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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서 불안한 ‘그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이진혁 기자 (hyugin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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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독일의 젊은 영화작가들은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며 새로운 독일영화의 창조를 선언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지나간 지 17년 째 되는 해의 일이다. 전쟁 이후 독일영화계는 침체를 거듭했다. 이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감독들은 독일영화의 미국화를 비판하고 나섰다. 독일인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사회에 팽배한 물질주의를 드러내는 것, 이른바 ‘뉴저먼시네마’의 시작이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도 이 흐름 안에서 탄생했다.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포스터


소외된 자들의 불안이 서로를 보듬다
는 늙은 미망인과 아랍계 청년의 사랑을 그린다. 영화는 “행복이 항상 달콤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멘트로 시작한다. 이 말은 시종일관 영화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 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엠미는 자녀를 독립시키고 혼자 사는 늙은 청소부다. 그녀는 비 오는 어느 날,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술집에서 알리를 만난다. 알리는 모로코 출신의 아랍계 노동자다. 술집에는 몽환적인 아랍 지역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알리는 엠미에게 “혼자 있는 게 안쓰러워 보인다”며 같이 춤출 것을 권한다. 그들의 외로움은 나이와 민족을 넘어 애정으로 바뀐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들의 결혼은 독일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없는’ 이상한 일이다. “독일에서 아랍인은 벌레만도 못하다”는 알리의 말처럼, 아랍인을 멸시하는 정서가 독일 사회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베를린 올림픽 이후 독일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로 자리 잡았다. 가족, 동료, 이웃들의 시선은 한순간에 바뀌고 그들이 발 딛고 있던 삶의 공간은 부서져 갔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그들은 여행을 다녀온다. 그들의 여행 이후 엠미와 알리를 대하는 싸늘한 태도는 곧 정반대로 달라진다. 자식들은 그들을 환영했고, 그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겠다던 상점 주인이 반갑게 인사한다. 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주위의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 때문에 태도를 바꿨다. 엠미의 자식들은 아이의 양육을 위해서, 상점 주인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공포는 점차 그 자신들 안으로 들어온다. 주위 사람들의 위선적인 따뜻함은 그들의 관계를 차츰 갈라놓는다. 엠미는 아랍계인 알리를 무시하기 시작하고, 알리는 그 사실에 괴로워하다 옛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난다. 는 감상적인 멜로에 빠지지 않는다. 이 둘은 화해를 하지만, 난치병에 걸린 알리의 곁을 지키는 엠미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알리와 엠미의 첫 만남. 춤을 추면서 그들은 서로의 불안함을 감싸 안는다.


인종차별, 사라지지 않는 숙제
제목에서부터 ‘불안(Angst)’이란 단어를 쓸 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항상 불안하다. 이 불안은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생긴다. 영화는 특별한 촬영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떨리는 화면이 시종일관 계속된다. 그들을 둘러싼 시선과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다. 2차세계대전 후 독일에는 네오나치즘이 유행했다. 그들은 반공 반미 반유대주의를 기조로 삼았다. 전쟁 이후 절망에 빠진 국민들의 심리와 결합돼 네오나치즘은 폭력적인 형태로 변했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독일인을 위한 독일’이란 구호가 피 냄새와 함께 독일의 길거리에 울려 퍼지던 시기였다. 네오나치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인종차별은 인류가 풀어야 할 큰 숙제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스킨헤드나, 각국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어간다.

한국에도 존재하는 ‘불안한 영혼’들
외국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길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타문화를 배척하는 정서가 팽배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본격적인 다문화사회로 접어들었다. 경제 호황기에 3D업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졌고, 기업의 요구에 의해 이주노동자가 유입됐다. 문제는 이들의 지위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데 있다. 정부가 시행한 ‘산업연수생제도’는 곧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열악했고, 많은 노동자들은 임금체불에 시달렸다. 이들은 ‘연수생’을 벗어던지고 ‘불법체류자’를 택했다. 2007년 고용허가제의 시행 이후에도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은 길 위에서 쉴 새 없이 검문 요구에 시달린다. 이주노동자노조 간부들은 강제출국의 위기와 항상 대면하고 있다. 이들을 압박하는 건 제도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알리가 겪었던 것처럼 항상 타자화 된 시선에 고통 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을 잠정적 범죄자로,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존재로 대한다. 심지어는 이주노동자가 국내의 일자리를 잠식한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국사회의 배타적 정서는, 그들의 ‘코리안드림’을 산산조각내고 있다.
이는 노동의 영역을 넘어 생활의 영역에도 존재한다. ‘다문화가정’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진다. 한국사회에서 국제결혼은 더 이상 별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 한국으로 온 ‘어린 신부’들은 한국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농촌지역에서는 외국인 신부와의 결혼이 ‘전형적인 결혼 형태’로 자리매김 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남성 가운데 40% 이상이 국제결혼을 했다. 여성 결혼이민자는 동남아 출신 비율이 월등히 높다. 그들의 연령은 배우자보다 평균 10살이 어리다. 문제는 그들의 반수 이상이 2년이 안돼 한국을 떠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문화적 ‘차별’에 괴로워한다. 언어 차이로 인한 고통이 가장 크다. “백인이 어눌하게 한국말을 하면 한국 사람들은 호의를 베풀지만, 동남아 사람이 어눌하게 한국말을 하면 한국 사람들은 무시한다”는 게 그들의 말이다. 도 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의 원제목은 ‘Angst eseen Seele auf’다. 알리가 엠미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말하는 대사다. 모로코의 속담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인데, 사실 이 문장의 어법은 틀렸다. 의도적으로 틀린 말을 제목으로 사용한 것은, 외국인들의 언어로 인한 고통과 그들이 독일에 적응해 살기 힘들다는 메타포다.
아직도 이 사회엔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법체류자 단속을 주장하는 집회의 모습.

국경 없는 마을에서 한 이주 노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국제전화카드를 이용해 집에 전화를 하고 있다.

‘다문화’를 넘어, ‘다민족’으로
농촌지역 다문화가정의 2세도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다. 혼혈아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예전 한국사회에서 ‘튀기’라는 말이 얼마나 경멸적인 어조로 사용됐는지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한 혼혈인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른들은 태생이 의심스럽다며 수군거렸고, 아이들은 툭 하면 흰둥이, 마녀라며 놀려댔다. 악의는 없더라도,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게 설명을 요구한다. 너는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냐고”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쉽게 따돌림 당하고, 쉽게 상처 입는다. 그들은 다른 피를 갖고 다른 피부색으로 태어났다. 이는 평생 그들을 옭매는 현대판 ‘주홍글씨’다. 혼혈아들은 국사시간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자랑은 나에게 치명적인 비수였다. 우리는 어디에 포함돼야 하나”고 반문한다.
‘다문화 사회’라는 말 자체도 많은 걸 은폐하고 있다. 혹자는 ‘다민족 사회’라는 말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한국사회의 단일민족에 대한 신화는 공고하다. 실제로 전후 한국사회는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된 측면이 크다. 국가의 어려움이 닥치면 당시 대통령들은 ‘유구한 역사’와 ‘단일 민족’을 강조해 왔다. 70년대에 만들어진 그 신화가 현재 외국인의 유입으로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에 나오는 사람들은 ‘순수 게르만이냐 아니냐’에 집착한다. 그리고 게르만이 아닌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히틀러, 나치스의 비극도 거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면, 현재 한국사회에 팽배한 단일민족 담론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은 더 이상 ‘한민족’으로 특정지을 수 없다. “다양한 민족이 공존한다는 걸 인정한 후에야, 진정으로 차이를 인정하고 화합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알리의 병상을 지키는 엠미의 모습이다. 그들은 끝끝내 이해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는 사회비판적 멜로드라마의 효시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파고든다. 영화는 소외를 말하고, 차별에 저항한다. 파스빈더 감독은 어설픈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사회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논리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하다. 사람의 불안은 대부분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함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인류는 하나”라는 믿음도, 문명의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도 이제는 공허하다. 오히려 현대가 될 수록 사람이 느끼는 불안함은 파편화 돼, ‘이제 우리는 무엇에 불안해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게 됐다. 그야 말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건, 세상 어디에도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피부색은 사람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이 땅에는 국경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이에요. 삶이란 한 순간에 끝나버리죠. 결국 뭐가 있겠어요?” “울지 말아요.” “너무 행복해서… 두려워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있죠.” 영화 속 알리와 엠미의 대화다. 우리사회는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많은, 불안한 엠미와 알리를 만들고 있다. 알리의 병상을 지키는 엠미의 모습은 쓸쓸하다. 그 쓸쓸함은 우리에게 잔잔한 파문을 남기며 말한다. “당신이 차별하는 어떤 사람은, 나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