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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등록일 2017.03.10 10:06l최종 업데이트 2017.03.10 19:51l 박윤경 기자(pyk94111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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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은 심장병으로 평생 성실히 해오던 목수 일을 그만 뒀다. 처음 겪는 ‘무직’의 상황에서 아직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질병수당을 신청했지만 정부가 고용한 ‘의료 전문가’는 매뉴얼만 읽어 나간다. 형식적인 질문과 무의미한 대답이 오가고, 결국 다니엘은 수령 자격 불충분 판정을 받는다. 항의하고자 문의전화를 걸어도(심지어 유료) 2시간은 기다려야 하고, 겨우 직원과 연결됐지만 이젠 또 구직수당을 신청하라는 답이 돌아온다. ‘윗선’들의 질병수당 재심사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일단은 구직수당을 신청해 당장의 살 길을 찾으라는 얘기다. 모든 행정처리에는 알고리즘이 있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 다음의 차선, 아니 차악을권한다. 소통이 부재한 언어의 향연.

  다니엘의 곁에는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증발돼버린 사람들이 있다. 다니엘의 이웃 청년 ‘차이나’는 중국 현지 노동자에게서 나이키 운동화를 밀수해 길거리에서 판매한다. 그는 이 운동화로 3파운드 79펜스의 일당을 받는 현재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복지과에서 우연히 만난 케이티는 두 아이와 함께 이사해온 싱글맘이다. 노숙자 쉼터를 전전하다 생면부지의 뉴캐슬까지 오게됐지만 여전히 생활은 어렵다. 아들 딜런은 정서적 스트레스로 인해 주의력결핍을 보이고 집에는 전기도 끊긴 상태다. 모두들 거친 풍랑을 맞으며 항해하고 있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한 줄기 바람’은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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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케이티를 다니엘이 달래고 있다. ⓒImdb



  행정처리의 알고리즘은 실상 촘촘하지 못한 그물망과 같아 다니엘과 케이티, 차이나는 무력하게 걸러지고 만다. 영화 중간 불쑥 나온 대사처럼 “빌어먹을 민영화”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복지는 시장에서의 가치를 그대로 수용한 듯 보인다. 개인의 ‘경제적 효용’만큼 복지를 받는 것이 온당한 사회에서 3파운드 79펜스의 일당을 받는 사람, 청소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 질병수당을 수령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존권과 존엄을 외치는 것은 종종 나태함과 무임승차로 해석된다.

  ‘무임승차자’의 몫으로 남겨진 복지제도란 결국 허울뿐인 알고리즘이다. 현실과 유리된 질문을 던지고 형식적인 답변을 수집해 내리는 판정에는, 당연하게도 소통은 증발하고 없다. 복지 혜택을 받을만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려는 언어는, 결과적으로 무능하다. 다니엘은 끊임없이 자신은 나태하지 않다고, 혹은 ‘무임승차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갖고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 구직수당을 수령하려면 구직활동을 하는 척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다니엘은 실제로는 병세 때문에 일하지도 못할 작업장에 찾아가 빈자리를 묻고 이력서를 낸다. 이것으론 부족하고, 구직활동 중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증빙 자료로 제출도 해야 한다.

  돌아오는 것은 다니엘의 말대로 수치심뿐이다. 다니엘과 함께 찾아간 식료품지원소에서 케이티는 이성을 잃고 허겁지겁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다. 일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고 흐느끼는 케이티 주위로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이 서늘하게 둘러싼다. 여기까지 이르자 케이티는 성노동을 시작한다. 이를 알게 된 다니엘은 손님인 척 케이티의 ‘직장’을 찾아가 뿌리치려는 케이티를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순전히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결론적으로 다니엘은 케이티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짓밟았다. 자신과 사랑하는 이 모두를 상처 입히는 책임은 왜 이들에게 오롯이 전가됐을까.

  영화 말미에 다니엘은 복지과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스프레이로 휘갈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기 위해선, 밀려오는 수치심을 덜어내기 위해선 “내가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다시 선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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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위대한 낙서' ⓒImdb



  영화가 끝나고 무력해지기 쉽지만, 그럼에도 켄 로치 감독은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제작 소감을 밝혔다. 그가 꿈꾸는 ‘다른 세상’은 분명 멀리 있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또렷이 드러난다. 영화는 다니엘이 케이티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돕는 것에서 시작된다. 전기요금으로 쓰라는 짤막한 메모와 함께 30파운드를 두고 가는 모습, 딸 데이지의 방 안에 나무 모빌을 달아주는 모습은 소박하지만 벅차다. 다니엘도 그런 진심을 받으며 산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는 차이나가 있고 항소 과정에 함께하는 케이티가 있다. “당신이 나를 도왔듯 나도 당신을 돕고 싶다”라는 평등한 연대,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해답. 내가 그저 나이기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로의 타자성을 공감하며 상대에게 기꺼이 도약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만들어지고 언어는 소통을 되찾게 된다.

  거짓말처럼 얼마 전 누군가도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선언했다. 다니엘의 세계가 아니라 서울 충정로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한 일이다. 그 누가 폭력적으로 타인의 상태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과 케이티가 보여주는 연대는 소중하다. 다니엘은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 밖으로 계속해 밀려나지만 그럼에도 한 뼘의 희망은 존재한다. 오롯이 너이기에 존중하고, 나이기에 존중받는 세계. 너와 내가 각각 공동체로 살아 숨 쉬는 풍성한 ‘우리’의 세계. 켄 로치가 꿈꾼 다른 세상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