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호 > 문화
앗! 디자인, 신발보다 싸다 정당한 노동비용을 주장하는 그래픽디자이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등록일 2018.10.25 19:00l최종 업데이트 2018.10.26 17:23l 이상호 기자(seoroleeee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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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비(디자인 13) 씨는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한국에 있는 클라이언트에게 디자인 작업을 의뢰받았다. 이전에도 같이 일한 적이 있는 디자인 전공자였다. 그런데 고 씨의 결과물을 받아본 그는 터무니없이 낮은 노동비용을 제시했다. 고 씨는 선뜻 이의를 제기하길 망설였다. ‘나는 고작 학생인데 10년 이상의 근무경력이 있는 클라이언트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이틀을 고민한 끝에 메일을 보냈다. 고 씨는 노동에 들어간 자신의 노력을 상세히 서술하고, 그에 상응하는 최소 노동비용을 설명했다. 다행히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고 씨는 자신이 제안한 금액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해당 클라이언트로부터 들어온 작업 의뢰는 없었다.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는 작업을 외주로 맡기는 경우가 많다.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 전문 업체는 계약에 따라 합의된 보수를 받는다. 노동시간에 따른 일반적 보상체계와 달리, 그래픽디자인에서는 작업물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금액이 결정되기에 별도의 가격 산정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적정임금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도 마련되지 않아 디자인 비용이 끝없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다. 적정 노동비용에 대한 합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디자이너, 천재와 단순직 사이


  그래픽디자이너들은 한국 사회에 디자인을 전문적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팽배하다고 입을 모았다. 고은비 씨는 “학내에서 일을 받아보면, 클라이어트들은 자신이 모든 걸 지시하고 디자이너는 기술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포토샵만 다룰 줄 안다면 디자이너가 누구로 바뀌든 상관없다는 인식을 정말 많이 접했다”고 말했다. 한편 정반대의 편견도 존재한다. ‘오늘의풍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래픽디자이너 신인아 씨는 “한국에서는 디자인이 개인의 재능과 감각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고 운을 뗐다. 그는 “디자이너가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해 했던 노력이 무시된다”고 지적했다. 디자인이 단순한 채색 업무 혹은 소수의 천재들이 쉽게 해내는 일로 치부돼 디자이너의 노동 결과물은 정량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포토샵 능력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재능을 입증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이는 ‘디자이너 과포화 시대’와 ‘디자인 불황’ 등의 담론과 맞물려, 자존감이 낮아진 초년생 디자이너들이 제살을 깎아먹게 만든다. 신인아 씨는 “디자이너들이 ‘나는 아직 감각이 모자란데, 누구만큼 잘하지 못하는데’라고 생각해 굉장히 낮은 가격에도 일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는 개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결국 (업계 전반에서) 그 작업 자체의 가격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우려했다. 명시된 가격표도 없으며 작품에 들인 노력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 사회 속에서 당사자들마저 작품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취미와 전공의 경계를 흐리는 행위도 디자이너들에게 위협이 된다. 최근 블로그나 트위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디자인 커미션’이 그 예다. 커미션이란 온라인상에서 일정 대가를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초기에는 단순한 일러스트나 캐리커처로 시작했으나 최근에는 타이포그래피나 책 표지 제작에까지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커미션을 받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스스로 저렴한 가격을 책정한다. 문제는 이들의 취미 생활이 전문 디자이너의 활동 영역과 겹치며 비전공자들이 둘 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래픽디자이너를 존중하는 문화를 배워야 할 젊은 층 사이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디자인 단가 요구가 보편화된다. 신인아 씨는 “내가 책을 디자인한다면 400만원은 받아야 하는데, 커미션으로는 10만원에 해버리고 (비전공자들이) 그 디자인에 굉장히 만족한다”며 “이렇게 자란 친구들이 나중에 자라서 전문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길 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누군가 비합리적인 가격을 거부하더라도, 그 값에 일하겠다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므로 외주 작업을 수행하는 디자이너는 을의 위치에 놓인다. 고은비 씨는 “아마 그 분도 저보다 싼 값에 일하겠다는 디자이너를 구했을 것”이라며 “클라이언트를 잃고 그 분야에서 매장당할 가능성까지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된 대우를 요구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개인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기업으로부터 일을 위탁받는 디자인 전문 업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눈디자인’에서 일하는 김소미 씨는 “프로젝트가 스스로의 경력과 포트폴리오에 도움이 된다고 느껴지면 디자이너 본인조차도 페이(pay)를 깎으려는 습성이 있고, 클라이언트도 이를 알고 있다”며 업계의 현실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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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디자이너 신인아 씨(좌)와 김소미 씨(우) ⓒ박세영 기자



무색한 표준계약서, 디자인비 덤핑에 앞장서는 국가


  디자인의 적정 단가를 산정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13년 한국디자인진흥원은 ‘디자인용역 표준계약서(표준계약서)’를 배포했다. 그러나 그래픽디자이너들은 표준계약서가 무용지물이라고 말한다. 업무가 천차만별인 디자인 분야의 특성상, 최대한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상세한 규정이 있어야하지만 현재 고시된 조항들은 지나치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클라이언트가 완성품에 대해 수정을 요구해 갈등이 생길 때가 많지만 표준계약서에는 수정 관련 규정이 전무하다. 게다가 시행의 강제성조차 없어 디자이너의 권리 신장에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신인아 씨는 “공공기관과 일을 하면 그 쪽에서 이미 (자체적인) 서류가 있어서 그걸 따를 수밖에 없다”며 “표준계약서는 최후의 보루일 뿐이고, 차라리 견적서에 (계약 내용을) 더 썼을 때 클라이언트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2014년에는 한국디자인기업협회가 ‘디자인용역대가기준 가이드라인(가이드라인)’을 개발했으나 이 또한 강제력과 실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작업의 난이도를 상, 중, 하로 단순하게 나눠 총 세 개의 표를 제공하고 있으며, 표에 적힌 액수도 실제 금액이 아닌 디자이너의 경력에 따라 배율이 다르게 적용될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결국 가이드라인은 42쪽에서 ‘디자인용역 프로젝트는 디자인 전문분야별로 정량적으로 규격화한 표준일정 및 프로세스를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디자이너와 업무 특성이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소프트웨어 기술자에 대해서는 매년 구체적인 노임대가표가 업데이트되는 것과 대조된다.


  심지어는 공공기관이 디자인 비용을 낮게 형성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그 중심에는 낙찰제가 있다. 낙찰제를 시행하면 디자인의 품질과는 무관하게 최저가를 제시한 업체가 사업을 수주하므로 업체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단가를 계속 낮춰야만 한다. 김소미 씨는 “디자인 시안을 평가에 반영하는 경우도 많지만 여전히 가격이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며 “국가가 제시하는 예산보다 통상 10%는 낮게 써야지만 합격선”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디자인 비용에 대한 합의가 없는 현 상황에서, 사기업은 국가사업의 계약 가격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더욱 허리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사회 모든 분야에 가격 경쟁의 원리가 적용되면서 한국 사회는 ‘좋은 디자인’을 접할 기회조차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공짜로 일하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지금처럼 국가사업을 기준으로 책정된 초저가 수준의 가격을 가지고 협상을 지속해야 할까. 이러한 분위기에 흠집을 내고자 현직 디자이너들이 나섰다. 일러스트레이터 커뮤니티 ‘산그림’은 소속 작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항목별로 단가를 명시한 ‘일러스트레이션 표준 평균단가’를 매년 공개한다. 여기에는 단행본의 종류, 판형, 크기에 따라 표준 평균 단가가 제시돼있으며, 이외의 다양한 경우에 대해서도 가격을 어떻게 매길 것인지가 상세히 적혀있다. 이는 실제로 지불하게 될 금액이 얼마인지 궁금한 클라이언트에게 직관적인 지침서가 되며, 당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김소미 씨는 이에 대해 “단가에 대한 기준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 참고할 최소한의 장치가 된다”고 평가했다.


  김소미 씨와 신인아 씨가 속한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FDSC)’은 지난 8월 26일 마포디자인출판지원센터에서 ‘디자이너의 수입 그리고 지출’이라는 주제로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구체적인 단가를 산출하기보다는 행사에 참석한 디자이너들이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주로 공유했다. 신 씨는 “명함을 만드는 데 300만원이 든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이걸 잘게 쪼개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최소한의 방어 기술과 팁을 나누는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노동비용에 대해 말하는 디자이너가 속물적인 사람으로 비치는 업계의 분위기를 꼬집으며 “내 삶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돈 얘기를 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신 씨는 “당장 내일 미팅에 가서 한 마디라도 더 해보자는 것”이라며 현재 FDSC의 활동 방향 또한 디자이너들의 위축된 심리를 끌어올리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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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SC가 개최한 토크 프로그램 ⓒFDSC



  고은비 씨도 주변에서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는 “‘의뢰받은 작업에 대해 얼마를 받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올라오면, 다른 친구들이나 언니들이 ‘이 가격 이하로는 받지 마라. 그럴 바엔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말해준다”고 떠올렸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공짜로 일하겠다는 건 아니”라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니까 더 좋은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힘줘 말했다. ‘덕업일치’는 열정페이를 정당화할 수 없다. 노동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던 판을 뒤집기 위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디자이너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