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호 > 사회
가장 중요한 건 다시 일어서는 것 척수장애인, 일상홈 프로그램에서 자립을 준비하다
등록일 2018.09.08 09:50l최종 업데이트 2018.09.10 23:05l 정명훈 기자(jmhoon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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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살겠습니다!” 지난 8월 3일, 한국척수장애인협회의 ‘일상홈 프로그램’ 수료식에서 수료생 김형회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 씨는 2016년 6월 경추가 골절되는 사고로 겨드랑이 밑으로 감각을 잃은 척수장애인이다. 척수장애는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뇌와 신체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인 척수가 손상돼 발생하는 장애다. 대부분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중도장애기도 하다. 김 씨는 지난 7월 다른 척수장애인의 소개로 일상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일상홈 프로그램은 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 척수장애인에게 제공하는 사회복귀 교육이다. 프로그램에서는 척수장애 당사자인 멘토와 멘티가 4주 동안 함께 생활하며 사회복귀를 준비한다. 그는 “한 달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샤워, 외출, 운전 등을 혼자서 할 수 있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순간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후 사람 많은 곳을 피하던 그였지만 멘토와 함께 영화관, 놀이동산 등 공공장소를 이용하며 자립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척수장애인에게 자립이란 무엇이고, 이들의 자립에 우리 사회는 얼마나 열려 있을까. 김형회 씨의 다음 기수로 입소한 문희은(가명) 교육생의 일상홈 프로그램에 동행하며 척수장애인의 자립을 기록했다.


오늘도 자립을 준비하는 척수장애인 

  지난 8월 13일 여의도의 한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뒷모습 위주로 촬영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느냐”는 물음에 “네, 괜찮아요”라고 답하던 문희은 씨는 기자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40여 년을 비장애인으로 살아오다 척수를 다쳐 중도장애를 갖게 된 문 씨에게 기자가 든 카메라는 부담스러운 시선이었을 터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앞에는 일상생활 훈련에 필요한 자동차가 준비돼 있었다.

  이날 첫 번째 교육은 차량 트랜스퍼였다. 트랜스퍼란 휠체어에서 자동차, 침대, 변기 등으로 이동하는 행위다. 하지마비를 가진 척수장애인은 팔의 힘만으로 몸을 이동해야 한다. 휠체어를 운전석 옆에 고정한 뒤 한쪽 손으로는 휠체어 손잡이를, 반대쪽 손으로는 운전석 시트를 힘껏 밀어 몸을 들어 올려 이동하는 식이다. “아직 미숙한 희은 씨에게는 휠체어와 운전석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넓게 느껴질 거예요.” 멘토 김민지(가명) 씨가 말했다. 운전석으로 몸을 이동하던 중 문희은 씨의 다리가 휠체어 발판에서 떨어져 힘없이 쳐졌다. 감각이 없는 하지 부위를 ‘짐덩이’라고 부르는 그는 “요즘 이 짐덩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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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은 씨가 차량 트랜스퍼를 연습하고 있다.



  비장애인이 3초면 할 일에 문희은 씨는 2분 50초가 걸렸다. 그래도 민지 씨는 희은 씨의 차량 트랜스퍼가 처음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요령이 부족한 교육 초반에는 교육생들의 몸에 무리가 오기도 한다. 희은 씨의 손목에도 파스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4주차가 되면 교육생들은 운전석에 올라타 휠체어를 조수석으로 옮기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다. 

  다음 날 오전 10시, 구로역 부근에 위치한 일상홈 숙소에는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두 사람이 휠체어를 밀며 부드럽게 이동하는 모습이 활기를 더했다. 일상홈 숙소는 휠체어 위에서 생활하는 척수장애인에 맞춰 개조됐다. 턱은 출입구 쪽의 신발장과 거실을 구분하는 0.5cm 남짓한 부분이 전부였다. 화장실 문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문은 미닫이였고 문턱도 없었다. 휠체어에서 이동하기 용이하도록 무릎 높이의 침대를 사용했고 의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 한 곳에 정리돼 있었다. 문희은 씨는 “이것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죠?”라며 싱크대 밑 수납장 문을 열었다. 수납장 문 안쪽을 빈 공간으로 남겨 휠체어가 들어가도록 개조된 싱크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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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홈에는 문턱이 없는 여닫이 문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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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가 들어가도록 개조된 싱크대



  이날 문희은 씨는 침대 트랜스퍼를 연습했다. 침대와 휠체어 사이의 간격이 넓지 않기 때문에 차량에 비해 침대 트랜스퍼는 수월한 편이다. 문 씨는 주먹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몸을 들어 침대로 이동했다. 몸을 옮긴 뒤에는 손으로 무릎을 굽혀 다리를 제자리에 놓았다. 침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관절이 일시적으로 굳어 다리가 떨리고 경직되기도 했지만 안정을 취하자 금세 진정됐다. 김민지 씨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세와 휠체어 고정 각도를 잡아주고 몸을 뒤로 빼는 방법도 가르쳐줬지만 이제는 잘하신다”며 빠르게 적응한 멘티를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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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은 씨가 휄체어에서 침대로 이동하고 있다.



  일상홈에서 잦은 바닥 청소는 필수다. 실외에서 탄 휠체어를 집에서도 이용해 바닥에 얼룩이 쉽게 생기는 탓이다. 막대걸레를 잡은 문희은 씨가 휠체어를 밀기 힘들어하자 김민지 씨는 다리 사이에 막대를 고정시킨 채 두 팔로 휠체어를 미는 법을 알려줬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에는 분무기로 물을 뿌려 힘을 줘 닦아냈다. “똑같이 휠체어 위에서 청소하지만 멘토님이 지나간 자리는 깨끗하고 제가 닦은 부분은 왠지 더러워 보인다”며 희은 씨가 웃었다. 


척수장애인 자립 지원의 황무지

  문희은 씨는 재작년 12월 척수장애인이 된 후 19개월을 병원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머무는 동안 ‘재활’은 배웠어도 ‘자립’을 배우지는 못했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근력운동 위주의 재활 프로그램만으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익힐 수 없었다. 병원에서 2년 2개월을 보낸 수료생 김형회 씨도 같은 문제에 봉착했었다. 그는 국립재활원의 재활 프로그램을 따로 신청해 찾아갔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몇 가지 기술을 한두 번 체험하는 수준에 불과했고, 전반적으로 비장애인의 시선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비장애인인 물리치료사나 작업치료사들은 척수장애를 이해하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는 듯했다”며 “이들이 알려주는 ‘이론’은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척수장애인의 또 다른 이름은 ‘재활난민’이다. 혼자 생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여러 병원을 거쳐 장기간 입원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2015년 척수장애인 욕구 및 실태조사 보고서(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 따르면 한국에서 척수장애인 한 명이 거쳐가는 병원 수는 평균 3.16곳이며 많게는 10곳이다. 평균 입원치료 기간은 약 30개월에 달한다. 부산 소재 재활병원의 이지혜 사회복지사는 “집에서는 가족의 도움을 받거나 혼자 생활해야 하지만, 병원에는 편리한 시설과 간호사의 생활보조가 있어 편하다”며 입원기간이 긴 이유를 설명했다. 

  척수장애인의 자립과 동떨어진 한국 의료체계와 달리 외국의 의료 체계는 신속한 재활과 사회복귀에 중점을 둔다. 스웨덴에서 척수장애인은 척수 전문 병동, 사회복귀를 훈련하는 재활센터, 사후관리 및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자립생활센터 등 3가지 기관을 거친다. 뉴질랜드에서는 척수장애인 재활병동이 별도로 운영되며 수술 직후부터 개인별 맞춤형 사회복귀 계획이 세워진다. 퇴원 전 마지막 4주 동안에는 일상생활을 연습하는 호스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이를 참고해 일상홈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척수장애인이 사회로 복귀하는 데 하지마비의 경우 3~4개월, 사지마비인 경우에는 6~7개월이 소요된다. 우리나라 척수장애인의 평균 입원치료 기간인 약 30개월은 치료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해서도, 그 기간 동안 체계적인 재활치료가 이뤄져서도 아니다.
  
  우리나라 척수장애인들이 여러 병원을 ‘탐방’하는 재활난민이 되는 원인은 의료수가 문제와 결부돼 있다. 의료수가란 의료행위에 대해 환자가 내는 본인부담금과 건강보험공단에서 지급하는 급여비의 합이다. 트랜스퍼 등 척수장애인의 자립에 필요한 재활 프로그램은 의료수가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병원에서 차량 트랜스퍼, 야외활동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더라도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할뿐더러 환자의 입원비에 비용을 포함해 청구할 수도 없다. 프로그램 진행에 따른 부대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병원 측이 수익 감소를 감내하면서까지 의료수가 항목에서 제외된 의료행위를 할 이유는 없다. 대다수 병원의 재활 프로그램이 근력운동에 그치는 이유다. 이지혜 사회복지사는 “척수장애인 가운데 건강을 충분히 회복하신 분이 많지만, 집에서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을 병원에서 배우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의료수가가 감소하기도 한다. 의료수가의 변화 여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장기 입원 척수장애인의 건강상태를 개별 심사해 결정한다. 수술 및 치료가 필요한 급성기가 지난 척수장애인의 입원은 대개 치료보다는 생활과 요양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입원’이다. 사회적 입원기간이 늘어나면 의료수가는 줄어들고, 이는 병원의 수익 감소로 이어진다. 이에 일반적으로 대학병원은 3개월, 병원급인 재활병원에서는 6개월의 입원기간 제한을 둔다. 입원 기한이 만료되면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척수장애인을 재활난민으로 내몬다.

  그렇다면 척수장애인의 재활프로그램을 법률로서 보장할 수는 없을까? 장애인복지법 제35조에 따르면 국가와 지자체는 장애 유형과 정도별로 재활 및 자립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발달장애인은 이에 따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국가의 자립 지원을 보장받고 있다. 하지만 척수장애인에 대한 법률적 지원에 필요한 근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장애 유형은 장애인복지법상 15개의 소분류로 나뉜다. 척수장애는 15가지 소분류 가운데 하나인 지체장애에 포함돼있을 뿐 장애 유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다. 

  척수장애가 유형 분리돼있지 않으면 척수장애인 대상의 통계조사 등 법적 근거 마련이 어려워 정책 제정이 힘들다. 2010년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척수장애인의 사회복귀에 필요한 능력 개발, 직업 연계 등을 위한 한국척수센터 예비타당성조사를 신청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기각됐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척수장애 유형 분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척수재활연구소 이승일 부장은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서는 다른 장애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척수장애의 유형 분리를 반대한다”며 유형 분리를 위해서는 장애계 안에서의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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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청소하는 희은 씨



황무지에 심어진 씨앗, 일상홈 프로그램

  척수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에서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2014년부터 일상홈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학생은 학생으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 각자 장애 이전의 위치로 돌아가는 사회복귀가 일상홈 프로그램의 궁극적 목표다. 
  
  이승일 부장은 사회로 복귀하는 척수장애인이 많아져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뤄지길 바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지역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려 사는 날이 오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줄고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는 확대될 겁니다.” 일상홈 프로그램에서 자립의 씨앗을 품고 나간 이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2016년 일상홈 프로그램 수료생이기도 한 멘토 김민지 씨는 평소에는 사무직 업무를 겸하며 장애인식개선 교육 강사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나아가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문희은 씨는 일상홈 퇴소 후 일을 하며 소아마비 장애인을 도울 계획이다. 중도장애를 가진 그는 “일상홈 프로그램을 거치며 어려서부터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수료생 김형회 씨 역시 일상홈 멘토가 자신에게 그랬듯 누군가의 길잡이가 돼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망한다.

  이제껏 자립의 황무지에 땅을 일궈 씨앗을 뿌린 건 척수장애인 당사자들의 ‘작은 사회’였다. 이제 사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차례다. ‘큰 사회’는 자립의 씨앗이 가진 싹을 틔워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