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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무관심 속에 우린 죽어갑니다 로빈 캉피로 감독의 '120BPM'(2015)
등록일 2018.09.09 00:38l최종 업데이트 2018.09.10 23:13l 박세영 기자(precieuses@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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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이즈 감염인의 권리를 위해, ‘액트 업 파리’

  어둠 속에 선 사람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희미한 틈 사이로 한 남자가 강연을 시작하자, 이들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뛰쳐나가 가짜 피를 던지고 구호를 외친다. HIV 감염에 대한 어떠한 실효성 있는 대책도 내놓지 않는 AFLS(파리 에이즈퇴치기구)의 무책임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에이즈 감염인의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단체, 액트업 파리(ACT UP PARIS)다.

  1989년의 파리에는 에이즈에 대한 공포만 만연할 뿐 제대로 된 약도, 예방책도, 그를 마련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매년 감염자가 6천 명씩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예방책을 마련하지 않는 정부에 맞서 액트업 파리는 집회를 열고 포스터를 붙인다. 멜톤제약이 HIV환자들의 희망이 될 수도 있는 단백분해효소 억제제에 대한 발표를 미루자 액트업 파리는 멜톤제약에 항의방문을 가기로 한다. 경찰서에 구금돼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것을 대비해서 각자의 약을 챙긴 채, 액트업 파리의 활동가들은 제약회사의 사무실에 가짜 피를 던지며 살고 싶다고 소리친다. 회사의 간부는 “당신들이 겪고 있는 일이 어떤지 충분히 압니다”면서도 “하지만 이건 지나쳐요”라 말하며 그들을 비난한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 우린 죽어가고 있다고!” 절규하는 활동가들을 경찰은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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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방문을 위해 제약회사 멜톤을 찾은 나톤의 모습 Ⓒ네이버영화


 
“너는 살 수 있을 것 같아?”

  경찰서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액트업 파리의 일원인 션은 동료들에게 에이즈로 인해 변화한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난 더 열심히 살게 됐고,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 색이 더 풍부해진 것 같고, 소리도 가득한 것 같고. 삶이 더 생긴 듯 해” 평소 활기차기만 하던 션이 담담하게 털어놓은 말에서 동료들은 그가 짊어진 바뀐 일상의 버거운 무게를 마주한다. 그가 느끼는 달라진 삶의 무게에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동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션은 “농담이야”라며 웃어 보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션은 언제나 괜찮다고 말한다. 션 뿐만이 아니다. 액트업 파리의 활동가들은 지하철의 승객이 그들을 피해 자리를 옮기고, 경찰이 그들을 만지기 꺼려해 장갑을 끼고 시위를 진압하더라도 웃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춘다.

  그런 그들이 게이프라이드에 사용할 슬로건으로 채택한 문구는 “네가 살길 원해”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로 회의를 여는 일에도, 갑작스레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는 일에도 익숙해진 HIV 감염인들의 절박함을 삶이 당연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액트업 파리의 간절한 몸부림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싸늘하다.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의 앞에는 “이해한다”고 말하며 건성으로 넘기려는 사람과 “또 액트업이야”라며 질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액트업 파리는 고등학교를 방문해 성병을 예방하는 법을 설명하고 학교 관계자에게 콘돔자판기 설치를 요구한다. 간혹 진지하게 팸플릿을 받아드는 학생도 있지만 대개는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며 선을 긋기도 한다. 팸플릿을 나눠주는 나톤에게 한 학생은 “필요 없어요. 저 호모 아니에요. 에이즈 쪼가리 따위 안 받아요”라고 말한다.

  정부의 새 대책도, 멜톤제약의 백신 분자에 대한 발표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끝내 액트업 파리에서 막 활동하기 시작한 활동가 제레미가 숨을 거둔다. 액트업 파리는 제레미의 시체를 싣고 행진한다. HIV환자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는 그의 마지막 바람을 담은 글귀, ‘SILENCE=MORTE(침묵=죽음)’가 적힌 팻말과 함께.

 
‘침묵은 곧 죽음’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싸움

  한 사람의 죽음조차 HIV와 싸우기 위한 수단이 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다. 여전히 정부와 제약회사는 액트업 파리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고, “위선적인 동성애자의 정신”을 운운하는 책이 대형 신문에서 호평을 받는, 혐오가 만연한 세상도 그대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션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난 너무 아파. 온 몸이 고통이야. 나 두려워”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약해진 션은 그제서야 자신의 삶이 괜찮지 않다고 고백한다. “나 아직 살아있어? 아직도야? 이만하면 됐잖아”라고 말하며 무너지는 션을 누구도 도울 수 없었다.

  션의 연인인 나톤은 션을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집회에서 팸플릿을 나눠줬지만, 그 순간에도 션은 조금씩 죽어갔다. 어느 날 밤, 침대 옆에 이불을 깔고 새우잠을 청한 나톤의 곁에서 션은 조용히숨을 거뒀다. 잠에서 깨 무심코 션의 팔을 더듬은 나톤은 이내 연인의 죽음을 직감하고 오열한다. 션의 집에 모인 친구들은 그를 애도하는 글을 낭독하며 슬픔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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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의 죽음 이후 액트업 파리가 정치장례를 치르고 있다 Ⓒimdb



  하지만 글의 내용대로 “션은 정치 그 자체였”기에 액트업 파리는 오래 울 수 없었다. “션은 정치 장례를 원했어요. 보험업자들에게 자신의 재를 뿌렸으면 했죠” 액트업 파리는 션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대로 그를 떠나보내기로 한다. 액트업 파리는 션의 유골을 안고 여느 때처럼 구호를 외치며 보험업자들의 파티장에 난입한다. 션이 바랐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션과 같은 이들이 더 이상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동료의 죽음을 딛고 서서 삶에 대한 절박함을 다시 외치는 일은 액트업 파리가 죽은 이를 위해 치를 수 있는 최선의 장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