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호 > 사회 >우리가 만난 사람
할머니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날갯짓 평화나비 네트워크 김샘 간사를 만나다
등록일 2017.06.28 15:02l최종 업데이트 2017.06.30 10:01l 이하영 기자(heavenlee63@snu.ac.kr)

조회 수:162

  ‘대승적 타결’. 2015년 12월 28일 체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에 대해 일부 언론이 붙인 수식어였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는 달리 합의내용은 논란을 일으켰다. 일본이 10억 엔의 금전적 보상을 명분으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합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각지의 대학생들은 소녀상 옆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일본 대사관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일합의 원천무효’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최전선에는 ‘평화나비 네트워크(평화나비)’가 있었다. 평화나비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되찾고자 2014년 9월 발족한 대학생 네트워크다. 일회성 행사였던 2013년 ‘평화나비 콘서트’의 기획단과 연합 여행동아리 등에서 맺어진 인연을 계기로 7명의 학생이 모여 동아리처럼 시작했다. 이후 평화나비는 빠르게 성장해 현재 서울·경기·광주·부산 등 10개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다. 평화나비를 시작한 장본인이자 초대 대표직을 맡은 김샘 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밝히고 한일합의가 잘못됐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김샘 씨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면에 뛰어들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들었다.

보정 2.jpg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네트워크 '평화나비' 간사 김샘 씨 ⓒ신일식 기자



평화나비 날갯짓을 시작하다


  스스로를 시골 출신이라고 소개한 김샘 씨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가 직접 경험한 정치현장은 선배들을 따라 참가한 반값등록금 시위가 전부였다. 2학년이 된 후 김샘 씨는 후배의 제안으로 수요시위에 처음 참여했다. 비를 뚫고 집회에 참석해 자리를 지키는 생존자 할머니들과 사람들의 모습은 김씨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경험이 곧바로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샘 씨를 행동으로 이끈 충격은 2013년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평화나비 콘서트’에서 찾아왔다. 김 씨의 친구가 콘서트 기획단으로 참가한다는 소식에 그는 학과 후배들과 함께 콘서트를 보러 갔다. 학생들의 준비로 콘서트가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할머니들의 연설을 들으며 그는 대학생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해 하반기, 콘서트에 기획단으로 참가했던 친구가 이번에는 김샘 씨가 다니는 숙명여대에서 콘서트를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김 씨는 장소를 마련하고 설비를 대여하는 등 실무를 도왔다. 행사는 잘 마무리됐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그는 일회적인 콘서트가 아닌 정기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싶었다. 201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부터 마음 먹고 사람을 모았다. 콘서트 기획단, 연합 여행동아리 등을 통해 총 7명이 모였다. 구성원 중에는 숙명여대, 성신여대, 건국대, 서울대, 단국대 학생 등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매주 수요시위를 나가며 함께 활동할 사람을 구하는 모집포스터를 만들고 홍보를 시작했다. 영향력 있는 활동을 하려면 인력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백오십 명가량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모였다. 인원이 많아지자 초창기 구성원들이 지원단(서포터즈)을 꾸리기로 하고 각자 자신이 재학 중인 학교에서 홍보와 세미나를 진행했다.

  김샘 씨와 동료들이 기획한 첫 행사 역시 콘서트였다. 사람을 더 모아 폭넓게 활동하는 단체를 구성하려는 홍보의 목적도 있었다. 준비위원회는 2013년 평화나비 콘서트의 기획단으로 활동했던 사람들과 평화나비 네트워크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섞여 꾸려졌다. 제목은 이전과 같은 '평화나비 콘서트'였지만, 김 씨에게는 스스로 참여해 시작한 새로운 단체의 출발이라는 의미가 각별했다. 이들의 첫 콘서트는 2014년 4월 서울시립대에서 열려 1200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콘서트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서포터즈로 남은 회원을 중심으로 평화나비 네트워크가 발족했다. 이전까지 준비위원회로서 평화나비 네트워크의 구성과정에 참여했던 김샘 씨는 발족과 함께 대표직에 선출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부터 평화운동까지


  평화나비 네트워크는 매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환기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2014년과 15년에는 ‘평화나비 콘서트’를, 16년과 17년에는 ‘평화나비:RUN’이라는 마라톤 행사를 열었다. ‘아시아연대회의’가 개최될 땐 현장에서 진행을 보조하거나 캠페인을 돕기도 한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단체들이 정기적으로 여는 교류행사다. 또 평화나비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주최하는 수요시위에도 일 년에 2-3번은 주관 단위로 참여한다. 김샘 씨는 대표직을 맡은 2년간 거의 빠짐없이 수요시위에 나갔다.

  평화나비는 생존자 할머니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김 씨는 집회에 자주 참여하는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가 계신 ‘평화의우리집’을 주로 찾는다. 그는 “할머니들이 몸이 안 좋아서 시위를 
못 나오실 땐 영상이라도 찍어 보내주시고 우리를 ‘평화나비 친구들’, ‘대학생 나비들’이라고 불러주신다”라며 할머니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할머니들과의 교류를 통해 평화나비 활동은 ‘위안부’ 문제에서부터 평화와 반전의제 전반을 다루는 방향으로 확장됐다. 김샘 씨는 처음에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을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로 인식했다. 그러나 평화나비 활동이 계속되고 할머니들과 직접 만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각이 점차 바뀌었다. 그는 “할머니들이 힘든 기억을 상기하며 지금까지 싸워 오신 덕분
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민적 의제가 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여성·인권·평화에 대한 의식이 성장했다는 의미다”라며 당시의 깨달음을 설명했다. 생존자 할머니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많은 변화가 이뤄졌으며, 이는 단지 피해자 개인의 이야기뿐 아니라 평화와 반전이라는 의제를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끌어내는 동력이 됐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평화나비의 활동분야가 평화와 반전 의제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초 진행한 사드배치 반대 기자회견이나 ‘장미혁명 페스티벌’ 등이 그 사례다. 이외에도 평화나비는 사드배치, 탄저균, 국정교과서, 미군기지촌, 베트남전 중 발생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의 다양한 역사적 의제를 다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사건들 안에 담긴 인권침해와 전쟁문제가 ‘위안부’ 문제와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김샘 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시성폭력이고 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역사와 사회를 복합적으로 바라보는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라며 앞으로 활동 영역을 더 넓혀갈 포부를 드러냈다.

우만사3-2.jpg

▲한일합의 반대 집회 주도 대학생들을 소환한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한겨레



한일합의와 항의농성, 그리고 재판

  김샘 씨의 활동은 2015년 한일합의를 기점으로 큰 전환을 맞았다. 당시에 진행되던 한일 실무자 회담에서 별달리 발표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김 씨는 합의가 성사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일부 언론은 이 합의가 양국 간 ‘최초의 대승적 타결’이라고 보도했다. 김 씨의 지인 중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한 달간 준비해 온 동계 워크숍도 취소하고 농성을 결심했다. 겁이 많이 났지만 생존자 할머니들의 존재가 힘이 됐다. 김샘 씨는 “이용수 할머니와 밥을 먹는데 ‘저들이 합의를 했지만 우리는 계속 싸우면 되니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농성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더라”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합의 이틀 만에 시작된 농성에서 김 씨는 동료 한 명과 네 시간 동안 번갈아 구호를 선창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수요시위를 나왔다가 현장에서 농성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일본 대사관 항의방문을 감행한 것은 농성을 시작한 다음날이었다. 김 씨는 “한일합의의 문제점을 언론에 크게 알려야 했는데 대학생들이 돈을 모아 광고를 내기는 어려웠다”라며 항의방문을 한 배경을 설명했다. 2015년 12월 31일, 김 씨와 동료들은 당시 대사관이 입주해 있던 트윈트리타워 8층에 대자보를 붙이고 2층에 내려와 시위를 시작했다. 마침 그날이 일본 휴일이었기 때문에 대사관은 비어 있었지만 그는 근처에 있던 경찰에 의해 30분 만에 연행됐다. 연말연시를 유치장에서 보낸 김 씨는 2016년 1월 2일에 석방된 후에도 다시 소녀상으로 향했다.

  이후 김샘 씨에게는 검찰의 기소장이 날아왔다. 일본대사관 방문과 국정교과서 기습시위 등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밖에도 참여했던 각종 농성과 기자회견 등으로 총 다섯 건의 기소가 이뤄졌다. 김 씨는 평화나비네트워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정화저지네트워크’, ‘정의기억재단’ 등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었
다. 그는 매주 법정에 출석하며 재판을 소화하는 것이 “좀 버거웠다”라고 짧게 토로했다. 지난한 재판 과정은 지난 5월 25일, 1심이 다섯 건의 혐의 중 네 건에 벌금 200만 원을 선고하면서 일단락됐다.

  김샘 씨는 자신이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법적 책임을 분명히 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그는 “절차적으로는 한일합의와 화해치유재단 설립이 훨씬 적법해보이고 대사관 시위와 기자회견이 불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회적 정의의 틀에서 바라볼 때 역사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전자라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씨는 한일합의를 “사죄하고 반성해야 할 문제를 마치 합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양 바꿔놓은, 일본으로서는 참 머리를 잘 쓴 전략이었다”라고 비판했다. 우선 협상에는 앞서 생존자들이 요구한 ▲공식적인 사죄 ▲법적인 배상 ▲역사관의 설립 ▲책임자 처벌 등의 내용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은 협상 이후 10억 엔을 지급해 화해치유재단 설립을 ‘지원’하면서 책임을 다한 듯 행동했다. 김샘 씨는 “화해치유재단도 한국이 설립했고 일본은 비용만 지급했지만 결국 일본이 면죄부를 받은 꼴이 됐다”라고 말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한일합의 무효화를 1호 외교정책으로 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그는 “한일합의가 폐기되고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돼야 그나마 다시 얘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새 정부의 행보를 기대감을 갖고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나비가 앞으로 나아갈 길

  현재 평화나비 네트워크는 비영리단체로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여성가족부·교육부·외교부 등의 정부부처나 서울시와 같은 지방자치단체 산하 비영리기구로 공식 등록되면 비공식 학생단체로 활동할 때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평화나비를 비영리단체로 등록할 준비는 몇 달 전부터 진행됐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전까지는 공공기관에 아무리 문의해도 회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김샘 씨는 현재 자신이 이 일을 맡아 서울시에 접수할 서류를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김 씨는 지난 5월 광주에서 진행한 ‘기억의 봄 프로젝트: 광주 역사기행’처럼 평화나비 네트워크의 지역지부가 지역과 학교의 특색을 잘 반영한 활동을 펼치며 순조롭게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또 최근에 제주도와 경기도에 생긴 청소년지부를 예시로 들며 평화나비를 연령과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단체로 발전시킬 계획도 있었다.

  김샘 씨는 “어떤 직업을 갖든지 이 문제와 떨어져서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라며 졸업 후에도 여성학 혹은 국제분쟁에 관한 공부를 이어갈 계획을 밝혔다. 올해의 1차 목표는 졸업이라고 강조한
그는 당장 진행되고 있는 재판보다도 학업에 대한 생각으로 더 분주해보였다. 그는 여전히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이 회복되는 날을 위해 쉼 없이 날갯짓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