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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간호사, '노란천사'에서 정치적 주체로 서울역사박물관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展
등록일 2017.10.22 13:51l최종 업데이트 2017.10.22 13:51l 김가람 기자(1004g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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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별적으로 이주한 경우부터 1968년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파견된 경우까지 모두 합하면, 1950-70년대에 만 명이 넘는 한국 여성은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의 길을 택했다. 경제개발이 최우선이었던 당시 한국 정부에게 파독 간호사는 외화벌이와 청년실업을 한 번에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정책이었다. 개발주의적 시선 안에서 파독 간호사는 봉사와 애국을 상징하는 ‘노란 천사’로, 개인을 희생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자랑스러운 일꾼’으로 그려져 왔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 ‘국가를 넘어 경계를 넘어’는 파독 간호사에 대한 기존의 단편적인 시각을 거부한다. 대신 파독 간호사의 경험과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사진, 영상, 증언 등으로 파독간호사 개개인의 생애를 재구성해냈다.

  전시는 커다란 비행기 모양의 통로를 지나며 시작한다. 1968년 김포공항에서 독일로 떠났던 비행기를 형상화한것이다. 통로 끝에는 간호사들이 독일에 첫 발을 내딛었던 순간이 묘사돼있다. 영상 속 간호사들은 교과서에서만 봤을 ‘파란 눈, 금발머리’의 사람들에게 서툰 독일어로 인사를 건네고, 환자를 돌보며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었다.

  전시에는 간호사 개개인의 생생한 경험을 접할 수 있는 여러 장치가 마련돼있다. 수화기 모양의 헤드셋을 들면 파독 간호사였던 은정희 씨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집안의 생계를 위해 독일로 떠났다는 은 씨가 독일에서 받은 첫 월급은 300마르크. 한국과 중개소에 보낼 돈을 제하면 혼자 겨우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그는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낯선 땅에서의 공포감 속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은정희 씨의 사진 옆에는 1972년 발행된 조흥은행의 송금확인서가 전시돼있다. 독일에서 받은 월급이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잘 전달됐다는 내용의 확인서는 파독간호사 박정숙 씨가 오랫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이다. 송금으로 상징되는 가족부양의 책임감은, 박 씨가 고된 간호사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한편 간호사들이 독일로 떠난 건 가족과 고국에 대한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식구들과 아름다운 산천을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김양순 씨의 증언처럼 한국 여성들에게 독일은 새로운 도전의 땅이었다. 외국에 쉽게 갈 수 없었던 당시, 서구 선진국의 교육과 높은 성평등 의식, 부패한 한국사회로부터의 해방 등은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했다. 전시품 중에는 사진이 붙어있는 베를린 시 학생용 정기승차권도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인 조국남 씨는 독일에 오자마자 간호사 일과 학업을 병행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어쩌면 파독 간호사들은 간호사 취업보다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후의 미래를 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1) 소매가 잘린 간호복 @서울역사박물관.png

찢은 간호사복은 일터에서 저항하는 도구였다. 옷깃에 새겨진 간호사의 이름은 마리아다. ⓒ서울역사박물관



  1977-78년 진행된 체류권 운동은 그 미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1973년 국제 기름파동으로 서독경제가 침체되며. 서독은 비유럽지역 출신 노동자의 취업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파독 간호사의 사정도 어려워졌다. 1977년 뮌헨시의 한 병원이 파독 간호사에 대한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이민청이 체류허가를 중단하면서 강제송환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전시실 한편에 자리한 한쪽 소매가 찢어진 간호사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독 간호사들은 강제송환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간호사복을 찢었고, 이 간호사복을 입은 채로 환자를 만나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체류와 노동 문제를 독일사회에 알렸다. 거리로 나선 간호사들의 사진은 당시 운동의 뜨거움을 그대로 전하는 듯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겠다.” 간호사들은 이 구호를 통해 자신은 독일에 잠시 들렀다 가는 손님도, 이방인도 아닌 독일사회의 구성원임을 선언했다. 체류권 운동의 성공은 노란천사라는 수식어 아래 가려져있던 이주민, 노동자, 생활인으로서의 권리를 파독 간호사에게 가져다줬다.

  나아가 파독 간호사들은 국경을 넘어선 정치적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YH무역’과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을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하는 일이발생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한국의 여성노동자를 보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안차조 씨는 “우리들이 여성노동자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의 치열한 상황을 접하면서, 외화 획득을 위한 인력수출 정책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나도 노동자였다”라고 증언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한국의 노동실태를 각색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하며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전시실에는 독일 전역을 순회공연하며 한국의 상황을 알리던 간호사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파란 여공복을 입고 서로의 손을 맞잡은 간호사들은 생존권이라는 이름 앞에서 모두 여성 노동자였다.


(2) 추모비 앞 김인선 씨 부부 @서울역사박물관.png

성소수자 추모비 앞에서 손을 잡고 있는 김인선 씨와 이수현씨는 30년 전 파독간호사로 서로를 만났다. 전시에서는 이들이 '공동체를 꾸렸다'고 표현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는 정착 30년이 지난 현재의 여성들 역시 조명한다. 사진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파독 간호사는 김인선 씨와 이수현 씨. 30년 전 처음 만나 동성부부로 함께 살아온 이들은 나치에 의해 탄압받은 성소수자 추모비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를린은 이런 추모비가 있을 수 있어서 좋다”는 김 씨에게 베를린은 주거 공간 그 이상이다. 베를린은 김 씨와 이 씨가 서로 사랑하며, 그들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준 도시였다.

  파독 간호사 21명의 모습을 촬영한 김옥선 작가는 “한 장의 순간이 그들의 평생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함께 얼굴에 그려진다는 작가의 말과 함께, 관객은 아주 평범한 21개의 얼굴을 마주한다. 전시실 벽면 가득 적힌 조그만 글자들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자연스레 시선은 정 가운데 위치한 조국남 씨의 말에 집중된다. “(권리투쟁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 대상의 위치에서 정치활동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나 스스로를 정치화하고 해방시키는 의식화 과정이었다.”

  ‘노란천사’이자 ‘자랑스러운 일꾼’이었던 파독 간호사는 투쟁을 통해 체류할 권리, 노동할 권리, 그리고 삶을 꾸려나갈 권리를 획득한 ‘정치활동의 주체’가 됐다. 국가의 관리 대상에서 이주여성노동자로, 독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국가와 문화, 젠더의 경계를 넘어선 파독 간호사들에게 ‘노란천사’의 날개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