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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드러나야 할, 그 경험의 얼룩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4개월, 3주…그리고 2일(2007)’
등록일 2016.12.13 15:54l최종 업데이트 2016.12.15 12:57l 김세영 기자(birdy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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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개월, 3주...그리고 2일’의 배경은 1987년 독재정권하의 루마니아다. 출산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낙태를 전면금지했던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불법적인 임신중절시술이 만연했다. 여대생 가비타 역시 불법 임신중절시술을 하게 된다. 시술 장소는 호텔, 시술자는 친구가 소개해 준 베베라는 남자다. 시술을 도와주기로 한 가비타의 룸메이트 오틸리아가 베베를 호텔로 데려온다.

  ‘자칫하면 모두 감방행’이라는 베베의 태도는 강압적이다. 협박에 가까운 진찰을 하는동안 그는 ‘4개월짜리 낙태’는 보통 일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신분증을 호텔에 맡긴 만큼, 이는 자신의 자유를 걸고 하는 일이라고도 덧붙인다. 가비타와 오틸리아는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돈 3천 레이를 내밀지만, 베베는 누가 3천 레이를 받고 감방 갈 각오를 하겠냐며 세상에는 공짜가 없단다. 두 사람은 일주일 안에 2천 레이를 더 마련해보겠다고 절박하게 매달린다. 하지만 베베는 말귀를 못알아먹는다면서 화를 낼 뿐이다.

  베베가 원하는 것은 결국 두 사람, 가비타와 오틸리아의 몸이다. 가비타는 죄를 지은 사람이 대가를 치르겠다며 오틸리아만은 건들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지만, 베베는 그건 자신의 조건과 다르다며 거절한다. 그의 말대로 급한 것은 가비타다. 이미 임신 4개월째다. 더 이상 시술을 미룰 수 없고, 불법을 저지르는 마당에 신고를 할 수도 없다. 요구했던 대로 두 사람 모두 ‘조건’을 만족시킨 후에야 베베는 느긋하게 시술 도구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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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타와 오틸리아는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 상처입은 몸을 씻어낸다. ⓒImdb


  그녀들을 유린한 남자는 동시에 유일한 구원자이기도 해서, 가비타는 베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 앞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 무력하게 묻는다. “주사를 맞나요?” “그 약은 뭔가요?” 철저하게 기울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차례로 화장실로 들어가 상처 입은 몸을 씻어내는 일, 친구의 울음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일, 서로의 수치스러움을 물소리로 가려주는 일. 그 정도.

  베베가 떠난 호텔 방 안에는 짙고 긴 침묵이 흐른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가비타는 겨우 ‘고마워’하고 속삭인다. 오틸리아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가비타가 원망스럽다. 왜 하필 이 남자에게 연락을 한 건지, 왜 3개월이 넘었는데 2개월이라고 속인 건지, 애초에 왜 이렇게 질질 끌었는지, 후회 섞인 질문이 이어진다. 그러나 베베가 신분증조차 찾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틸리아는 이 모든 질문이 무의미함을, 결국 이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는다. 베베는 법에 기대어 그녀들을 유린했다. 이 이중삼중의 인권유린의 숨은 가해자는, 국가다.


일상과 유리된 여성의 언어

  의사에게서, 국가에게서 버려진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누가 이 ‘범법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4개월, 3주…그리고 2일’의 시술 장면은 영화 ‘베라 드레이크’ 속 베라의 겁에 질린, 그러나 당당한 눈빛을 떠오르게 한다. 역시 낙태가 금지됐던 전후 영국, 파출부 베라는 남들 몰래 ‘곤경에 처한 여자들’을 도와주러 다닌다. 여자들의 집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이 ‘도움’은 20년 넘게 지속된다.

  불법 임신중절시술을 한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간 베라에게 심문관이 묻는다. “당신은 여자들이 ‘임신했을 때’, ‘아이를 없애는 일’을 한 것이 맞나요?” 베라는 대답한다. 나는 여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피를 흘리게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당신들은 낙태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그러나 법정에 선 베라는 흉악스러운 불법 시술을 한 중범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다.

  다른 언어다. 베라가 사용하는 것은 법정의 언어가 아니다. ‘생명의 고귀함’을 말하는 도덕의 언어도 아니다. 고통에 찬 현실의 언어다. 그것은 원치 않는 관계에서 생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의 울부짖음이다. 임신한 미혼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여자들의 한숨이고, 이미 일곱이 넘는 자식을 두고 또 아이를 낳을 수 없어 남편 몰래 자궁에 비눗물을 집어넣는 여인의 ‘살고자 함’이다. 그것은 여자들의 언어다.

  여자들의 언어는 법정에서도, 현실에서도 유리돼있다. 호텔을 나와 남자친구 어머니의 생일파티에 간 오틸리아는 시끌벅적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고립감을 느낀다. 지금 가비타에게 일어난 일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 그녀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오틸리아에게 남자친구는 ‘혹시 일이 생기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하지만, 그의 말은 무력하다. 결국 낙태가 일어나는 장소는 오틸리아의 몸일 것이고, 낙태라는 범법행위를 저질러야하는 것도 그녀이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의 말을 통해 오틸리아는 낙태가 철저하게 여성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뿐이다.


나는 한 번도 생명에 반대한 적이 없다

  호텔로 돌아온 오틸리아는 화장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핏덩어리를 발견한다. 벌써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핏덩어리를 수건에 싸서 호텔을 나서는 오틸리아의 등 뒤로, 가비타는 “잘 묻어줄 거지”하고 묻는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문을 나선 오틸리아는 결국 베베가 시킨대로 건물 꼭대기의 쓰레기통으로 달려간다. 수건에 쌓인 것은 아이가 아니라 빨리 없애버려야 할 범죄의 증거다. 가비타와 오틸리아는 ‘그것’과 작별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낙태죄는 여성을 ‘태아를 떨어뜨려 죽인 범죄자’로 만든다. 이러한 낙인은 임신중절을 하는 여성들의 삶을, 생명을 간과한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태아의 ‘생명’을 박탈한 여성은 그 순간 생명의 파괴자가 된다. 낙태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의 소규모 상영회 자리에서 한 여성은 자신의 낙태 경험을 고백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나는 내가 한 번도 생명에 반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낙태’라는 낙인은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준다. 스스로를, 서로를 비난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당연하게도, 낙태의 경험은 공유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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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시선의 흔적처럼, 낙태의 경험은 여성들에게 얼룩이 되어 남는다. 

ⓒImdb


  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핏덩어리를 버리고 돌아온 오틸리아는 가비타에게 말한다. “우리 이렇게 하자, 앞으로 이 일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돼지고기와 소고기로 만들었다는 음식을 시켜놓고 둘은 말없이 생수만 들이킨다. 창밖을 내다보는 오틸리아의 시선과 함께 영화는 급작스럽게 끝난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눈빛은 오래도록 관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시선의 흔적처럼, 낙태의 경험은 여성들에게얼룩이 되어 남는다. 그 경험은 ‘얘기를 꺼내지 않음으로써’ 지워지지만, 감정의 얼룩은 지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보듬어야 할 기억이다. 그리고 보듬기 위해서는 드러내야한다. 낙태를 특수한 상황으로 만드는, 그리하여 현실과 유리시키는 법의 언어로부터 그 경험을 되살려야한다. 경험의 얼룩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상처는 위로받을 수 있다. 낙태의 경험을 고백하기 전에 공소시효부터 확인해야하는 현실에서 드러내기의 과정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평범한 용기들이 모여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경험의 얼룩들이 모여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