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호 > 사회 >기억은 권력이다
"국가가 우리를 '부랑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국가에 책임을 묻는다
등록일 2018.09.06 18:15l최종 업데이트 2018.09.10 22:39l 유서희 기자(cow110358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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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해 여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와 최승우 씨는 10달째 국회 앞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은 시간, 농성장은 이미 보도블록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두 사람이 눕기에도 좁은 농성장에서 이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것은 작은 선풍기와 아이스박스가 전부였다. 

  이곳에서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국가가 우리를 ‘부랑인’으로 만들었다”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폭력 문제로 해석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폭력인 이유는 무엇이며 사건의 진상규명은 피해생존자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농성 274일째던 8월 7일, 농성장을 찾아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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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아우슈비츠’, 형제복지원

  부산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된 부랑인 수용시설이다. 국가는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형제복지원을 설립했지만, 일반 시민까지도 무작위로 납치해 약 3500여 명을 감금했다. 안에서는 강제노역, 구타, 성폭행, 암매장 등의 인권유린이 자행됐고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신민당 형제복지원 조사위원회 기준)에 이른다.

  노숙농성 중인 최승우 씨는 1982년 중학교 1학년 때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길에서 담배를 태우던 경찰은 하교하던 최 씨를 불러 세워 파출소로 끌고 갔고, 최 씨의 가방에서 나온 빵을 들이밀며 그를 도둑으로 몰았다. 최 씨가 결백을 주장하자 경찰은 라이터로 성기에 고문을 가하며 협박했고 결국 거짓 자백을 받아내 최 씨를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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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생존자들은 작년 9월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형제복지원 옛터부터 청와대까지 국토대장정에 나섰다. 한종선 씨(오른쪽 노란 옷)와 최승우 씨(왼쪽 노란 옷) ⓒ한종선 씨 페이스북



  형제복지원은 최 씨의 집에서 10분도 안 되는 위치였지만, 최 씨는 복지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곳의 실상을 전혀 몰랐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새마음지’라는 홍보물을 통해 “거지, 장애인, 정신병자 등 부랑인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재교육시켜 사회로 내보내는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담당했던 김용원 검사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대다수는 사회적 약자였으며 부랑인이 아닌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최 씨가 수용되고 2년 뒤 그의 동생도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손자들이 없어지자 형제의 할머니는 손자들을 형제복지원으로 인도한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했지만, 경찰이 조손가정의 아이를 찾아줄 리 없었다. 이처럼 경찰은 사회에서 ‘사라져도 되는’ 대상을 의도적으로 골라 복지원에 보냈다.

  한종선 씨는 1984년 아버지의 위탁으로 작은 누나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당시 9살이었던 한 씨는 하교 후 아버지와 극장, 자갈치 시장, 용두산 공원을 구경했다. 저녁 7시쯤 아버지는 그를 파출소로 데려갔고 한 시간 뒤 그는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한 씨의 입소자료에는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울고 있어 주민의 신고로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고 적혀있다. 한 씨는 ‘돈 벌어서 아이들을 찾아가라’는 경찰의 말에 아버지가 설득당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형제복지원 생활은 성폭력, 구타, 강제노역이 만연한 군대식 생활체제였다. 최 씨는 입소 첫날부터 소대장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에도 계속된 성폭력으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최 씨는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호되게 구타당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탈출을 시도하거나 내부 규율을 어긴 수용자는 “나는 도망을 다녀왔습니다”, “나는 규율을 위반했습니다” 등이 적힌 마대자루인 ‘똥복’을 입은 채 교회당에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했다. 3500명 앞에서 수용자를 폭행하던 박인근 원장은 자신의 행위가 “예수의 이름으로 벌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어린 시절에 교회를 좋아했던 한종선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종교의 이름 아래 억압당하며 교회라면 몸서리쳐질 만큼 큰 트라우마가 남았다. 구타로 사망한 수용자의 시신은 뒷산에 암매장되거나 한 구당 300만 원에서 500만 원 정도에 대학병원 해부용 시체로 판매됐다.

  당시 형제복지원 측은 긍정적인 이미지 조성을 위해 복지원 내 개금국민학교 분교에서 초등교육을 시행하거나 성인 소대원을 대상으로 운전면허교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씨는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로 기합이나 매질을 당한 기억뿐이라고 회상했다. 운전면허교육 역시 박 원장과 형제복지원 관리자들의 눈에 든 일부만을 대상으로 했으며, 이들은 다시 ‘부랑인 선도 차량’ 운전에 동원됐다. 형제복지원 수용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데 협조하도록 한 것이다. 초등교육과 운전면허 교육은 형제복지원 운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연출에 불과했다.


지울 수 없는 형제복지원의 꼬리표

  최승우 씨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 덕에 4년 만에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에서의 폭력적 경험으로 최 씨는 복지원을 떠난 후에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철조망이 둘려 있던 형제복지원은 경비원과 경비견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형제복지원 밖에서 우연히 철조망과 군인을 마주한 최 씨는 복지원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누군가 그를 해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년시절 보고 들은 것이 폭력뿐이었던 최 씨는 이때 이후로 가족을 떠나 유흥가를 전전하며 도둑질과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다 아내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됐지만,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낙인은 최 씨에게 가족과의 이별을 안겼다. 아내의 어머니가 최 씨의 아이를 입양 보내고 아내와의 연락을 막은 것이다. 최 씨의 아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가족과의 이별이 남긴 상처와 함께 최 씨의 몸에는 복지원에서 맞아서 생긴 상처와 디스크, 고혈압 등의 후유증이 남아있다. 

  한종선 씨에게도 형제복지원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까지 망가뜨린 곳이다. 한 씨와 누나가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지 2년 만에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에 끌려왔다. 그러나 1987년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져 수용자들이 돌연 석방됐고 한 씨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마리아 소년의 집, 갱생원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전전하며 살아온 한 씨지만 형제복지원은 특히나 큰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을 남겼다.

  사회적으로도 형제복지원은 피해생존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꼬리표였다. 그러나 한종선 씨가 국회 앞 1인 시위를 시작하면서 피해생존자들은 제2의 인생을 맞이했다. 이들은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고통을 치유하고 나아가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참여”하기로 했다. 한 씨는 2012년 국회 앞 노숙농성의 첫발을 디뎠다. 산재신청이 기각되며 생활이 어려워진 한 씨는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잊고 지내던 아버지와 누나의 주소를 확인했다. 가족들이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됐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1987년부터 ‘똑똑한 누군가가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 막연히 믿어왔던 그는 이를 계기로 피해당사자로서 직접 목소리를 내겠다고 결심했다.

  한종선 씨의 1인 시위는 1987년 석방 이후 흩어졌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계기가 됐다. 이는 2013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원회)’와 2014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와 실종자·유가족 모임(피해생존자 모임)’ 출범으로 이어졌다. 최승우 씨는 인터넷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재조명된 것을 접하며 대책위원회와 연락이 닿았다. 트라우마로 인해 형제복지원을 떠올리고 싶지 않던 그는 용기를 내 <서울신문>에 메일을 보냈고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한종선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를 만나 함께 활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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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선 씨는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2015년 국회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렸다.ⓒ한종선 씨 페이스북



  이들이 함께한 첫 번째 농성은 2015년 4월부터 2개월 동안 진행됐다. 지금의 노숙농성은 특별법 추진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자 작년 11월 7일 다시 시작한 것이다. 트럼프의 방한 일이기도 했던 11월 7일에는 태극기집회가 국회 앞을 점령했다. 태극기 부대는 형제복지원을 ‘거지새끼들 잡혀가는 곳’,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부랑인’이라며 헐뜯었고 농성이 불법이라며 구청에 신고했다. 영등포구청은 “우리를 형제복지원에 데려갔던 사람이 공무원들인데, 진상규명을 위해 앉아있는 우리를 또 잡아갈 것이냐”는 피해자모임의 호소 후에야 농성을 방해하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단식, 국토대장정, 노숙농성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형제복지원의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피해생존자들이 진상규명을 향해 하나된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음에 피해생존자들은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는 한종선 씨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한 씨에 관심이 집중되는 만큼 ‘혼자 많은 보상을 챙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2017년 9월 6일 시작한 국토대장정을 통해 피해생존자들은 그동안의 갈등을 해소했고 수많은 사람의 연대를 확보했다. 


형제복지원은 국가폭력 사건이다

  2012년부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특정 개인 혹은 한 시설에 국한할 수 없는 국가폭력 문제기 때문이다. 정부는 훈령을 통해 체계적으로 형제복지원 운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전쟁고아들을 잘 키워서 사회일꾼으로 키우겠다는 명목으로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발표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정화운동에 박차를 가하던 전두환 정부는 같은 훈령을 근거로 형제복지원의 규모를 확장했다. 당시 한국은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지만, ‘신문팔이’, ‘껌팔이’ 등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하층민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이 빈곤한 나라로 비칠 것을 우려한 한국 정부는 국가사업으로 ‘부랑인’ 단속을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 부랑인의 수가 예상만큼 많지 않자 일반인을 부랑인으로 조작하기 위한 국가와 복지원, 경찰 사이의 거래가 이뤄졌다. 국가는 부랑인 1명을 수용할 때마다 복지원에 지원금을 지급했고 복지원 간부들이 이를 가로챘다. 경찰들은 수용시킨 사람의 수에 따라 인사고과점수와 뒷돈을 챙겼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정권이 물러나던 1987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직원 5명이 업무상 횡령, 특수감금 등으로 구속되면서였다. 형제복지원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울산에서 제2의 형제복지원을 추진하던 이충렬 소대장이 사람을 폭행해 숨지게한 다음 암매장한 사건이 불거져 시작됐다. 정부는 형제복지원이 울산에 국한된 것으로 덮고 넘어가려 했으나, 1986년 사냥을 나갔던 김용원 검사가 부산 형제복지원을 발견하면서 대대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김용원 검사는 박인근 원장을 구속한 다음날 김주호 부산시장에게 박 원장을 빨리 석방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김 검사가 청탁을 거절하자 김 시장은 중앙정부에 사건을 왜곡 보고하여 수사를 방해했다. 박 원장에게 주어진 처벌은 징역 2년 6개월에 불과했고 짧은 형기를 마친 박 원장은 사회로 복귀했다. 박 원장의 측근들은 재육원, 욥의 마을, 느헤미야 법인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계속해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해결이 미흡했다는 사실은 한종선 씨의 국회 앞 1인 시위를 통해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은 복지시설 수용자에 대한 국가폭력 근절의 첫걸음

  한종선 씨의 증언집 ≪살아남은 아이들≫ 출간 이후 형제복지원 사건이 조명되면서 2013년에는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추진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2014년에는 진선미 의원이 ‘내무부 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특별법 초안은 피해생존자와의 합의 없이 마련됐고 제시된 보상기준은 당사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피해생존자 대다수가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수천만 원대의 보상금이 지급될 경우 이들은 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된다. 평생 생계유지와 병원비에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보상금 수령이 이들에게는 오히려 손해인 셈이다. 이후 특별법은 피해생존자들과의 합의를 거쳐 수정·보완됐고 2016년 진선미 의원에 의해 다시 발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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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일째를 맞은 농성장에서 한종선 씨와 최승우 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특별법은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반대 측에서는 이 사건이 2005년 말부터 추진해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으로 처리할 수 있었던 사건이므로 단독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의 일방적인 퇴소 조치 이후 각자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피해자들은 자신이 과거사법 대상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피해자들이 사건을 공론화시키고 보니 과거사법 신청기간은 지나있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아직도 왜 국가가 그들을 부랑인으로 만들었는지 듣지 못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은 피해당사자뿐 아니라 복지시설에서 반복되는 국가폭력 근절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부랑인 보호시설은 부산 형제복지원 외에도 대전 성지원, 인천 삼영원, 해남 희망원, 수원 성혜원, 서울 경생원 등 전국에 설치됐다. 참혹한 인권유린의 실상은 ‘형제’, ‘복지’, ‘희망’ 등 따뜻한 이름으로 가려졌다. 2016년 드러난 대구희망원의 인권유린과 비리 사건은 형제복지원 사건과 몹시 닮아있다. 복지시설이 여전히 국가폭력에 취약한 이유는 과거의 문제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는 이유다. 피해생존자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상처가 “박물관에 걸려있는 박제된 유물”이 아닌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위한 거름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이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와 증언자로, 이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