부분 열악한 임금 조건에 머물렀다. 홍 지부장은 “기성회직 시절 차별에 서러웠던 때가 떠올랐다”라며 이들에게 노 조가입을 권하게 된 계기를 말했다. 그는 무기계약직의 임금 협상과 기타 대우를 본부와 직접 교섭했고, 올해는 무기 계약직도 기본급 외에 5개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16년 4월에는 비학생조교들이 대학노조 서울대지부의 문을 두드렸다. 조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상 각 단과대에서 사무 업무를 맡고 있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2년 이상 일했음에도 고용을 보장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나가야할 처지에 있었다. (<서울 대저널> 138호, ‘일할 때는 직원, 쫓겨날 때는 조교?’)홍 지부장은 이들을 모아 아침, 점심마다 기간제법에 따라 고용을 보장해달라며 피케팅과 선전에 나섰다. 그는 “지부장인 내가 나가야 다들 믿고 나온다”라며 쉬는 날 없이 나오려 애썼다. 그 결과 2016년 12월에는 학교로부터 비학생조교에 대한 고용안정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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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안정을 요구하는 비학생조교 ©대학노조 서울대지부



  연이어 성과가 나오자 다른 학내 노동자들도 대학노조 서울대지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16년 말, 생활협동 조합 노동조합(생협노조)도 대학노조 소속이 되기를 요청해왔다. 만성적인 저임금과 높은 노동강도에 시달렸던 이들이다. 원래 한국노총에 가입했었지만, 득 이 없다며 2015년에 탈퇴한 이들이기도 하다. 생협노조가 대학노조에 가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생협 사무처는 “계산 착오가 있었다”라며 갑작스레 임금을 추가 지급했다. 2월 현재, 대학노조 서울 대지부와 생협노조는 임금을 올리고 각종 악습을 개선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 중이다. 

  여러 직군의 노동자들이 함께 있는 만큼 내부 갈등도 있었다. 대학노조 서울대지부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무기계약직 일부는 비학생조교의 가입을 반대하기도 했다. 비학생조교를 받게 되면 노조의 주요 활동목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홍성민 지부장은 “법인직인 나도 무기계약직을 모두 받았지 않느냐” 라고 설득했지만, 몇몇 이들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홍 지부장은 그럼에도 비학생조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했고, 투표를 통해 이들의 가입을 통과시켰다. 

  아직 목표를 완전히 이룬 것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의 경우, 매해 임금이 인상되도록 호봉제를 도입하는 게 다음 목표다. 현재 무기계약직은 20년을 근속하더라도 큰 임금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학생조교 문제도 쉽지 않다. 고용 안정 자체는 약속받았지만, 구체적인 조건에 있어 학교 본부와 조교들의 입장이 차이를 보였다. 2월 24일 3차 본교섭을 진행했으나, 조교들이 학교에 어떤 형태로 남게 될 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이제 막 가입한 생협 노동자 들의 노동조건도 어디까지 향상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여러 직군의 노동자들이 함께 모인 노조인 만큼 노조원들의 단결도 안심할 수 없다. 어려운 과제를 눈앞에 두고, 홍성민 지부장은 걱정하기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하고 있는 교섭이 두 개고 곧 세 개가 될 수도 있다” 라며 바삐 인터뷰를 마치고 나섰다. 대단한 사상이나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기보다 일하는 이들의 일상을 바꿔가는 그의 모습 속에 노동조합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