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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의 ‘화려함’ 이면의 화려하지 않은 이야기 <화려한 일족>에 나타나는 가부장 중심의 왜곡된 가족구조와 기업구조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박기석 기자 (soph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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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한 드라마에 공감하고 열광했다. 또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드라마의 섬세한 묘사에 공감했다. 이 드라마가 바로 MBC에서 방영한 이다.
드라마 의 원작은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가 쓴 소설 「하얀거탑(白い巨塔)」이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드러나지 않은 현실을 예리하게 관찰해 이를 실감나게 묘사하는 그의 소설의 특징은 그의 기자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하얀거탑」외에도 많은 사회파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 중 「화려한 일족(華麗なる一族)」은 2007년 1/4분기에 일본 TBS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됐다. 이 드라마는 전통적으로 드라마 강국이었던 TBS가 최근 드라마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내놓은 대작이라는 점, 일본 대(大)스타인 키무라 타쿠야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원작자가 야마자키 도요코라는 점에서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됐다. MBC 의 성공과 최근 「화려한 일족」의 번역본 출판은 국내에는 아직 방영되지도 않은 드라마 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은 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드라마 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렴풋이 인식하지만 세상에 공개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병원 내 권력암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본 사회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 내의 수직적 위계질서는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에 공감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은 한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그리면서, 1960년대 후반 경제성장기의 일본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근대(近代) 시기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현대(現代)에는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점에서 에 나오는 일본의 가족구조와 기업구조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닮아있다.
가족 행사 속에서도 가부장 중심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만표가(家)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으로 그려진다. 가부장 중심의 가족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만표가의 정월 초하루 행사다. 정월 초하루면 만표가의 가족들은 호텔에 모여 만표재벌의 총수이자 만표가의 가부장인 만표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고 식사를 한다. 이 때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정부(情婦)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은 기모노를 입는다. 사진을 찍을 때는 가부장인 만표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지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진다. 이 행사는 가부장인 만표 다이스케의 권위를 높이고, 만표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 내의 위계적 질서를 강화시킨다.
이 장면은 중요한 가족 행사 때 남자들은 양복을, 여자들은 한복을 입으며,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가부장을 중심으로 가족 내의 지위에 따라 사진 찍는 위치가 정해지는 우리나라의 가족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드라마는 가부장 중심의 행사를 상징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만표가(家)가 재벌가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그 가부장적인 속성은 일본 및 한국의 일반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부장 중심의 가족과 기업이 합쳐진 구조가 바로 재벌이다. 이를테면 삼성그룹은 가부장인 이병철 회장이 기업집단 중 모기업을 경영하고 자식들이 그 밑의 기업들을 경영한다.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들 대부분이 가부장 중심의 가족질서가 반영된 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의 만표재벌 역시 한국의 재벌과 다르지 않다. 만표재벌의 모기업인 한신은행은 가부장인 만표 다이스케가 경영한다. 그리고 그 밑의 한신특수제강은 그의 첫째 아들인 만표 텟페이가 경영하며, 둘째 아들은 한신은행의 대출과장으로 일한다. 이처럼 만표재벌은 경제성장기의 일본 재벌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 재벌과도 같은 구조를 드러낸다.
가족 내 가부장인 만표 다이스케는 회사 내에서도 가부장과 같은 절대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가부장 중심 가족구조는 기업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기업에서 사장이 가부장이 돼 그 기업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집단주의를 낳는다. 이 드라마에서도 가부장 중심의 집단주의적인 기업구조가 나타난다. 첫 화에서 한신은행의 은행장인 만표 다이스케가 아래층에서 영업하는 직원들을 내려다보자 직원들이 일동 기립하여 인사를 하는 장면은 가부장 중심의 기업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신특수제강의 실질적 오너인 만표 텟페이는 그의 아버지처럼 권위적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이 목표에 전념하게 한다.
기업가의 열정과 신념 그리고 회사 내의 집단주의가 결합해 경제성장기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드라마에서 기업의 집단주의는 만표 텟페이의 경영자로서의 신념, 열정과 합쳐지면서 하나의 ‘신화’가 된다. 한신특수제강은 선철(철성분이 높은 철)을 만들 수 있는 고로(高爐) 시설이 없다. 이에 제국제철에서 선철을 구입해 쓰지만 한신특수제강을 견제하기 위해 제국제철에서는 선철의 공급을 중단시킨다. 만표 텟페이는 이에 고로를 짓겠다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목표를 갖고 노동자들을 총동원한다. 노동자들은 만표 텟페이의 열정에 감화돼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물론 고로 건설 중 많은 고비가 찾아오지만 이때마다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매우 빠른 속도로 고로를 거의 완공시킨다.
한 기업가의 '신화'적인 성공스토리는 우리나라의 재벌 총수나 CEO의 자서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70년대 한 재벌 총수는 미국에서 수입해오던 자동차 부품을 직접 만들기 위해 그 당시 무모해 보이던 자동차 공장 건설을 추진했고, 이러한 노력은 현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초석이 됐다. 이 밖에도 파업하던 노동자들이 재벌 총수의 열정에 감화돼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됐다거나, 고속도로 구간 공사를 다른 기업보다 빨리 끝내기 위해 재벌 총수의 지휘 하에 노동자들이 단결해 이뤄냈다는 이야기 등은 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신화’가 됐다. 그러나 '신화' 이면에는 '회사를 위해서'라는 집단주의의 미명 하에 그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 권리를 반납한 노동자들의 '비화(悲話)'가 숨겨져있다. 그러나 드라마는 노동자의 '비화'를 다루지 않는다.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폭파사고에 많은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치지만, 이를 만표 텟페이라는 경영자의 시련으로만 취급할 뿐, 노동자의 삶에는 전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마치 한국의 재벌가와 한국의 경제성장기를 보는 듯하다. 신념과 열정을 가진 한 기업가의 ‘신화’와 경제성장이라는 ‘빛’부터 가부장 중심의 왜곡된 가족구조와 기업구조, 나아가 책모(策謀)가 난무하는 정치, 경제계의 ‘어둠’까지 매우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라는 속성 때문에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자극적인 소재들이 등장한다. 처첩동거(妻妾同居)와 삼각 성관계, 근친상간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 죽은 국내 재벌 총수의 혼외 딸들이 재산 소송을 걸었다는 보도를 보면 이러한 소재들 역시 가부장 중심의 왜곡된 가족구조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