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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손간판들은 어디로 갔나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수제 영화간판을 찾아서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김보람 기자 (yullov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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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년 전만 해도 전국의 극장가는 대부분 사람이 직접 그린 영화간판을 내걸었다. 주인공을 쏙 빼닮은 간판이 있는가 하면 변두리 극장에서는 딴 사람처럼 그린 간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관객들은 간판에 그려진 배우가 ‘닮았네, 안 닮았네’ 수다를 떨며 극장에 들어서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손으로 그린 간판은 인터넷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추억의 풍경이 돼 버렸다.

큰 그림에 대한 동경이 이끈 간판쟁이의 길
박태규(43)씨가 ‘간판쟁이’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91년의 일이다. ‘큰 그림’이 좋아보여서 무작정 광주극장에 찾아갔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박 씨는 대학 시절 사회적 현안을 커다란 걸개그림에 녹여내는 미술패 활동을 했었다. “간판 그리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어요. 걸개그림을 더 사실적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손으로 영화간판을 제작하던 시절에는 극장마다 미술부가 있었다. 미술부장 밑에 몇 명의 연습생들이 그림을 배우는 도제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영화간판을 그릴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협소한 공간에서 커다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박 씨는 큰 간판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아 감을 잡는데만 2~3년이 걸렸는데, 이제는 전체 형상이 금방 머릿속에 그려진다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광주극장의 미술실. 입구에서부터 물씬 풍기는 페인트 냄새도 이젠 '추억'이다.

'영화 1번지' 종로 간판쟁이의 자부심
종로가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 등을 내세워 ‘영화 1번지’로 대접받던 시절 영화간판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종로2가 허리우드 극장의 미술부에서 간판 일을 시작했다는 이태동(43) 씨는 당시 서울 사대문 내의 정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개봉관이 얼마 없었던 데다가, 신작을 보려면 종로로 가야한다는 공식이 있어서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경우도 많았죠.”
수작업 영화간판의 핵심은 실제 배우와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의 문제다. “배우를 실제와 닮게 그리는 것은 기본이고,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까지 절묘하게 담아내야 사대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는 영화간판의 전성기였다. 극장에서 미술부 모집 공고를 내면 그림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십명이 큰 강당에서 실기 시험을 쳐서 그림을 가장 똑같이 그려낸 사람이 미술부장으로 채용됐다. 당시에는 실사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던 까닭에 국빈 방한시 환영의 의미로 거대한 인물 그림을 거는 관례가 있었다. 그 작업을 도맡아 하던 것도 바로 영화 간판 미술가들이었다.
이태동 씨가 영화 '밀양' 간판을 그리고 있다. 전도연의 얼굴을 재현하는 섬세한 붓놀림이 인상적이다.
그들이 한 극장의 간판만을 전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태동 씨 역시 한창 때는 7-8개의 극장을 맡았다. 영화간판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1-3일 정도. 그러나 이 씨는 오랜 작업으로 자신만의 ‘비법’을 터득해 하루에 7개까지 그려본 적도 있노라고 덧붙였다.
그 때만 해도 영화 홍보를 포스터와 간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영화사에서 제공한 스틸 사진이나 포스터를 보고 그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인물의 배치나 화면 구성은 전적으로 간판 미술가의 재량에 따른다. 그래서 영화배우들이 직접 음료수를 사 들고 찾아와 ‘신경써서 잘 그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영화사에서 간판 작업이 끝날 무렵 미술부 직원들을 초청해 회식 자리를 갖기도 했다. “주연 배우야 간판에 당연히 이름이 들어가지만 조연의 경우 몇 명을 골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유명해진 중견 배우 한 분이 자기 이름을 왜 안 썼냐고 저를 찾아와 항의를 하신 적도 있었죠.” 그 시절에는 영화간판을 하나 그릴 때마다 7백만원에서 1천만원의 대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를 받은 셈이다.

실사출력의 물결에 밀려 추억 속으로 사라진 손간판
이수역 씨네맥스. 극장은 문을 닫고 간판만 덩그라니 남았다.
용산 프린스 성인극장의 '자극적인' 영화간판은 4년 동안 자리를 지키느라 빛이 바랬다.
하지만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손으로 그린 간판은 빠르고 저렴한 컴퓨터 실사간판에 자리를 내 주게 됐다. 초대형 복합상영관이 들어서면서 그나마 수제 간판의 명맥을 유지하던 몇몇 ‘동네 극장’들도 문을 닫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수제 간판을 걸던 은평구 도원시네마가 올 3월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서울 내에서는 더 이상 손으로 그린 영화 간판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변두리에서 수제 간판을 내건 몇몇 성인극장을 찾을 수 있기는 하나, 색바랜 간판은 경제적인 이유로 교체되지 않은 채 극장의 존재를 알리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용산에 위치한 프린스 성인극장의 관계자는 “마지막 간판을 그린 지도 4년이 넘었다”며 간판을 교체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경기도에서도 산본시네마 등 몇몇 극장들이 수제 간판을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예전만큼의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태규 씨가 지난 4월 완성한 '우리학교' 간판. 김명준 감독의 친필 메시지가 담겨있다.
광주극장은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손간판 극장이다. 2003년까지 광주극장의 마지막 미술부 직원으로 남아 있었던 박태규 씨는 예전처럼 극장에 상주하지 않는다. 대신에 광주극장 김형수 대표가 이란 영화 , 배창호 감독의 ,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등 특별히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선정해 1년에 1-2개의 영화 간판을 박 씨에게 의뢰하고 있다. 지난 달에는 3년 간 걸려있던 간판을 떼어내고 김명준 감독의 간판 상판식을 가졌다. 손으로 정성껏 그린 영화 간판은 광주극장의 고유한 정체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 많던 ‘간판쟁이’들은 어디로 갔나
극장을 떠난 간판 미술가들은 새로운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오랫동안 손에 배었던 붓 감촉을 잊지 못해 대개는 미술과 관련된 업종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박태규 씨는 ‘자운영 미술학교’라는 생태미술교실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태동 씨 역시 인테리어 사업에 종사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산본시네마의 영화간판을 그리고 있다. 이 씨는 “당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도 그룹을 지어 놀이공원이나 식당, 까페 등의 벽화 장식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변두리의 몇몇 간판 미술가들은 삼각지 화랑거리에 모여들었다. 여기서 이들은 대중적인 소재로 대량 제작되는 수출용 ‘이발소 그림’으로 생계를 꾸렸다. 한 때 점당 10만원을 받을 정도로 경기가 좋던 시절도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로 수입이 급감했다. 지난달에는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던 한 전직 간판 미술가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위조한 혐의로 검거된 사례도 있었다.

영화와 함께 막 내리는 간판, 이제는 추억속으로
이제 곧 이 간판에 흰 페인트가 덧칠되고, 새로운 영화가 등장할 것이다.
영화가 막을 내리면 동시에 간판도 그 운명을 마감했다. 몇 주일간 극장 전면에 붙어있던 간판도 함께 내려와 흰 페인트로 덧칠돼 다음 작품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애써 그린 간판을 지우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태동 씨는 소탈한 웃음으로 답했다. “영화가 상영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지나갔잖아요. 제 몫을 다 했으니 다음을 위해 기꺼이 사라져야죠.” 수제 영화간판도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제 몫을 다했다 하더라도 손수 그린 간판들이 사라지는 작금의 세태 앞에 밀려오는 쓸쓸함은 쉽게 감출 수 없다.
박태규 씨도 섭섭함을 토로했다. “사실 영화간판은 ‘3류 미술’이죠. 하지만 3류만이 줄 수 있는 사람 냄새가 있는 거잖아요. 거리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누구나 평가할 수 있는 그림. 그래서 손간판에 더 애착이 가요.” 박 씨의 영화간판에 대한 애정은 2002년에 열린 자신의 개인전인 ‘마지막 영화간판쟁이 - 박태규展’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박 씨는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3 집행유예’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라는 가상의 영화를 설정하고, 광주 5.18자유공원 영창 헌병대식당에 간판을 그려 걸었던 것이다. 박 씨의 작품들은 현재 광주극장 3층에 조촐하게 전시돼 있다. “손간판을 정리해 둔 곳은 이 곳 광주극장 3층밖에 없어요. 어떻게든 사람들 곁에서 오래도록 기억됐으면 좋겠는데...”
광주극장에 전시된 박태규 씨의 '작품'들에는 손그림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영화간판이 주는 과거의 향수를 현재에 재현한 좋은 사례를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도쿄 외곽의 오우메(靑梅)에는 약 30년간 영화간판을 그려오던 간판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들을 상가에 걸어놓은 거리가 있다. 란제리전문점은 '카사블랑카', 음반전문점은 '사운드 오브 뮤직' 등 명화와 상점이 절묘히 어우러진 이 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찾는 추억의 명소가 됐다.

기억하는 이가 있는 한 ‘손그림 간판’은 계속될 것
“극장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색깔, 정겨운 느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매력이 시설적인 면에서 느껴진다는 점이 안타까운 거죠.” 멀티플렉스와 실사 간판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논리는 동네 극장의 손간판이 주는 인간적인 매력을 잠식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찾는 이들이 있을 때까지, 영화 간판을 그리고 싶다”는 마지막 간판쟁이들의 눈빛은 자못 진지했다. 과거가 박제로 남아있지 않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과거를 추억하는 현재의 ‘사람’이다. 간판은 사라져도, 간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그들의 머릿속에서 빛바랜 필름은 ‘현재 상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