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호 > 사회 >기억은 권력이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제주 4·3 70주년, 온전한 해결을 향해
등록일 2018.04.13 00:38l최종 업데이트 2018.04.13 00:45l 허유진 기자(qq877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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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일,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광화문에서 ‘70주년 제주 4·3 완전해결 촉구대회’를 열었다. 위원회는 제주 4·3 사건의 추가적인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골자로 하는 특별법 개정안의 빠른 통과를 요구했다. 제주 4·3 사건은 국가 권력이 개입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지만 이제껏 정부는 국가 폭력의 역사를 은폐 및 축소해 왔다. 2005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임을 인정하며 공식 사과하기 전까지, 정부는 제주 4·3 사건을 ‘제주도 남조선노동당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했다. 2014년, 4월 3일이 국가 지정 추념일로 지정되자 일부 보수 단체가 이에 반대하며 시위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했지만, 국민들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낮다. ‘전국민 제주 4·3인식조사’ (코리아리서치센터, 2017)에 따르면, 응답자의 68.1%가 제주 4·3 사건을 알고 있지만, 28.3%만 제주 4·3 발생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1948년의 제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고, 2018년의 우리는 왜 이 역사를 알지 못할까. 제주 4·3의 70년 역사를 짚어보고 4·3의 완전한 해결로 나아가는 길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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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 제주4·3사건 인식조사' 결과 보고서 ⓒ제주4·3평화재단


제주 4·3, 하루에 그치지 않은 7년의 역사
 

  ‘제주 4·3 사건’이라는 용어가 교과서나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지만, 4·3이 1948년 4월 3일 하루에만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제주 4·3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전면 해제될 때까지 약 7년에 걸쳐 벌어졌다. 4월 3일은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킨 날일 뿐이다. 4·3 특별법 개정안은 이 7년을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 및 남한 단독 선거·단독 정부 수립을 배경으로 무장대와 토벌대가 무력충돌하고, 토벌대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기간’이라고 정의했다. 해방과 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동안 제주도는 어떤 7년의 역사를 겪었을까. 그 시작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 3월 1일, 제주시에서는 ‘제 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다. 이는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제주도민의 열망이 담긴 행사이자,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고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는 등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미군정에 항의하는 자리였다. 자주적으로 새 나라 를 만들어가자는 염원을 투영한 대회였지만, 그 끝은 잔혹했다. 오후 2시부터 이어진 가두시위에서 어린 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다쳤지만 경찰은 아이를 방치한 채 떠났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항의하자,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은 도민들에게 총을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도민들은 ‘민관 3.10 총파업’으로 항의했으나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했고, 경찰은 3.1대회 참가자들을 단속했다. 약 1년 동안 2,500여 명이 검거됐고, 고문으로 3명이 사망했다. 고문과 이념 단속을 주도한 것은 주로 극우 성향 정치인과 우익단체였다. 새로 임명된 제주도 지사는 극우 성향 육지 출신 인물이었고, 타 지역에서 파견된 응원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회’가 대거 제주도에 들어왔다.


  제주도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가 추진되자,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는 이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3일 봉기를 일으켰다.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 또한 봉기의 배경이었다. 진압을 맡은 제주주둔군 김익렬 중령이 28일 무장대 측과 협상에 성공해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뒤따른 방화와  민간인 총살 사건으로 평화 협상은 깨지고 만다. 평화를 약속한 협상이 파기된 후 제주도민에게 남은 것은 더욱 강력한 탄압과 학살뿐이었다. 김 중령의 자리를 대신한 강경파 박진경 중령은 자신의 취임사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1948년 총선으로 남측은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선거구 3개 중 2개가 무산된 제주도에서는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를 명분으로 강력한 토벌이 시작된다. 10월 17일 제주지역에는 해안선 5km 이상 지역에 대해 통행 금지와 무조건 발포 명령이 내려졌고, 11월 17일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경찰과 군만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아니다. 산에서 생활하던 무장대는 식량보급이 끊기자 민간인을 약탈했고, 토벌대에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에 대한 보복 살인이 이어졌다. 산간· 중산간 마을의 대부분은 불태워 없어졌 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중산간 마을 중 하나인 선흘리에서는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자연 굴로 숨었지만 은신처가 발각돼 대부분 총살당했다. 또 다른 중산간 마을인 북촌리에서는 무장대가 군인 2명을 살해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군인들은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과 인근 밭으로 모은 후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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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토벌대를 피해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도민들 ⓒNARA



  1949년까지 이어진 대량학살은 한국 전쟁기에도 계속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측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검거한다는 명분으로 입산자의 가족이나 요시찰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이 ‘예비검속 사건’에서 수백 명의 제주도민이 수장당하거나 총살됐다. 1954년에 이르 기까지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약 만 오천 명이고, 이 중 12%는 어린이와 노인이었다. 사망자 중 78%는 토벌대에 의해, 13%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당했다.



제주 4·3, 40년간 말할 수 없던 역사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지만 제주 4·3 사건에 대한 언급은 오랫동안 금기시됐다. 4·3 관련 기록은 대부분 미공개였을 뿐 아니라, 정부는 오랫동안 제주 4·3 사건을 이데올로기 문제로 벌어진 봉기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4.19 혁명 이후 실시된 진상조사는 형식적 수준에 그쳤고, 그마저도 5.16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린다. 반공법, 국가보안법과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은 희생자와 유족들이 제주 4·3에 대해 말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했다. 북촌리 마을 주민들이 4·3의 기억으로 다 같이 통곡하자 경찰이 이장에게 ‘4·3관련 공동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아이고 사건’이나, 4·3 수감 이력이 있는 이들은 옆 마을 단순방문까지 보고해야 했던 점은 4·3사건과 관련된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탄압받았는지 보여준다. 4·3의 고통은 1954년에 멈추지 않고 오랜 시간 지속돼 공동체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난 1978년이 돼서야 제주 4·3 사건은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진다. 그러나 이는 즉시 금서로 지정됐고, 현기영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조직적·지속적인 탄압에도 제주 4·3을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사건 발생 41년 만인 1989년에 처음 열린 공개 추모행사는 4·3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했다. 4·3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힘입어 사건 50주년인 1998년 ‘제주4·3 범국민위원회’가 조직됐고, 2000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라는 소기의 성과도 이뤘다. 2008년에는 공동체적 보상 차원에서 ‘4·3 평화공원’이 조성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던 4·3이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 4·3의 온전한 해결을 위한 피해 회복과 진상규명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사과와 공동체 차원의 보상은 이뤄졌지만, 아직 4·3에는 미해결과제들이 남아있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박찬식 운영위원장은 “(제주 4·3은) 국가의 적극적 행동으로 인해 희생당한 것”이라며 개별 보상과 군사재판 무효화를 통해 희생자 및 유족의 피해를 구제하는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현행법상으로는 희생자의 사법적 구제가 불가능해 이미 오래전 심사가 끝난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보상 의무가 빠진 불완전한 법률 이 희생자에 낙인을 찍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에 걸친 군법회의로 2530여 명이 전국 교도소에 수감되고 수백 명이 사형됐지만 공소장이나 판결문 등 당시 재판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아 군법회의가 적법하게 진행됐는지 알 수 없다. 수형기록으로 인해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연좌제 피해가 심했던 유족과 희생자 중 18명의 생존자는 지난 해 4월 19일 재심을 청구했으나 당시 재판자료가 전무해 사법적 방법으로는 명예 회복이 어렵다. 박 위원장은 “당시 군사재판이 무효라는 점과 군사재판으로 인해 수형된 사람들은 무죄라는 점을 4·3 특별법에 명시해야 한다”며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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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9일, 국회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 제70주년범 국민위원회는 제주 4·3 특별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


  특별법 개정안은 4·3 사건의 추가적인 진상규명 필요성 또한 강조한다. 박찬식 위원장은 “일정 수준의 명예 회복은 이뤄졌지만, 과거사 청산의 국제적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며 “온전한 진상규명과 가해자에 대한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건의 전체 흐름 을 파악하는데 집중했던 2003년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의 한계를 지적하며 “마을별, 분야별 구체적인 피해 조사를 해나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해자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처벌 또한 필요하다. 박 위원장은 “작전 결정 과정의 주요 책임자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필요하다”며 대량학살을 야기한 한국군과 경찰, 미군정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활동 경험이 있는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사회학과)는 “경찰과 군이 이렇게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것은 국가의 허물어진 도덕성을 드러낼 수 있기에 그간 (정부는 4·3을) 잘 다루려하지 않았다”며 민주화가 진행된 지금은 정부가 4·3 사건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노력해 국가의 도덕성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 4·3, 시민사회와 손잡고 나아가야 할 때


  피해보상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개정안 통과가 시급한 과제지만, 이것으로 4·3의 온전한 해결을 담보할 수는 없다. 김동춘 교수와 박찬식 위원장은 온 국민이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관심을 기울여야 4·3의 공동체적 치유가 완성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역사 해결의 주체는 희생자도, 정부도 아닌 사회 전체가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동춘 교수는 “50대 이상은 (4·3을) 거의 배운 적이 없고, 그 이후 세대는 교과서에 언급은 되나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며 역사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조용히 과거를 청산할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공론장에서 4·3을 공개적으로 거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찬식 위원장 역시 “제주도라는 한정된 지역을 넘어 4·3의 전국화를 통해 온 국민이 4·3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며 제대로 된 평가를 통해 제주 4·3의 제 이름을 찾아주는 정명(正名)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4·3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높이고 국가적 책임을 이끌어내려면 의식의 개선이 필요하다. 박찬식 위원장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이 아니라 이념을 기준으로 사람을 적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4·3을 국제적 인권과 정의 수준에 맞게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 역시 “상대방을 빨갱이를 몰고 죽여도 된다는 것은 자신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라며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고 입을 막는 불관용이 사라져야 역사적 비극의 반복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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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3일, 제주4·3항쟁 70주년 광화문 국민문화제에서 '403인의 함성:4·3, 대한민국을 외치다' 퍼포 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



   제주 4·3은 대한민국 70년의 역사와 궤도를 함께한다. 박찬식 위원장은 “제주도민들은 역사의 주체로서 해방된 공간에서 제대로 된 나라, 우리의 나라, 통일된 나라를 원했다”며 “제주도민을 통일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투쟁한 역사의 주인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김동춘 교수는 “4·3의 대중적 해결을 통해 구시대적인 이데올로기 갈등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제대로 된 나라를 열망했던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폭력사태에 대해, 정부는 오랜 세월 침묵했고, 시민 사회는 오랜 세월 무지했다.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불관용의 벽에 부딪쳤고 인권은 지켜지지 못했다. 올해 70주년을 맞이한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인권과 평화, 관용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폭력의 역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