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 사회 >기억은 권력이다
나아가는 세상에서 다시, '반올림' 10년 동안 이어진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투쟁
등록일 2017.04.25 11:41l최종 업데이트 2017.04.25 11:41l 정지훈 기자(fighter144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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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이 부회장은 약 43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최순실 씨 일가 및 미르·K스포츠재단에 지원하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부정한 요구에는 답하면서도 삼성은 그들이 책임져야 할 삼성반도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3월 6일은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였던 故황유미 씨의 10주기였다. 故황 씨의 죽음으로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모이기 시작한 때부터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500일이 넘도록 농성 중이다. 이들의 투쟁은 어떻게 시작됐고 왜 지금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다사다난했던 10년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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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사옥 앞에서 500일이 넘도록 자리를 지킨 반올림 농성장 ©한기웅 기자


반도체 직업병 문제, 발로 뛰며 알리다


  반도체 사업장의 직업병 문제는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에서 일하던 故황유미 씨의 죽음으로 공론화됐다. 故황 씨는 2003년 10월부터 삼성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2004년 1월부터 2005년 6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기 전까지 기흥사업장에서 각종 반도체 화학약품을 취급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약 2년 간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2007년 3월 6일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故황유미 씨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건 그의 아버지인 황상기 씨였다. 그는 삼성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피해자들과 함께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황 씨는 “삼성이 휴직기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딸에게 사표를 쓰게 했고 대신 지금까지 들어간 치료비의 상당수를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삼성의 모습을 본 황 씨는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을 공론화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공영방송사는 물론 각종 사회, 노동단체, 정당에까지 전화했지만 다루기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돌파구는 수원의 다산인권센터와의 인연에서 나왔다. 황상기 씨는 한 기자를 통해 다산인권센터를 소개받았고 관계자들은 황 씨에게 힘을 실어줬다. 또 함께 싸우기 위해 지역의 노동조합, 노동보건운동단체, 인권단체 등 약 21개의 단체들이 모였다. 그 결과 2007년 11월, 故황 씨가 세상을 떠난 지 8개월 만에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 규명 및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가 발족했다. 이듬해 2월 대책위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로 명칭을 변경했다. 


험난한 산업재해 인정 과정


  반도체 공정에서 직업병을 얻은 근로자들이 가장 먼저 마주한 문턱은 산업재해(산재) 인정이라는 어렵고 긴 과정이었다. 2017년 3월까지 반도체 직업병을 이유로 산재 인정 신청을 한 근로자는 82명이지만 고작 15명 정도만이 인정을 받았다. 이는 근로복지공단(공단)은 물론 법원에서 진행된 소송까지 포함한 결과다. 여기에 더해 공단의 심사과정과 법원의 소송과정은 오랜 기다림을 요구했다. 2007년 6월 故황유미 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함께 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고 그 심사과정만 1년이 넘어갔다. 공단이 불승인 판정을 내리자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항의하며 2010년 1월 행정법원에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승소 판결은 2011년 6월에 났고 공단이 항소를 제기해 진행된 항소심은 2014년 8월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무려 7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야 비로소 결과를 얻은 것이다.

  이렇게 산재 인정이 어렵고 그 과정이 긴 이유에는 ‘입증책임’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재해 상황에서는 사업주가 아닌 재해자에게 입증책임이 있다. 즉 재해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재해자가 그동안 노출된 유해물질의 종류와 그 유해물질에 노출된 정도를 밝히고 업무환경이 질병의 발병 혹은 악화에 기여했다는 의학적인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한 판결 과정에서 입증이 되지 않는 부분은 재해자에게 불리하게 해석된다.

  그러나 재해자 개인이 이 모든 사항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반올림 상임활동가 임자운 변호사는 “업무환경에 대한 모든 자료는 회사에 있고 아주 일부만이 고용노동부에 있다”라며 자료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심사를 진행하는 공단이나 법원에서 직접 회사나 고용노동부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자료제출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임 변호사는 “삼성은 지금까지 영업비밀 보호, 자료 부재 등을 이유로 자료제출을 거부했고 일부 자료를 갖고 있는 고용노동부 역시 삼성의 자료이기 때문에 함부로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라며 자료제출과 입증책임 소명과정이 지난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산재 심사 과정에서의 폐쇄적인 업무환경 역학조사도 산재 인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2006년 공단은 피해자와 유가족들로부터 산재 신청을 받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이에 따라 사망자 개개인에 대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의 조사가 2007년 있었지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연관성을 판단하는 작업은 보류됐다. 2008년에는 보충조사로 전반적인 반도체 사업장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실태 역학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보충조사에도 피해당사자와 피해자가 추천한 전문가의 참여 요청을 묵살하거나, 영업비밀사항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조사결과를 비공개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산재 인정을 위해선 조사보고서를 검토하고 조사 과정을 살펴보는 절차가 필요했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황상기 씨는 “적어도 피해자가 인정하는 산업의학전문의와 노무사가 역학조사에 참관해야 하는데 한 번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이후 반올림은 산보연 등을 상대로 역학조사 정보 공개 청구를 진행했지만 ‘당사자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 ‘기업의 정당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자료 공개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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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삼성과의 대화


  삼성과 피해자들 사이에 이뤄진 대화도 험난했다. 직업병과 업무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하던 삼성이 직접 반올림에게 대화를 제안한 시기는 2012년 11월이었다. 이듬해부터 1년 동안 반올림과 삼성은 실무협상을 진행했고 ▲사과 ▲ 보상 ▲재발방지책 마련을 세 가지 의제로 설정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진행된 본 협상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삼성은 피해자와 유가족들만 교섭주체로 인정하겠다며 반올림을 교섭과정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황상기 씨는 “삼성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반올림을 만든 것인데 이제 와서 교섭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니 기가 찼다” 라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 때문에 교섭이 중단됐고 2014년 4월에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 반올림이 함께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에 5월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가 “가족의 아픔과 어려움에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라고 사과하고 반올림 측의 제안을 협의사항으로 고려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후에야 협상이 재개됐다.

  하지만 2014년 8월, 이미 긴 싸움을 견뎌오며 지친 반올림 유가족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겼다. 황상기 씨와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씨, 한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를 제외한 유가족 여섯은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를 발족해 반올림에서 분리돼 나간 것이다.

  당시 삼성은 반올림의 핵심 교섭단이었던 여덟 가족의 피해를 기준으로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여덟 가족의 피해상황만을 고려하는 보상체계는 그 이외의 수많은 직업병 피해자들을 배제하기 때문에 반올림 측은 이를 거부했다. 김시녀 씨는 “산재를 신청한 43명을 모두 (보상논의에) 포함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과정이) 또 오래 걸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반올림과 함께 하던 유가족 중 여섯은 반올림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고 결국 가대위는 반올림에서 분리돼 삼성과 별도로 교섭을 진행했다. 황상기 씨 역시 “가족들 모두가 오랜 싸움에 힘들었을 것이니 그들의 선택을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가족을 갈라놓은 삼성의 제안을 비판했다.  

  2014년 10월 삼성과 가대위가 합의하면서 ‘삼성전자 사업장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설립됐다. 조정위는 삼성반도체 관련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제3의 중재기구다. 삼성은 2014년 5월 권오현 대표의 사과 이후 이뤄진 첫 교섭에서부터 조정위원회를 만들자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반올림은 새로운 중재기구를 만들 경우 그동안의 합의와 성과가 원점으로 돌아갈 위험이 크고 직접협상이 이뤄지기 어렵다며 이 제안에 반대했다. 조정위는 반올림을 독자적인 교섭주체로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하면서 반올림에게 조정위 참여를 지속적으로 권유했다. 이에 반올림 역시 피해자 가족들과의 논의 끝에 교섭중단을 방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12월부터 조정위에 참여했다.

  논의 끝에 2015년 7월 조정위는 ‘조정권고안(권고안)’을 발표했다. 권고안은 삼성전자가 1000억 원을 기부해 독립적인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이 기구를 통해 보상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삼성은 조정절차를 보류해달라고 조정위에 요청했고 급기야 9월에는 권고안을 따르지 않고 자체적으로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위원회(보상위)’를 설립해 사과 및 보상절차에 돌입했다. 이에 대한 반올림 측의 비판에 삼성은 독립법인 설립을 제외한 권고사항을 대부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며 보상위 구성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신속히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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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올림 측은 삼성의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임자운 변호사는 “권고안의 중요한 축은 삼성이 출연한 기금으로 구성된 독립법인이 직접 보상과 재발방지 과정을 총괄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독립법인의 보상과 재발방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체적인 보상을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권고안의 핵심에서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또 삼성은 가대위가 강조했던 ‘신속한 보상’만을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파악했다. 가대위 이외에도 아직 보상이나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있지만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이를 대변하는 반올림의 활동 역시 ‘신속한 보상을 방해하려는 시도’로 치부했다.

  이외에도 보상위의 구체적인 보상활동에는 부족한 점이 여럿 있다. 우선 보상위의 전반적인 활동과정을 쉽게 알 수 없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삼성 관계자들이 보상을 논의하고는 서류를 모두 가져가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내용에 동의했고 보상내용이 어떤지 나중에 확인할 방법이 없다. 권고안과 비교했을 때 보상기준이 미비하다는 문제도 있다. 대표적으로 재직자는 보상에서 배제되고 협력업체 직원도 ‘상주’협력사 소속으로 사업장 내에서 업무를 ‘상시’수행하던 사람만 보상받을 수 있다. 대상질병과 발병시기에 관한 기준도 폭이 좁아졌다. 권고안에 비해 인정되는 질환의 수가 줄었고 어떤 질병이든 재직 중 혹은 퇴직 후 10년 이후 발병한 경우는 모두 보상에서 배제된다. 별다른 이유 없이 축소된 보상기준은 꾸준히 지적됐지만 삼성은 권고안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상원칙을 정해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피해자들의 싸움


  삼성의 보상위 설립으로 인해 진전이 없었던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문제는 2016년 1월, 반올림과 삼성 측의 재발방지책 합의로 재조명됐다. 사회적 감시기구로 설립된 ‘옴부즈만위원회’가 재발방지를 담당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합의였고 삼성은 이 합의로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임자운 변호사는 “조정을 통한 합의안에 법적 강제력은 없으며 보상과 사과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라고 밝혔다. 보상과 사과의 문제에 더해 황상기 씨는 “옴부즈만위원회는 어떤 일들을 진행하고 있는지 반올림에 알려준 적이 없다”라면서 정보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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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6일, 강남역에서 진행된 故황유미 씨의 10주기 추모문화제 ©한기웅 기자

  문제의 세월은 어느덧 10년을 넘었다. 그나마 최근에 삼성의 총수가 구속되고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변화가 기대되는 상황이다. 황상기 씨는 “정경유착을 뿌리 뽑을 시기가 됐고 근로자들도 이제 권리를 찾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드러냈다. 김시녀 씨는 “삼성이 최대한 빨리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 정권이 바뀌기 전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10년의 굴곡에 이리저리 흔들렸던 피해자와 가족들, 이제 그들의 문제를 다시 돌아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