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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를 꿈꾸는 가방장이의 동네, 신월동 양천가방협동조합과 함께한 가방공장에서의 하루
등록일 2017.10.22 20:08l최종 업데이트 2017.10.22 20:13l 배인환(iabae12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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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 시간대를 막 지난 오전 9시. 신월동의 아침 풍경은 여느 조용한 주택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적하고 평범한 동네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내 ‘양천가방협동조합 LANTT’라고 써진 흰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골목 아래에는 2000여 개의 가방공장들이 자리하고있다.

  신월동에 가방 제조업체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60년대부터였다. 80년대에는 임대료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가방공장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었고, 국내브랜드는 물론 ‘나이키’나 ‘아디다스’같은 외국 브랜드 가방까지 제조할 정도로 신월동의 가방 산업은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인건비가 싼 중국과 동남아로 주문량이 빠지고 IMF를 겪으며 많은 가방공장이 문을 닫는 등, ‘잘나가던 가방 동네’ 신월동은 위기에 봉착했다. 사라져가던 신월동을 붙잡은 건 신월동의 ‘터줏대감’ 가방장이들이었다. 2015년 13명의 가방장이들이 모여 ‘양천가방협동조합(양가협)’을 만들고, 함께 가방을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 단체들과 손잡아가며 양가협은 조금씩 성장해나갔고, 소문이 퍼지며 양가협을 찾는 가방공장도 하나둘 늘어나게 됐다. 그 결과 양가협은 50여 개의 가방 공장, 180여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신월동의 든든한 ‘지하 단체’가 됐다. 2016년에는 자체 가방 브랜드 ‘LANTT(란트)’를 만들어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방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란트는 ‘가방이 곧 인생인 사람들이 만든(Life), 매혹적이고(Attract) 실용적이며(Necessity) 초월적 가치(Timeless Time)를 지닌 가방’을 의미한다. 9월의 어느 날, 초월적 가치를 지닌 가방을 만들기 위해 함께를 선택한 가방장이의 동네, 신월동을 찾았다.


25년 경력은 기본,
멈추지 않는 재봉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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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일감이 들어온 쌍화실업의 아침. 다른 공장에서 배낭 뒷판이 오면 
쌍화실업에서 완성품으로 만든다.

  ‘쌍화실업’은 신월동 곳곳에 숨어있는 가방공장 중 하나다. ‘양천가방협동조합 LANTT'라고 쓰인 흰 간판만 빼면 가방공장이 있는지 눈치 채기 어렵다.계단을 내려가며 점점 커지는 재봉틀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공장 내부는 단순했다. 20평쯤 돼 보이는 넓은 방 옆에 작은 휴게 공간이 딸려 있었고, 벽을 따라 기역자 모양으로 8개의 책상이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재봉틀이 하나씩 놓여있었고, 간혹 가방 자재들이 가득 쌓여있기도 했다. 그날 가동하지 않는 일부 재봉틀 위에 작업을 기다리는 자재를 잔뜩 쌓아놓은 것이었다. 눈을 돌리니 공장 입구 왼편에는 완성된 배낭들이 열을 맞춰 쌓여 있었다.

  라디오 소리라도 있을 줄 알았던 공장 안에는 재봉틀 소리만이 가득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 사이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는지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 직원이 목소리를 키워 쌍화실업 사장인 이쌍화 씨를 부르고 나서야 이 씨가 고개를 들었다. 이 씨는 재봉틀 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며 슬리퍼를 꺼내주었다. 이 씨의 안내로 공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날 저녁 공장을나서기까지, 재봉틀 소리는 온종일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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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 앞에는 가방의 앞판과 뒷판을 옆면에 박는 이쌍화 씨와 김자욱씨가 앉아있고 
박애자 씨는 꼼꼼히 완성품을 검수하고 있다.

  이날 쌍화실업에서는 이쌍화 씨와 네 명의 직원이 아동용 신학기 가방을 만들고 있었다. 이 씨와 유일한 남직원인 김자욱 씨는 가방의 옆면에 앞판과 뒤판을 붙여 가방을 완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곡선으로 된 뒤판이 두두두 소리와 함께 옆판과 연결되며 가방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0초. 옆에서는 53살 동갑내기 직원 박근희 씨와 김정호 씨가 신발주머니를 만들고 있었다. 김정호 씨가 분홍색 신발주머니의 앞판에 브랜드 로고를 박고, 박근희 씨가 뒤판에 손잡이를 연결했다. 10초. 앞판과 뒤판을 완성하는 시간은 더 짧았다. 순식간에 완성되는 듯 보여도, 작업은 엄밀한 규칙과 공정 아래 진행된다. 작업하는 가방에 따라 노루발(재봉할 때 바느질감을 고정시켜주는 장치)의 높이를 조정하고 실을 바꿔 끼워야 하며, 천과 천을 연결할 때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실을 박아야 한다. 같은 색으로 보이는 실타래도 직원들은 단번에 색을 구분해냈다. 한편 박애자 씨는 바닥에 앉아 완성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완성된 가방을 뒤집어 이음매를 가위로 다듬고, 다시 드라이어를 이용해 이음매를 부드럽게 녹이는 작업이었다. 이름표를 가방에 꽂고 검품을 마친 후 가방을 접어 쌓아놓으면 비로소 가방 한 개의 제작이 마무리됐다.

  “학생! 앉아 있으면 시간 안가. 와서 이거라도 해봐!” 한창 작업을 하던 김정호씨가 부르는 소리였다. 김 씨의 재봉틀 아래에는 로고가 박힌 신발주머니 앞판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가방공장 직원들은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박음질을 한 후에는 작업물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거나 던져 놓는다. 그렇게 쌓인 수백 장의 앞판을 한 장씩 쌓아 정리하는 일을 얼떨결에 돕게 됐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가까이 앉아 일을 돕다 보니, 자연스레 직원들과 대화를 트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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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주머니를 만들고 있는 동갑내기 김정호 씨와 박근희 씨


  25년째 가방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김정호 씨는 “남편 잘 만나서 (가방공장 일을) 시작했지”라고 농담을 던졌다. “(재봉틀의) 페달을 밟는 거만 한 달. 제대로 하려면 몇 달은 걸려.” 박근희 씨는 가방공장에서 일한 지 30년이 돼간다고 했다. “시다로 시작했어, 나는.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고 점심시간에 틈틈이 연습해서 배운 거지.” 일을 배우며어려운 일이 없었냐 묻자, 박 씨는 웃으며 재봉질을 하다 다쳤던 일화를 들려줬다. “엄지손가락을 바늘이 뚫었었어. 그땐 병원도 안 가고 박힌 바늘을 공구로 뺐어. 무식하게 기름에 담그라고해서 엄지손가락을 기름에 넣었지.” 김 씨와 박 씨 모두 말을 하는 동안에도 재봉질을 계속했다. 눈 감고도 하시겠다고 하자 “에이! 눈 감고 재봉틀을 어떻게 돌려!”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방 쌓는 일을 마무리하고 박애자씨에게 다가가 도울 일이 있는지 물었다. 박 씨는 기다렸다는 듯 막 완성된 가방들 사이로 이끌었다. 박 씨가 끄는 대로 스티로폼 방석 위에 앉으니 “젊은 시다가 왔구만”, “다리 피고 앉아, 학생”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가방공장에 온 지 한 시간 반 만에 ‘시다’가됐다. ‘시다’는 재봉업계 은어로, 재봉질이외 업무를 수행하며 작업을 돕는 보조 인력을 뜻한다. 이음매 끝부분을 가위로 다듬는 작업을 맡았지만, 가위질 몇 번에 손가락 마디가 아파 중간 중간 ‘시다’일을 쉬어야 했다. 휴식 없이도 더욱 복잡한 작업을 해내는 직원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평생 하고 싶은 가방장이

  앉아서 가방의 이음매를 다듬다보니어느덧 옷에 흰 먼지가 수북이 덮여있었다. 그제야 직원들이 앞치마를 입고 일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의자에 앉건 바닥에 앉건 꼭 방석을 깔고, 동작을 최소화하라는 직원들의 조언도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모두 50대가 넘은 직원들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바닥에서 주로 일하는 박애자 씨는 특히 엉덩이가 아프다고 토로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계속 바닥에 앉아있으면 허리를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재봉틀 앞 의자에 앉아 일하는 직원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직원들은 오래 앉아 일을 하다 보니 허리, 팔, 어깨가 항상 뻐근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박근희 씨와 김정호 씨는 “이 일이 제일 덜 아픈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스스로를 ‘한눈 안 판’ 사람들이라며 가방 공장일이 제일 좋다고도 했다. 박 씨는 식당으로 일하러 갔다 이틀만에 가방공장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일어났다 해야 하는 식당일에 비하면 가방공장일은 힘든 편이 아니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나 부러워하잖아, 기술 있다고.” 박 씨는 50대 여성이 이렇게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며 현재의 일에 감 사한다고 했다. 김 씨 역시 가방 만드는 일이 제일 잘 맞는다며, “나는 한 번도 딴 일 생각 안 했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박 씨와 김 씨는 이제껏 ‘한눈 팔지 않았듯’ 앞으로도 가방공장에서 계속 일을 하고자 한다.

  김자욱 씨는 20대 초반 잠시 장사를 하다가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가방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에서 엄청 큰 흥미를 찾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배운 게 이거니깐 하는 거지.” 오히려 장사가 더 성향에 맞는다는 김 씨에게 가방공장 일을 언제까지 할 계획인지 묻자, 김 씨는 “뭐 죽을 때까지 하는 거지!”라고 외쳤다. 사장 이쌍화 씨 역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공장을 운영하며 직원들 일당을 주고, 가족을 책임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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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째 가방을 만들고 있는 이쌍화 씨


  하지만 오래 일하고 싶다는 이쌍화 씨와 직원들의 바람과 달리, 가방공장은 예전의 전성기 같지 않다. 방문한 날처럼 작업량이 가득 찬 날은 일 년에 하루 이틀 있을까 말까다. 신월동의 전성시대였던 80년대를 뒤로, 90년대부터는 주문이 점차 줄어들며 신월동에 불황이 찾아왔었다. 이쌍화 씨는 “오늘만 보면 잘 되는 것 같은데, 사실 겨우 먹고 살 정도다. 직원들에게도 월급 대신 일당을 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김정호씨는 “예전에는 야근도 많이 하고, 수량 맞추려고 새벽까지도 가방 만들고, 다음날도 가방 만들고 했지”라고 회상했다. 올해에는 일감이 없어 열흘을 연이어 휴업하기도 했다.


함께를 꿈꾸는 사람들, 양천가방협동조합


  그럼에도 신월동 가방공장들은 2015년 양가협을 결성한 후, 더 나은 가방 산업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양가협은 양천구 모든 국공립 어린이집의 가방 제작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점점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양가협 결성 이후 젊은 사람들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가방 제작을 수주하거나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젊은 사업가, 교수와 학생들이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 6월 서울시 및 양천구 지자체와 양가협이 협력해 공방을 만들면서, 가방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의 방문이 더욱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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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가방협동조합에서 만든 가방들이 사무실 한편에 자리잡고 있다.

  조규남 양가협 이사장과 이쌍화 씨는 양가협을 통해 신월동을 가방 특화 거리로 만들고, 아파트형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양가협은 조합을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일을 각 공장에 배분하고, 각 공장에서 완성된 부품을 한 공장에 모아 완제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나의 가방이어도 옆판 만드는 곳, 지퍼 만드는 곳, 라벨 만드는 곳이 모두 다른 셈이다. 조 이사장은 “지금 다 나눠서 하는 일을 한 건물에 함께 모여서 하면 얼마나 효율적이겠어요”라고 바람을 전했다. “그리고 가방하면 딱 신월동이 떠올랐으면 좋겠어요.”

  쌍화실업과 함께한 하루가 저물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이쌍화 씨에게 소망을 물었다. “그냥 가방 좀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오랫동안 신월동 사람들이랑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처음 공장에 들어섰던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던 재봉틀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조용한 신월동의 주택가가 나왔다. 오늘도 사람들이 모르는 한 뼘 아래의 공간에서, 신월동의 재봉틀은 두두두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