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호 > 문화 >필름通
보아라, 이것이 인류 문명이나니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SF로 인류문명을 이야기하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황지우 기자 (cfmmd@snu.ac.kr)

조회 수:836

1978년 5월부터 1995년 4월까지 미국의 첨단과학 분야 연구소와 항공사 등지에 정체모를 우편물이 배달됐다. 그 우편물을 아무 의심없이 개봉한 연구소 직원은 그제서야 그것이 폭탄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16년간 모두 3명이 사망했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어느 날 연이은 테러사건의 범인임을 자처한 한 남자가 워싱턴 포스트에 자신의 글을 게재할 것을 요구했고,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현대 기술문명을 맹렬히 비판한다. 마치 한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FBI의 수사 끝에 테러리스트가 검거됐다. 범인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였던 천재수학자 시오도르 카진스키였다. 세상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s)를 폭파(bomb)하는 자, “유나바머(Unabomber)”.
유나바머는 왜 안락한 교수란 직업을 뒤로하고 ‘전업 테러리스트’가 됐을까. 그는 현대 기술문명이 다가올 미래가 너무나 두렵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테러 동기를 설명한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테크놀로지는 자유에게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라고 강요하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전체 테크놀로지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다.” 그에게 현대 기술문명은 그 자체로 디스토피아였으며, 전복시켜야만 했던 존재였다. 그는 그리하여 사제폭탄을 우편함에 넣었던 것이다.

거대하면서 잔인했던 인류 문명에 관한 에세이

유나바머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인류는 태고적부터 ‘진보’해왔다고 한다. 인류는 생존의 사투를 벌여왔고, 그렇게 도구를 발명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인류가 만들어온 현대 기술문명이 유나바머라는 ‘암세포’를 스스로 잉태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이 모순의 역사를 스탠리 큐브릭은 당대 최첨단 시각효과를 동원해 2시간 40분에 이르는 거대한 영상미로 만들어냈다. 는 바로 그 거대하면서도 잔인했던 인류 문명에 관한 에세이다.
영화는 인류의 선사시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20분간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다. 오로지 원초적인 자연의 소리와 원숭이들의 괴성만이 들릴 뿐이다. 괴성을 지르는 그 원숭이는 곧 인류의 조상이며, 인류의 조상은 두 부족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폭력으로 생존을 쟁취하던 그 시대, 드넓은 초원에서 한 원숭이가 뼈다귀를 손에 쥔다. 그리고 그 뼈다귀를 휘두르는 바로 그 때, 도구를 발명해내는 역사적인 순간이 펼쳐진다. 영화의 백미인 장엄한 오케스트라 곡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관객을 압도한다.
그리고 영화는 우주여행에 나선 비행사들과 그들에게 저항하는 컴퓨터 사이의 싸움을 그린 ‘인류 대 문명의 결투’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우주비행선의 컴퓨터 할(HAL)이 조종사들을 하나하나 살해하는 모습이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로 우주비행사를 내던지는 할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하다.

우주선의 컴퓨터가 우주조종사를 한 명씩 살해하는 모습은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오마주다.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한 장면.


이만큼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비극적인 오마주가 있을까. 인간 일상의 안락함과 진보를 위해 만들어져왔던 기술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을 도리어 얽매고 있다. 아니, 이제 기술은 단순히 인간을 얽매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기술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마치 HAL의 카메라가 우리를 응시할 때 감지된 잔인한 살기와도 같은 느낌이 온 세상을 휘감고 있다.

현대 기술문명은 위험과 공포를 담보로 발전해왔다. 자연재해, 전염병과 같이 도저히 인간이 어쩔 수 없었던 천재지변이 위험의 전부였던 원시사회와 달리, 현대사회는 온 세상이 ‘만들어진’ 위험과 공포로 가득하다. 감기약 설명서에 써있는 ‘부작용’에 대한 설명은 만들어진 위험과 공포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은유다. 건강해지기 위해 먹었던 감기약이 피부발진을 일으키고,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심하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아이러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만들 수 없다는 현실, 게다가 자칫하면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스스로 만든다는 사실은 공황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자신이 만든 덫에 스스로 걸리는 모양새가 현대 기술문명 디스토피아의 전부라면 문제 해결은 단순할 수 있다. 조금 더 조심하면 되고, 조금 더 발전된 기술을 추구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공포스럽게 하는 것은 그 ‘덫’이 스스로 움직이며 우리의 발목을 낚아채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곳에서 펼쳐지는

그리 멀리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얼마 전부터 서울의 지하철역에 자동카드충전기가 하나 둘 설치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기계에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항상 보이던 역무원이 하나 둘 사라져간다. 곧이어 서울메트로 측은 ‘지속되는 적자 누적’을 해결하고 ‘대중교통의 첨단화’를 목적으로 ‘지하철 무인화’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마치 HAL이 우주조종사를 칠흑 같은 우주로 던져버리듯, 그렇게 역무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빈 자리에는 자동카드충전기가 의기양양하게 앉아 시민들을 상대하고 있다. 더 가까운 곳으로 가볼까? 중앙도서관 4층을 보라.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카페 가운데 서있는 자동도서대출기는 대출업무를 맡았던 직원들, 근로봉사장학생들을 내몰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이런 모습은 산업혁명 이래 우리에겐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이 돼버렸다.

지하철 자동카드충전기는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실 속의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다.


자동도서대출기와 비슷한 시기에 설치된 중앙도서관 지정좌석배정기계도 유쾌하지 않은 단상이다. 학생들의 별다른 동의절차도 없이 떡하니 들어선 그 기계 앞에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이상한 건 지정좌석제 때문에 불편해졌다며 투덜대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기계 앞에 서서 자리표를 뽑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혹 겨우 자리표를 뽑고 자신이 ‘차지’한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경우, 두 사람 중 누군가는 기분이 상한 채 다른 자리를 찾게 된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좌석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종료됐다고 통보해주는 지정좌석배정기계에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기계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지정좌석배정기계를 바라보며 하늘에서 갑자기 UFO가 내려와 평온했던 마을을 파괴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건 지나친 ‘오바’일까. 중앙도서관의 질서를 지배하는 존재는 수위아저씨도, 학생도 아닌 ‘위대하신 자동도서대출기’다.

패배감과 절망감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다

이렇게 신나게 기술문명에 대한 욕설을 늘어놔도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컴퓨터로 세상을 보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다. 이미 컴퓨터에, 핸드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강제로 컴퓨터 선을 끊고 핸드폰을 정지시켜봤자 금단현상만 일으킬 뿐이다. 이미 전력질주하고 있는 현대 문명에 브레이크를 걸어보지만 그 관성에 의해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섬유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영국 노동자들은 곡괭이를 들고 공장으로 가 섬유기계를 때려부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산업혁명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발전의 방향이 정해진 문명은 그렇게 발전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는 것은 분노 혹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 뿐이다. 섬유기계를 파괴하려 달려가는 노동자들이 쏟아냈던 그 분노거나, 혹은 도저히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만이 남는 것이다. 어두운 디스토피아에서 스탠리 큐브릭은 ‘뉴 차일드’, 즉 신인류의 탄생을 선언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인간의 생로병사가 펼쳐지고 ‘뉴 차일드’가 잉태되는 모습은 현란한 영상미와 함께 우리를 압도한다. 그리고 는 이야기한다. ‘인류는 싸움과 폭력에서 시작해 도구를 발명했고, 기술문명의 진보와 소외로부터 끊임없이 벌어졌던 싸움 끝에, 마침내 신인류의 탄생을 바라보게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술문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한 장면.


그 신인류는 누구인가? 더 이상 현실의 가망은 없다는 패배감과 이 세상에서 또다시 아둥바둥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만들어낸 유나바머일까? 그 신인류가 누구일지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대답을 해왔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에서 네오를 이야기했고, 안도 히데아키는 에서 아담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영화, 소설, 드라마 등에서 수많은 ‘뉴 차일드’가 제시됐음에도 여전히 세상은 구원받지 못한 듯 하다.

소심한 반항,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뉴 차일드’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오늘도 일상에서 기계문명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비겁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또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혹은 도망가거나. 아무리 교통카드충전기가 설치되더라도 기어코 역무원에게 교통카드 충전을 부탁하는 꼬장한 자존심. 오로지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지정좌석만 예약해놓고 밥을 먹으러 가는 못된 장난기. 구원자가 오지 않는 이 세상에 평범한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정도의 ‘소심한 반항’ 수준뿐이다. 그렇게 는 막을 내린다. 여전히 귓가에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웅장한 팀파니 소리가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