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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를 위해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을 만나다
등록일 2017.10.24 17:57l최종 업데이트 2017.10.24 17:58l 조시현 기자(whtlgus090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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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소장 ⓒ이가온 사진기자



  '인권재단 사람'이 운영하는 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은 말 그대로 인권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위해 반 층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있으며, 성별·젠더의 구분이 필요 없는 성중립 화장실과 장애인, 비장애인이 모두 쓸 수 있는 장애인 겸용화장실이 마련돼있다. 이곳을 설립한 사람은 현재 인권재단 사람의 소장을 맡고 있는 박래군 씨.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한 시민이 센터를 찾자 벌떡 일어나 목적지까지 안내해준 후 인터뷰를 재개하곤 했다. ‘소장’이라는 직함이 무색할 정도로 소탈한 인상이었다. 오랜 시간 인권 운동의 현장을 지키며 10개가 넘는 전과를 쌓은 사람,“할 사람이 없어 내가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껄껄 웃는 사람. 한국 인권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온 박래군 소장을 만나,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해온 인권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가’가 된 문학청년 

  대학생 박래군이 학생운동에 처음 발을 디딘 건 1학년 말이었다. 재수 끝에 1981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오래 전부터 소설가를 꿈꿔온 문학청년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대학사회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언론이 정권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던 시기 대학생들은 글과 말로 광주의 비극을 전해 들었고, 함께 군사정권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다졌다. 81년 11월 25일 연세대학교에서는 하루 종일 격렬한 시위와 충돌이 이어졌고 그날 박래군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시위를 주도하던 학우가 경찰을 피하려다 학생회관 4층에서 떨어졌고, 학생들이 떨어진 학우를 병원으로 옮기려 하자 경찰이 학생들 위로 최루탄을 퍼부은 것이다. 학우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모습을 보며 박래군은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1983년 박래군은 교내 시위를 주도하다 연행된 뒤 강제 징집을 당했다. 그가 군에 복무하는 동안 군 밖에서는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동맹 파업 등 노동운동의 굵직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박 소장 역시 전역 후 바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많은 학생이 그랬듯 그 역시 위장취업을 해 노동현장으로 갔다. 파업을 주동해 해고자를 복직시키는 등 나름의 성과도 거뒀지만, 결국 그는 1986년 한미은행 점거 농성에 참여하다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듬해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면서 박 소장은 가석방됐다. 몸을 추스르며 다시 노동운동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던 즈음, 갑자기 박 소장의 동생인 박래전 열사가 분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며 학생회관에서 분신했고, 이틀 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박 소장은 박래전 열사의 유가족으로서 자연스럽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와 만나게 됐다. 1988년 10월에는 서른다섯의 전국의 의문사 유가족들이 처음 농성을 시작했다. 박소장 역시 이에 지원해 가족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진이나 진정서 등 흩어진 기록을 모아 자료집을 내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박 소장은 민가협 사무국장을 맡아 의문사의 진상규명 문제, 고문 추방 문제와 같은 인권 문제에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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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박래전 열사의 추도식에서 박래군 소장이 연설하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제 인권운동으로 가자"

  박 소장은 1993년 6월 빈에서 열린 유엔세계인권대회를 통해 인권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인권은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 같은 사회운동의 일부이자 보조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여졌다”고 박 소장은 설명했다. 인권에서 연상되는 것 역시 양심수나 의문사 등 정치적 자유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박 소장은 빈에서 처음 성소수자·장애인 등 소수자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당시 한국사회의 운동은 군사 독재 타도, 민주화, 통일 등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내부의 소수자를 존중하는 데엔 취약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빈에서의 경험에 대해 “우리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고, 또 그들이 주체로 설 수도 있는 운동이 바로 인권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빈에서 귀국한 박래군 소장은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인권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주요 목표는 인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시민의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도 이제는 얘기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하루소식>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하며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활동가들은 낮에는 현장에서 운동을 하고, 밤에는 팩스로 기사를 쓰며 <인권하루소식>을 운영해나갔으며, <인권하루소식>은 시설 수용자 인권, 성소수자 인권, 최저임금 등 당시 생소했던 사안들을 거침없이 보도했다. 박 소장은 “일반 시민들은 물론 언론사와 정부 기관도 <인권하루소식>의 애독자였다”고 밝혔다. 언론사는 <인권하루소식>에서 새로운 기삿거리를 찾아 갔고, 정부 기관은 <인권하루소식>을 통해 인권 부문 정책에 대한 피드백을 얻어갔다. 궁극적으로 사회에서 논의되는 인권의 범주를 넓히는 데 <인권하루소식>이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인권운동사랑방은 점차 연대로 시야를 넓히기 시작했다. 박래군 소장은 “특정 사안이 생기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게 아니라, 인권단체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연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인권운동 진영 내에서도 박 소장의 의견은 많은 공감을 받았고, 그 결과 2004년 ‘인권단체연석회의(연석회의)’가 탄생했다. 연석회의 결성을 주도했던 박 소장은 연대의 정신을 앞서서 실천해나갔다.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세월호 참사 등 공권력과 시민사회가 충돌할 때마다 박 소장은 늘 자리를 지켰고, 훈장처럼 전과 기록이 쌓여갔다. 그는 ‘4.16 연대’ 상임운영위원으로서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를 주도하던 중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및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돼, 현재 두 개의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된 상태다.

  박 소장은 세월호 참사의 성격상 사회운동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박근혜 정권이 진상규모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는 황급히 시민단체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원회’를 꾸려 유가족들을 만나고, 전국 각지에서 천만인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결합을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으나, 결국 이들은 2014년 11월 7일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비록 ‘특별조사위원회’는 지난해 9월 강제 해산됐지만, 박 소장은 “박근혜 정부의 각종 탄압을 뚫고서도 입법에 성공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했다.

  박 소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나타난 일련의 움직임이 새로운 운동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특별법 통과 이후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원회의 뒤를 이어 탄생한 4.16연대는 소수 활동가들이 운동을 주도하기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연결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박 소장은 “사람들은 기존의 단체에 들어가기보다 SNS를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어 정보를 나누고 토론하는 방식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직접 기존의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에 들어가진 않더라도, 주체성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 새로운 운동을 꾀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운동의 방식도 바뀌었다며, 4·16 연대 역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지속가능한 인권 운동이 필요하다”
  
  한편 박래군 소장은 요즘 '돈 모으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인권 단체들의 활동 여건은 매우 열악하고, 결국 돈이 필요하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인권재단 사람의 ‘인권활동가 활동비 처우 및 생활실태 연구(2015)’에 따르면 인권 활동가의 60% 이상이 수입을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한다. 인권 단체도 되도록이면 최저임금을 지키는 선에서 활동비를 보장하려 하지만, 재정이 어려워지면 그마저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권단체가 재정의 독립을 중요하게 여겨 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곤 한다. 종종 인권침해의 ‘주범’이 되는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력난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여서, 인권 단체들 중 상임활동가가 다섯 명이 넘어가는 곳을 찾기가 힘들다. 상임활동가 없이 일시적으로 고용된 활동가들로만 겨우 운영되는 곳도 있다. 후원회원 모집은커녕 단체 일만으로도 벅찬 현실이다. 

 인력난, 열악한 재정 등 인권 단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기관이 바로 인권재단 사람이다. 인권재단 사람은 인권 활동가들에게 최저임금, 4대 보험 등 최소한의 활동 여건은 보장해주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활동만으로도 바쁜 인권 단체를 대신해, 인권재단 사람은 후원회원을 관리하고 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2010년에는 인권센터인 ‘인권중심 사람’을 설립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시작할 때만 해도, 재정적 기반이 취약한 인권운동 진영에서 모금 운동은 불가능하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인권재단 사람은 2년 6개월에 걸쳐 목표액의 95%를 모아 재단 공간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에 힘입어 인권재단 사람은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365기금’을 만들었고, 지난 해에는 오로지 시민의 후원으로만 1억 3천만 원 가량을 모아, 이를 34개의 인권운동 사업과 660명의 인권 활동가들에게 전달했다.

  오래도록 인권을 위해 일해 온 박 소장의 목표는 인권운동이 ‘젊어지는 것’이다. 그는 만 60세가 되면 정말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박 소장은 “나는 옛날 사람이니까”라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시대는 변하는데 사람은 그대로이면 안 되고, 무엇보다 진보의 영역을 다루는 인권 운동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이제는 젊은 세대가 새로운 인권 운동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후배 운동가들을 위해 새로운 인권 운동의 터전을 만들어나가는 일. 그것이 박 소장이 자신에게 부여한 마지막 과제인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