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 문화
"필요한 책이 생기면 꼭 기다림이 수반돼요" 여전히 요원한 시각장애인의 도서접근권
등록일 2017.04.25 13:56l최종 업데이트 2017.04.25 13:56l 송재인 기자(gooa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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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겨울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용 대체도서 제작 봉사를 하던 김미래(언론 13) 씨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김 씨가 오탈자 검수를 하던 《사회복지행정론》은 사회복지사 1급 시험의 시험대비교재였고, 당시엔 시험이 보름밖에 남지 않아 시각장애인에게 교재가 제공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봉사자 검수 후 복지관 내부검수를 한 번 더 거쳐야만 대체도서 제작이 완료되기 때문에 일정이 매우 촉박했다.

 

  일 년에 출판되는 일반도서 중 5% 미만만이 시각장애인용 대체도서로 제작된다. 시각장애인은 95%의 확률로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대체도서 제작 및 보급을 담당하는 도서관은 전국 39개소로 시각장애인 수(2016년 10월 기준 총 25만 2825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시각장애인이 놓인 이른바 ‘독서 사각지대’는 현재 어떤 실정일까.



점자와 묵자의 벽을 허무는 다양한 대체도서


  시각장애인용 대체도서라 하면 흰 바탕에 6개의 올록볼록한 점이 찍힌 점자도서만을 흔히 떠올린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용 대체도서는 점자도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전자도서, 녹음도서, 촉각도서, 묵점자혼용도서, 점자라벨도서 등의 형식도 개발돼있다. 비시각장애인이 일반적으로 접하는 묵자(墨子, 먹글자)도서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한 셈이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가장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체도서는 전자도서다. 전자도서는 스크린리더(screen reader)를 통해 전자 형태의 문서가 음성이나 점자로 출력되는 도서를 일컫는다. 점자도서는 묵자도서에 비해 7-8배 정도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이용자들은 전문 서적, 외국어서적, 악보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접근이 용이한 전자도서를 활용한다. 녹음도서는 본문을 낭독이나 음성합성 기술로 녹음해 저장한다. 녹음도서는 도표나 사진 등의 이미지를 담아내기 어렵지만 시각장애인 뿐 아니라 ‘독서 장애인(노안, 중도시각장애인, 난독증 등 학습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대체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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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와 점자를 함께 써 제작하는 묵점자혼용도서(위)와 기존 그림책에 점자 라벨을 붙인 점자라벨도서(아래) ⓒ박윤경 기자


  한편 묵점자혼용도서와 점자라벨도서는 점자와 묵자 모두를 사용해 본문 내용을 전달한다. 묵점자혼용도서는 묵자와 점자가 함께 인쇄된 도서이며, 점자라벨도서는 묵자그림책 위에 점자를 라벨테이프로 부착한 도서다. 육근해 한국점자도서관 관장은 2003년과 2006년 각각 묵점자혼용도서와 점자라벨도서를 개발했다. 그는 “점자가 시각장애인인 아버지와 비시각장애인인 나 사이의 장애물로 느껴졌다”라며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도서를 개발하고자 했다”라고 개발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로 이러한 도서는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 가족 구성원의 소통의 매개가 될 수 있다. 시각장애인 부모는 비시각장애인 자녀 육아 시 묵점자 혼용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으며, 시각장애인 형은 비시각장애인 동생과 점자 라벨도서로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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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각그림책《TOUCH ME》에서 깃털 재질로 표현된 독수리(위)와 촉각도서로 제작한 전래동화《햇님 달님의 한 장면(아래) ⓒ박윤경 기자


  육근해 관장은 1999년 국내 최초로 촉각도서를 제작하기도 했다. 촉각도서는 다채로운 재료를 사용해 본문 내용을 표현하고, 독자가 직접 이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게 하는 도서를 의미한다. 초기엔 점을 찍어 이미지를 만드는 점화 형식이 주를 이뤘으나, 이내 색을 넣고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독수리를 묘사할 땐 깃털을 부착하고, 물고기를 표현할 땐 비늘과 유사한 재질을 사용하는 식이다. 촉각도서는 물체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기 용이해 영유아용 도서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지리적 정보를 담은 촉지도(높낮이 등을 달리해 입체적으로 표현한 촉각지도)나 세계 국기가 그려진 촉각도서 등은 성인들에게도 유용한 대체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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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를 이용해 입체적으로 제작한 촉지도 ⓒ박윤경 기자



학습권을 포함한 도서접근권 충족 어려워


  다양한 시각장애인용 대체도서가 개발됐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도서는 대체자료로 제작되지 않아 많은 시각장애인이 어려움을 겪는다. 그중에서도 적합한 시기에 보급돼야 할 학습교재의 제작 실정은 심각하다. 제작이 가장 용이한 전자도서도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제작기간이 소요된다. 전맹(全盲) 시각장애인 류창동 씨는 대학교 입시준비 당시 대체자료 미비로 아쉬움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는 “재학 중이던 맹학교에서 교과서는 제공받을 수 있었으나 시판 입시교재는 적시에 구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자원봉사자 선생님의 교재는 신판이었던 반면 내가 가진 대체자료는 거의 구판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대체자료 제작 기간 동안 책이 개정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맹 시각장애인 김수연(자유전공 17) 씨 역시 “시각 장애인용 EBS교재 대체자료가 4월경에 나오기 시작해 다른 (비시각장애인) 학생보다 공부를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현실은 크게 개선 되지 않았다. 김수연 씨는 “대부분의 교재들은 대체자료로 제작돼있지 않다”라며 “이 경우 갖고 있는 스크린리더로 스캔해 불완전한 내용만 대강 파악하거나, 장애학습지원센터에 요청한 후 오랫동안 자료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류창동 씨 역시 강의자의 수업진행 방식으로 어려움을 겪곤 했다. 류 씨는 “경제학 수업에서 강의자가 ‘여기, 저기’의 지시대명사만을 사용해 설명할 때가 많다”라고 밝혔다. 그는 한 선배가 액상화이트로 여러 번 그래프를 덧칠해준 이후에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역사과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현재도 상 황은 어렵다. 특히 그가 지원한 역사과의 경우 시각장애인 지원율이 낮아 시각 장애인용 대체자료를 구비하는 일은 더욱 힘들다. 그는 “올해 말 시험이 예정돼 있지만 아직도 교재를 모두 제공받지는 못한 상태”라며 한숨을 쉬었다.


  학습교재 이외 도서의 실정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용 대체도서를 제작, 보급하는 점자도서관과 복지관은 적시에 제공돼야 하는 학습교재와 수요가 높은 도서를 우선 제작한다. 따라서 시각 장애인 이용자는 자연스레 관련기관의 제작목록을 중심으로 도서를 접할 수밖에 없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디지털도서팀 이정원 팀장은 “한 해 출판되는 도서 중 극소수만 시각장애인 대체도서로 제작할 수 있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육근해 관장은 “대부분 도서관의 경우 제작도서 중 문학류가 90% 이상을 차지한다”라며 “한국점자도서관은 문학류 비중을 60% 이내로 유지하면서 인문, 기술,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제작하려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부족한 인력, 쫓기는 시간, 기다리는 이용자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용 대체도서 제작기관은 한정된 시간과 자원으로 인해 다양한 도서를 빠르게 제작할 수 없다. 우선 대체자료 제작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특히 점자도서의 경우 본문 내용을 점자로 제작하는 ‘점역’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 후 전문 점역교정사의 교정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평균 세 달이 소요된다. 전문인력 역시 부족하고 주문량도 많지 않아 일반 출판사는 대체자료 제작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육근해 관장은 한국점자도서관의 운영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직접 출판기업 ‘점자’를 설립해 대체자료를 제작, 유통하고 있다.


  전자도서는 점자도서보다 제작이 빠르고 용이하지만 저작권 문제가 개입한다. 출판사에서 본문 내용을 전자파일 형태로 납본하면 내용입력과 수정 과정이 생략돼 제작기간이 훨씬 단축될 수 있지만, 출판사의 협조를 요청하기란 쉽지 않다. 출판사는 전자파일의 유출 위험성을 우려해 대체자료 제작 기관에 자료 제공을 꺼리기 때문이다. 저작권법은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출판사에 전자 파일 납본을 요청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조항은 강제성이 없어 국립장애인도서관도 출판사의 이행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는 없다. 결국 기다리는 사람은 이용자,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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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들은 휴대용 보조공학기기에서 출력되는 점자와 음성을 통해 독서, 문서작업 및 인터넷 이용 등을 할 수 있다.


  출판사에서 파일을 제공받지 못하면 복지관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대체자료를 제작하곤 한다. 복지관은 먼저 시각 장애인 이용자가 직접 가져온 신청도서나 복지관 측에서 구입한 책을 스캔해 내용을 추출한다. 이 때 도표, 그림, 흘림글씨 등은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자원봉사자가 제작교열 및 오탈자 검수를 담당한다. 인력과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 서 비시각장애인 자원봉사자의 역할은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전문 서적은 단순 교열 외에 해설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아 관련 전공자가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자원봉사자 김미래 씨의 말에 따르면 “책을 제대로 본 것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제작교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제작교열 봉사의 경우 기본교육 이수 시 재택근무가 가능하기 때문에 대체자료의 품질이 저하되곤 하는 것이다. 이정원 팀장은 “자원봉사자가 ‘일생에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제작해야겠다’라는 사명감을 가지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남겼다.


  자원이 부족한 대체자료 제작기관과 이에 동참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민간 주체들이다. 민간 운영으로는 인력을 관리하기도, 도서를 제작하고 유통하기도 충분치 못하며, 설상가상 정부의 지원마저 부족하다. 육근해 관장은 “사립 공공도서관으로서 운영비의 일부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지만 안정적이지 않다” 라고 말했다. 이정원 팀장 또한 “사업비는 받고 있지만 대부분 인력비용은 자체적으로 부담한다”라고 정부의 부족한 지원을 지적했다.



통합 네트워크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도서접근권 제고해야


  육근해 관장은 시각장애인의 도서접근권 제고를 위해 ‘통합 네트워크’ 결성을 제안했다. 육 관장은 “국립시각장애인도서관이 관제탑으로서 사업기획과 예산지원을 담당하고, 40여 개의 점자 도서관과 복지관이 대체자료를 제작·보관·유통하는 지원센터가 돼야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그 아래 학교와 공공도서관이 시각장애인 이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지역기반 서비스기관이 돼야한다”라고 말했다. 현재와 같이 정부, 민간, 서비스 제공처가 모두 분리되지 않고, 통합돼 업무를 분담한다면 효율적으로 더 많은 자료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합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다른 기관은 동시에 동일한 책을 중복 제작하지 않게 되고, 시각장애인 이용자는 가까운 곳, 원하는 기관에서 필요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육 관장은 “이를 위해선 정부, 민간 기관, 출판업자, 이용자가 한 데 모여 논의할 수 있는 장이 지속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라 고 강조했다.


  김수연 씨는 “점자를 만지며 ‘사람들 이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배웠다”라고 시각적 내용을 책으로 이해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류창동 씨 또한 “책은 시각정보가 제한된 사람들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이므로 시각장애인에게 독서는 중요하다” 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시각장애인에게 책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누구든 원하는 책을 원하는 때에 읽고자 하며, 그럴 권리가 있다. 이 보편적인 명제가 특정 사람들을 빗겨가지 않게 되는 날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