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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함께, 불행한 얼굴로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2017)'
등록일 2018.03.08 13:04l최종 업데이트 2018.03.08 21:56l 이누리 기자(nurizto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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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갈 곳 없는 소녀 소현은 모르는 게 많다. 어떤 상황에 분노해야 하며 어떤 걸 하면 안 되는지, 사람들과 함께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기에, 소현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가 어렵다. 서툰 소현은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했던 거짓말로 인해 되레 더 혼자가 된다. 소현은 ‘거기라면 누구라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 날 데려가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고 한때 의지했던 사이인 정호와 같이 살던 모텔방으로 향한다. 그러나 모텔에는 정호는 물론 사람의 온기도 없이 싸늘한 공기만 가득하다. 그곳에서 소현은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자신과 이별하고자 손목을 긋는다.

  “안녕? 돌아왔구나.”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인사와 함께 제인이 등장한다. 클럽 ‘뉴월드’에서 잠깐 정호와 함께 일했던 트랜스젠더 제인은 피가 흐르는 소현의 손목에 붕대를 둘러주고, 이후 소현이 머물 곳을 마련해주며 소현과 함께 지낸다. 제인은 때로 우스워보이기도 한다. 소현과 함께 떠난 바닷가에서 천연덕스럽게 남의 비치볼을 훔치고, 달을 바라보며 주차하는 차에다 대고 말하듯 ‘오라이’를 주문처럼 되뇐다. 그럼에도, 조건 없이 가출한 아이들을 데리고 살며 자기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는 제인의 울타리는 따뜻하다. 소현에게 있어 제인은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다.

  왜 가출한 아이들을 데리고 사냐는 물음에 제인은 답한다.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쭉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이런 개 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 하니.” 소현은 이 답변을 ‘어차피 인생이 불행한 거 다 같이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제인은 소현의 서툰 해석을 굳이 고치려 들지 않는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웃을 뿐이다. 소현의 발가락 하나가 없는 것을 보고도, 그 없는 발가락이 가려울 때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신기하다. 그런 사람 처음이에요.” 제인을 향해 소현이 내뱉는 감탄은 순수하다. 재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어른이 처음이었던 소현은 제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소현제인.jpg ▲ 클럽 '뉴월드' 앞 골목, 제인이 앞장서고 소현이 그 뒤를 따른다. ⓒ 영화 '꿈의 제인' 공식 스틸컷


  제인과의 작은 행복이 조금 지속되나 했더니, 한순간에 현실이 닥친다. 제인이 자살했다. 그리고 갑자기 장면이 전환된다. 제인을 만나기 전인지, 제인이 죽은 후인지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의 소현이 우울한 얼굴로 화면에 등장한다. 여기서 소현은 가출청소년들이 모여서 숙식을 해결하는 한 ‘가출 패밀리’, '가출팸'의 일원이다. 팸은 소현을 비롯한 팸원들이 생활비를 벌어 ‘아빠’에게 제공하면, ‘아빠’는 그 대가로 머물 곳을 지원해주는 식으로 운영된다. 편안하고 따스했던 제인팸과 달리, 병욱이 가장으로 있는 병욱팸에서 소현은 폭력에 노출된다. 뺨을 맞고 발길질을 당하며, 공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기도 한다. 소현에게 무관심하거나 공격적인 팸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지수만이 소현을 친동생처럼 챙긴다. 그러나 지수와 미래를 이야기하며 소박하게나마 즐거웠던 시간도 순식간에 끝나고 만다. 자신에게 굴종하지 않는 지수를 탐탁지 않게 보던 ‘아빠’ 병욱은 지수에게도 누명을 씌워 제 권위를 세우려 한다. 지수는 반항하다 분노한 병욱에 의해 감금당하고, 성매매를 강요당한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 지수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소현은 드물게 마음을 열었던 이를 또 한 번 잃고 만다.

  병욱마저 지수의 시체를 묻던 중 팸원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살해당하면서 병욱팸은 해산한다. 해산하는 이들 중 누구라도 자신과 함께해줄 이를 찾아 소현은 나름의 노력을 해보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멀어진다. 소현은 병욱팸에서 유일하게 지수를 구하려고 시도했던 대포와 쫑구에게 연락해 지수를 사칭한다. “지수 걔가 너한테 어떻게 했냐, 근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지수를 끝내 구해내지 못하고 팸을 떠났던 대포는 이미 지수의 자살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망연한 얼굴로 소현을 책망하며, 지수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절규한다. 분명 소현의 “나 지수야”라는 거짓말은 잔인하다. 그러나 소현이 잔인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잔인한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던 절절한 고백처럼, 소현은 방법을 모를 뿐이다. 결국 대포는 지수의 동생인 은수와 함께 떠나고, 소현은 또다시 홀로 남겨진다.

  ‘꿈의 제인’의 이야기에는 시간의 단선적 흐름 속에 존재할 수 없는 모순들이 있다. 제인팸에서의 생활이 담긴 전반부와 병욱팸에서의 사건들이 드러나는 후반부 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병욱팸에서 처음 만난 지수와 대포, 쫑구가 제인팸의 일원으로 나오지만, 지수의 죽음이 두 이야기 사이의 일관된 서사를 무너뜨린다. 병욱팸의 해체 후 제인팸으로 모였다기에는 지수는 이미 죽은 상태이고, 제인의 죽음 이후 병욱팸에서 재회했다기에는 병욱팸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라는 설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한 쪽은 현실이고 한 쪽은 꿈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분명한 힌트는 주어지지 않는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진실하지 않았어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소현의 첫 대사가 제인의 공연에서 반복된다. 제인과 지수의 죽음은 매우 유사하게 연출된다. 어떤 말을 누가 한 것인지, 제인이 죽은 것이 현실인지 아닌지. 영화의 말미쯤에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잠을 잘 때 꾸는 것만이 꿈이 아니기에, 제인팸은 어떤 의미로든 소현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제인과 상냥했던 지수, 자신이 저항하지 못한 폭력에 저항했던 대포와 쫑구. 그들과 함께 김밥과 케이크를 나눠먹는 삶이 곧 소현이 꿈꾼 사소하지만 소중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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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병욱팸의 아파트 안 소현. 소현의 무표정에는 억눌린 슬픔이 담겨있다. ⓒ영화 '꿈의 제인' 공식 스틸컷



  ‘UNHAPPY’라는 단어가 새겨진 클럽 ‘뉴월드’의 입장 도장이 마치 낙인처럼 느껴질 만큼, 소현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불행이 존재한다. 크레딧이 끝난 후에 이어질 소현의 삶 또한 잠깐의 행복과 당연한 불행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소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없어 고민하는 관객에게 제인은 말한다. “우리,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요. 내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기적 같은 전환점은 존재하지 않는, 늘 그렇듯이 불행한 나날들이라도 소현이 또 다른 제인을 만나 함께 있기를. 함께 있어서 가끔이나마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기를. 제인의 목소리에는 희망찬 미래를 상상할 힘조차 없는 날에 가장 절실한, 시시하고 작은 위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