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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리터의 물로 버텨낸 하루 1000일 넘게 투쟁 중인 기륭전자 동조 단식에 참여하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양정숙 기자 (dorothyv@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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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전자 앞 농성장에 세워진 고 권명희 씨의 빈소.


기륭전자? 이건 뭐 먹는 건가? 08학번 새내기로 입학해 중도 터널을 지나면서 본 자보 위의 저 네 글자는 솔직히 내게 이런 인상을 줬다. 6월의 어느 날,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투쟁은 1000일을 맞았고 이때쯤 나는 이들의 긴 투쟁에 대해 알게 됐다. 노조원들은 단식을 시작했다고 했지만 단식이라고 해서 아예 아무 것도 안 먹는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서 이때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2학기가 시작된 후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단식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됐다. 인간의 본능인 식욕을 거슬러 90일 넘게 곡기를 끊었단다.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과 효소도 거부한다고 했다. 순간 “아 이러다 사람 하나 죽겠구나”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 지경까지 내몰았을까?

사람답게 살 권리를 위한 3년의 싸움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이 2차 삭발을 거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륭전자 노동자의 투쟁은 2005년에 고용 안정을 위한 정규직화를 목적으로 시작됐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고용 안정을 이루기 위한 일환으로 기륭전자의 불법파견 실태와 관련해 노동부에 진정을 냈고, 결국 기륭전자 측의 불법파견이 인정됐다. 그러나 불법파견 건이 심사에 오른 도중에 기륭전자는 계약일 만료를 이유로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노동부가 공문을 보내 “일체의 고용불한 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으나 계약 해지는 계속됐다. 노동자들은 기륭전자 측에 직접고용의 형태가 아닌 외주업체에 의한 파견직 형태였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해고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해직당한 32명의 노조원들이 회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현재는 생계유지를 위해 투쟁과 일을 병행하는 노조원을 제외한 10명의 노조원들이 전면에서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단식은 2008년 5월 구로역 CCTV 철탑에 올라 벌인 두 번의 고공 농성 과정에서 일어난 사측과의 협상 결렬이 발단이 됐다. 고공 농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기륭전자 사측과 노조 간의 협상이 진척을 이루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직접 고용 및 고용 1년 뒤 정규직 전환을 협상안으로 제시했던 사측이 사원의 대부분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협상안을 철회했고 협상은 결렬됐다. 기륭전자 분회의 연대 담당인 유흥희 씨는 “두 차례의 고공농성과 단식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여전히 전 조합원들의 목숨을 요구한다고 생각돼 끝장단식을 시작하게 됐다”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후 기륭전자 분회 김소연 분회장과 유 씨는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단식을 이어갔고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55일 째 되는 날부터는 기륭전자 전 조합원의 단식 농성의 뜻에 동감한 네티즌연대와 금속노조 연맹원이 동조단식을 시작했고 그 뒤로 많은 일반인들이 단식에 참가했다. 단식 67일 째에는 노조원과 금속노조 관계자들의 설득으로 김 씨와 유 씨가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이후 김 씨는 다시 단식 투쟁에 복귀했다.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소금과 효소마저 거부한 채 단식하던 김 씨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고 단식 94일 째 조합원들은 본인과의 상의 없이 김 씨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한편 9월 17일까지 대학생 릴레이 단식이 진행됐고 개강 이후에는 수업으로 인해 학생들의 참여가 어려워지자 자율 단식이라는 형식으로 시스템이 바뀌게 됐다. 일반인의 동조 단식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9월 25일 권명희 노조원이 노조 투쟁 과정에서 발병한 암으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사측은 “권 씨의 죽음을 언론플레이하는 데 사용하지 말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또한 사측은 2005년에 해고한 32명의 조합원 가운데 전면투쟁하고 있는 10명의 조합원에게만, 2차하청 즉 간접 고용의 형태인 1년짜리 계약직을 제시했고 지난 3년간의 임금에 대해서는 지불할 수 없다며 기륭전자 노조 측에 공문을 보내 이에 대한 노조의 최종 입장을 밝히라고 했다고 한다. 유흥희 씨는 “우리의 투쟁은 처음부터 정규직화 보장과 직접고용을 위한 것이었는데 사측은 이조차도 무시하고 있다”며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리터의 물로 버텨낸 하루의 시작, 학교에서

유흥희 씨를 만나 기륭전자 노조원의 투쟁 역사를 들으면서, 유흥희 씨를 만나고 나서, 나는 과연 ‘우리 사회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유흥희 씨는 “단식 투쟁이란 행위는 결코 좋은 상황에서 나오는 방안이 아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고 몰려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을 떠올리니 역시 아닌 것 같았다. 이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도 기륭전자 노조원의 권리 쟁취, 아니 비단 노조원의 권리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정당한 것,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을 지지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일일 자율 단식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집에서 통학하는 내게 어머니께서는 일찍 일어나 늘 아침상을 차려주신다. 단식에 참여한 날 내가 오늘은 아침상 차리시지 않아도 된다며 그 사정에 대해 설명해드렸다. 어머니께서는 “한 끼 굶어도 사람이 맥을 못 추지 않느냐”고 하시며 나를 극구 말리셨다. 순간 94일 간 단식했던 기륭전자 노조원이 떠올랐다. 이들의 주변사람들은 단식 노조원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 졸이고 걱정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설득시키고 나는 지하철로 향했다. 내 앞에 앉으신 아주머니 두 분이 권명희 씨가 돌아가신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회사에서도 언제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만이 겪는 경쟁. 이건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돼 안타까웠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물 한 병을 샀다. 최소한의 음식물 섭취를 위해 물 한 모금도 꼭꼭 씹어 조금씩 마셨다. 정말 배고플 때 한 모금씩 물을 마시니 허기가 좀 가시는 듯 했다. 첫 번째 수업을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식사를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단식 중이라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내 말에 한 친구는 “네가 그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냐”며 내게 물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처음 내가 생각했던 사회 정의 실천이라는 말은 흐릿했고 거창하기만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조원의 고통을 100분의 1, 아니 10000분의 1이라도 공유해보고자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부러 기회를 내지 않으면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알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도망치듯 편집실로 올라왔다. 편집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나는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물병을 비웠다.
막걸리와 파전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 수업을 가기 직전 500ml 물 한 병을 비우고 새 물을 받았다. 수업 시간 내내 배가 고파서 교수님의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시계만 계속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오히려 밥을 먹지 않고 수업을 듣는 것이 밥을 먹고 수업을 듣는 것 보다 훨씬 더 졸린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촛불문화제로 향하는 내게 학관 앞 장터의 향긋한(?) 막걸리와 파전 냄새는 너무나 잔인했다. 쓰린 속을 다시 물 한 모금으로 달래고 교문을 나섰다.

1리터의 물로 버텨낸 하루의 마무리, 촛불문화제
기륭전자가 있다는 독산역에 도착했다. ‘약도까지 뽑아왔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라는 내 생각은 1분도 안 돼 산산조각 났다. 터줏대감같이 보이는 구멍가게에 기륭전자가 어디냐 물으니 그런 곳을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약도를 보더니 기륭전자가 아닌 그 주변의 다른 상호를 보고서야 걸어서 가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택시를 타서 기륭전자로 가자고 했다. 어찌 보면 인간 네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택시기사는 내게 기륭전자가 어디냐고 반문했다. 똑같은 과정이 세 번이나 반복됐고 마지막 택시에서 네비게이션으로 검색해서 겨우 기륭전자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한 동네 사람들이 1000일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기륭전자의 투쟁, 심지어 기륭전자의 존재 자체를 모를 수가 있는지 의아했다.
문화제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서 노조원들은 저녁식사 중이었다. 얼마 뒤 성공회대 역사철학동아리 부원들과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의 이랜드 노조원들, 그리고 개인 참가자들이 속속 도착했다. 옹기종기 앉아있는 문화제 참가자들에게 다가가 봤다. 성공회대 역사철학동아리 임지민 씨는 자신은 1학년이라 참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동아리 차원에서는 2005년부터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위에 참여해왔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교가 가까운 편이라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3보1배나 동조 단식에 참여해왔다고 한다. 이랜드 시흥분회에서 온 김영순 조합원은 “자본주의 사회에 오면서 돈을 사람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김 씨는 “이랜드(노조)가 지더라도 기륭(노조)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청소년의 시각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문희수 씨.

멋진 율동을 보여주고 있는 이화여대 율동패 ‘투혼’.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문희수 씨의 발언으로 문화제가 시작됐다.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에 대학생인가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18세의 청소년이라고 했다. 문 씨는 블로그 검색을 통해 기륭전자에 대해 알게 됐다고 했다. 문 씨 역시 나처럼 “사람이 자발적으로 밥을 거부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단식에 참여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어 문 씨는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내 친구가 최저임금보다 10원 더 받았던 기륭전자 노동자들 보다 더 번다”며 사측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똑부러지는 연설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겪은 현실에서 시작된 문 씨의 의견은 그 어느 연사의 말보다 강력한 힘이 있었다. 문 씨의 발언을 보면서 그저 나만을 위해 공부했던 내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라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어 이화여대 율동패 ‘투혼’이 연단에 섰다. ‘투혼’은 혼성으로 이뤄진 서울대의 ‘골패’와는 다른 느낌의 안무를 선보였다. 공연을 마치고 그녀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끝까지 연대하자”며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기륭 노조원이 전국여성노동조합 대구경북지부에서 보내온 현수막과 편지를 읽었고, 민중가요 가수인 이수진 씨가 멋진 노래를 들려줬다.
사람을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가르지 않는,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문화제를 쫓아가면서 나는 문득 내가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륭전자 앞에 도착한 이후 나는 이수진 씨가 말한 대로 “21세기 노동운동의 아이콘”을 통해 대한민국 비정규직의 배고픔, 그 어려움 속에 동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배가 고픈 대신 목이 탔다. 사람답게 살 권리, 행복할 권리에 대한 갈증.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단비가 내려 이 갈증을 가시게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