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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북아 현실에서 탈민족은 위험한 발상” 미완의 귀향, 그리고 4년… 송두율, 한국사회에 말을 걸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베를린 = 정원일 기자 (jwi82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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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이력이 매우 독특하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사회학으로 교수자격을 얻었다. 이후에는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서울대에서 철학과 학부과정을 밟고 있었던 60년대 한국에서는 철학을 공부한다면 으레 헤겔이나 칸트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철학이 사회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현실이 철학적으로 조명되는 학문체계가 없었다. 나는 이에 대해 곧장 불만을 가졌다. 67년 독일로 건너와 보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학과 철학의 접합을 시도하고 있더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인 하버마스 교수 문하에 있게 되면서 철학과 사회학, 경제사 등을 아우르는 폭넓은 공부를 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와 제3세계에 대한 관심, 사회 변혁운동에 대한 관심 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나만의 철학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해 왔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일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4년 만에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나니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당시는 학문의 자유가 억압받던 유신치하였다. 많은 학자들, 학생들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시절 아닌가.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돌아갈 수 없어서 독일에 계속 남기로 했다. 그래도 비록 외국 하늘 아래서지만 군부독재에 대해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필요도 있었고, 국내에서 고생하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성도 느껴서 서독에 민주사회건설협의회가 만들어졌을 때 초대의장을 맡았다. 그 이후로 군사정권과 굉장히 불편한 관계가 지속됐다. 민주화 이후인 91년에도 서울대에서 나를 초빙교수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안기부가 방해해서 못 갔다.



2003년 고국 방문 때 굉장히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졌다.
출발은 좋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 형식으로 나를 초청했고, 부푼 꿈을 안고 근 40년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사건이 그렇게 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의 소동을 이렇게 이해한다. 당시 보수우파는 노무현 정권의 탄생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출된 대통령의 목을 곧장 칠 수는 없으니 유신 때부터 반독재민주화투쟁의 핵심인물이었던 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보수우파’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을 지칭하는 말인가?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여론을 오도하는 세력들과 한나라당, 일부 관료세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재판정에서 입을 열기도 전에 언론에 의한 사실상의 재판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건을 부풀렸고, 일부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글로 선동했다. 참으로 창피스럽고 흉칙한 사건이었다.

‘경계인’이라는 말이 굉장히 유행했다. 스스로 ‘양쪽의 경계를 모두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지만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회색분자’ 쯤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독일에서는 ‘경계인(Grnzgnger)’이라는 말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쓰인다.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제3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경계’라는 것이 매우 좁은 영역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큰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는 김지하 시인이 자주 쓰는 ‘틈’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숨길이 트이는 그 공간을 통해서 양쪽의 완고한 벽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생소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을 테고,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 정도로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된 것 같다.

굳이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교수님의 북한노동당 입당 사실이 ‘경계인’으로서의 지위를 자임해온 스스로의 ‘자기정합성’을 허물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교수신문에 한신대 윤평중 교수가 기고한 칼럼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는데.
68혁명의 격동 속에서 당시에 사회주의는 중요한 연구대상이었다. 중국, 쿠바, 알바니아, 북한 네 나라가 흥미로운 연구대상이었고 서독사람들에게 대안처럼 받아들여졌다. 내 친구들은 북한도 가고 쿠바도 갔지만 나는 명색이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합법적인 틀 안에서는 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더군다나 분단된 조국의 반쪽 땅인데. 그 당시 상황에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정말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때 북한에 입국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로 노동당 입당 원서를 썼다. 이거 안 하면 못 들어간다는데 그럼 어떻게 하나. 정말 형식적인 서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노동당에 당비를 냈나, 북한에 눌러 살기라도 했나. 어떤 측면에서는 고도의 지적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노동당 입당 사실은 국정원 조사 때 처음 확인됐다. 그동안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킨 이유에 대해서는 해명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그 시절이 어떤 상황이었는데,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하겠는가? 나중에 자서전에 쓸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내 교수자격 논문도 소련과 중국 연구였는데, 그걸 유신 때 떠들 수가 있었겠나. 아니면 5공 때? 결국 군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김대중 정부 때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비밀요원들에게 납치돼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나.



남북통일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연구와 저술활동을 해 왔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라며 과정을 강조했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의 고향’을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독일통일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서로 수없이 만났고, 물자도 쉴 새 없이 오갔다. 동서독 학생들이 서로의 나라로 수학여행을 갔다 오는 것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기회가 있었기에 서로를 좀 더 잘 알 수 있었고, 내 속에 ‘타자’가 들어올 수 있다는 관념도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남북화해협력이 상당히 진척됐고, 이제는 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면에서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다. 이것이 점차 확대되면 그게 통일되는 거다. 한 쪽이 한 쪽에 먹혀야만 통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통일하는 방법을 누가 가르쳐주는 건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과업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또한 정치, 경제 영역에서의 통일을 뛰어넘어 모든 갈등들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의 통일’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 통일된 지 거의 20년 째를 맞는 독일도 아직 정서적 통일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아 고생하고 있다.

탈민족주의 담론이 남한사회에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현 시점에서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통일문제를 고민하는 데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탈민족주의 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유럽적 현실을 너무 무리하게 동북아에 끼워 맞추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유럽은 수십여 개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지배권을 쥐고 있지 않다.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조합하는 가운데 힘의 균형 상태가 어느 정도 유지돼 오고 있다. 동질성 면에 있어서도 그렇다.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포도밭 노동자나 스웨덴의 고소득 공장노동자나 거의 같은 차원의 세계를 생각하고, 비슷한 복지를 누리고, 문화적 담론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언어장벽도 많이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는 어떤가? 전라도 촌부와 일본의 공장노동자가 같은 세계를 꿈꿀 수 있나? 중화주의와 일본주의의 각축장에서 바로 국경 없애고 민족 개념 없애면 어떻게 되겠나. 민족단위를 넘어,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17대 대선 결과에 대해 할 말씀이 많을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게 평가하듯이 경제이슈가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린 선거가 아니었나 싶다. 도덕이 밥 먹여주느냐 이거 아닌가. 일단 급하다고 짠 소금물 마신 격인데, 그러면 얼마 안 있어 더 큰 갈증이 오게 된다. 하버마스 교수도 나에게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해 굉장히 실망한다(enttuscht)고 편지를 보내왔다. 진보개혁세력이 그동안 그들의 이념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도 대선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깊은 우물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긴 동아줄이 필요한데, 줄이 짧다 보니 물을 긷지는 못하고 두레박에 몇 방울만 묻히고 만 거다. 선거 패배 이후 지금이 내부 역량을 키울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