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호 > 사회
장애등급제 폐지, 끝이 아닌 시작 장애인의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 변화 요구돼
등록일 2019.02.25 15:40l최종 업데이트 2019.02.27 17:54l 최재혁 기자(coliu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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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및 활동가들은 수년에 걸쳐 장애등급제의 폐지를 주장해왔다.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인을 ‘구분’ 지으면서 정작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는 미흡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장애인 단체들의 주장을 수용해 올해 7월부터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지난 1월 30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장애등급제의 ‘진짜’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이 왜 아직도 폐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지 짚어봤다.


"장애등급제는 하나의 제도가 아니다"

  전장연 조현수 활동가는 장애등급제가 정립된 시점으로 1989년을 든다. 기존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인복지법으로 전면 개정돼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 시행의 발판이 마련된 시기다. 장애등급제는 이 과정에서 장애인 감면·할인제도와 같은 정책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으로 도입됐다. 장애 정도에 차등을 둠으로써 더 중증의 장애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자는 논리였다. 조현수 활동가는 이후 장애인 정책들이 장애등급제를 기반으로 설계됐다는 점에서 “장애인 정책과 관련된 총체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장애등급제”라고 설명했다.

  장애등급제의 논리는 장애 개념이 의학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환경적 측면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기존의 장애 개념은 비장애인에 비해 어떤 신체적 능력이 부족한지에 따라서만 정의됐다. 반면 2008년 한국 역시 비준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전문은 “장애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개념이며 (중략) 환경적인 장벽 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신체상으론 동일한 장애가 있더라도 주변 환경의 개선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들은 장애인의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등급에만 의존해 일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애등급제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다.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김강원 실장은 “장애등급제는 철저히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라며 “등급 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의 선택권과 결정권은 고려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등급’ 개념만 없앤 정부 개편안

  정부는 지난해 3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모든 장애인 정책에서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올해 7월에는 ▲활동지원서비스 ▲응급안전·야간순회서비스 ▲보조기기 ▲신규시설 입소 4개 영역에서만 장애등급제가 폐지된다. 장애 수준은 1~6급으로 구분되는 기존의 등급제와 달리 중증·경증으로 이원화된다. 활동지원서비스의 경우, 구체적으로 지원 수준을 결정짓는 기준은 종합조사표다. 기초조사와 욕구조사, 서비스 필요도 평가로 구성된 종합조사표를 통해 장애인의 복지 욕구까지 조사함으로써 신체적 장애 정도를 판단하는 데 그쳤던 장애등급제의 단점을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김강원 실장은 정부 개편안에 대해 “정부는 애초 중증·경증 이원화를 거치지 않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공언했다”고 지적했다. 이원화 체계는 사실상 기존 6개 등급이 중증·경증이라는 2개 등급으로 바뀐 것에 불과해 장애등급제 폐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다. 오히려 등급이 간소화되면서 기존에 세분화돼 제공된 서비스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등급제를 대체할 종합조사표 역시 ‘옷을 입을 수 있습니까?’와 같이 개인의 신체적인 능력을 묻는 단순한 질문으로 구성돼 장애인의 필요를 충분히 반영하기엔 한계가 있다. 조현수 활동가는 “시각장애인들이 갈아입을 옷이 어디 걸려 있는지 아는 상태와 모르는 상태에서 옷을 입을 수 있는지는 다르지 않냐”며 종합조사표가 여전히 장애를 의학적 관점으로만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24시간 활동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개편안의 문제로 남아 있다. 종합조사표상 이론적으로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은 최대 16시간이다. 정부는 그 외 시간은 응급안전 및 야간순회서비스가 보완해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중증장애인의 집에 경보기를 설치하거나 심야 시간에도 활동지원사가 장애인을 방문해서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제도다. 이에 대해 조현수 활동가는 “불이 나면 일단 뛰쳐나와야 하는데, 언제 신고하고 기다리겠나”라며 초동대처가 불가능한 해당 제도들은 24시간 활동지원의 대체제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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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30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예산 확대 없는 장애등급제 폐지는 무의미

  김강원 실장은 “예산과 서비스 총량의 변화가 없다면 (장애등급제 폐지에 따른) 실질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며 예산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예산이 늘어 서비스 적용 범위가 확대되지 않는다면, 결국 등급이 없어진다 해도 한정된 서비스를 분배하는 당국의 기준이 장애인의 필요보다 우선순위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장연을 비롯한 장애인 단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해 9월부터 시위를 통해 예산 확대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이미 통과된 올해 예산안에서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국제수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의 장애인 관련 예산은 OECD 평균 대비 1/4에서 1/5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는 올해 예산안이 전년에 비해 약 5천억 원 가량 증가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의지는 엿보이지만, 여전히 OECD 평균 대비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깨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복지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지원제도는 미진한 예산 확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활동지원제도 예산은 전년 6,900억 원에서 약 1조 원 정도로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장애인 관련 예산 전체 중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문제는 실질적인 인상분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서비스 수가에 최저임금 인상률을 반영했을 뿐, 예산 산출근거인 장애인 1인당 예상 평균 서비스 이용시간은 109시간으로 동일하다. 결국 예산은 확대됐지만 장애인의 서비스 이용 시간 증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활동지원제도 다음으로 예산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애인연금제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장애인연금은 장애등급 1·2급과, 3급 장애유형 외에 다른 유형의 장애가 하나 이상 있는 ‘중복 3급’만을 대상으로 한다. 전장연을 비롯한 장애인 단체들은 이 적용 범위를 우선 3급 일반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올해 예산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조현수 활동가는 “2022년에 가서야 소득·고용 영역에서 등급제를 폐지하겠다는데, 지금도 예산 확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책 추진력이 약한 대통령 임기 말에 그것이 가능할 지 의문”이라며 정부의 소극적인 예산 확대를 꼬집었다.

  예산의 더딘 증가뿐 아니라 예산의 구성도 문제로 제기된다. 예산안 중 ‘신규시설 입소’가 여전히 복지 정책으로 취급돼 5천억 원 가량의 예산을 할당받은 것이 한 예다. 이는 기존 시설들의 지속적 운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설을 벗어나 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을 강조해 온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항목이다. 이에 대해 장애인 단체들은 신규시설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장애인 탈시설 지원금·범죄 발생시설 폐쇄 등 탈시설 관련 예산을 적극 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예산안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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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기관 지원방식과 수요자 지원방식 ©보건복지부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홈페이지



장애인을 지역사회로 통합하려는 관점 필요해

  장애등급제 폐지가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앞으로 어떤 방향의 예산 확대가 필요할까. 김예원 변호사는 무엇보다 “장애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령 활동지원서비스는 현재 이용자에게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도로 공급기관 중심 지원에서 탈피해 전자바우처를 통한 수요자 지원방식으로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센터와의 계약이 몇 년 단위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센터가 고용한 활동지원사와의 관계 역시 지속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김예원 변호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복지정책을 통해 실제로 혜택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실태조사를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조현수 활동가 역시 “스웨덴의 경우는 당사자의 의견을 고려해 서비스의 양을 결정짓는 과정에 일선 공무원이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며 당사자와 일선 공무원 등 현장의 권한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나아가 장애인 복지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장애인 정책에 대해 조현수 활동가는 “정부가 여전히 장애인을 ‘위해준다’는 시혜적·동정적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며 정부의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의학적 관점에만 의거해 장애인이 단순히 ‘죽지 않고’ 살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지역사회 내에서 의미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등급제 폐지는 결국 독립적인 변화가 아니라, 발달장애인의 주간활동 보장 등 장애계의 다른 주장들을 포괄하는 움직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어느날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변화가 아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비준에 따라 협약 내용의 이행 정도를 평가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의 2014년 심의 보고서 권고사항에는 “모든 장애인에게 필요에 따라 복지서비스와 활동지원서비스가 확대될 수 있도록 당사국의 장애등급제 개정 여부 및 그 방식”을 개선하라는 항목이 존재한다. 단지 ‘등급’이라는 용어를 삭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예산 확대를 통한 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으로 이어질 때 장애등급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