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호 > 문화 >필름通
누군가는 알아야 했던 슬픈 진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2004)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김윤주 (naoco91@snu.ac.kr)

조회 수:453

소년은 공허하기만 한 무표정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슬픔을 읽어낸다.
제 57회 칸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은 14살짜리 소년에게 돌아갔다. 그 주인공은 이시라기 유야,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그의 데뷔작이었다. 심사위원 중 한명은 말했다. “수많은 영화를 봤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것은 오직 이시라기 유야의 눈빛뿐이었다.” 영화의 포스터는 이시라기 유야의 눈빛을 여과없이 담고 있다. 그는 울고 있지 않고 그저 무표정만을 보여주고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이 마음에 스며든다.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표정. 어린 나이에 그는 무엇을 알아버렸고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아무도 몰랐지만 존재했던 아이들
영화는 도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어느 날 아파트에 한 가족이 이사온다. 어머니는 남편은 해외에 나가있어 외동아들만 집에 있을 때가 많을 거라고 옆집에 인사를 한다. 하지만 이삿짐을 풀자 여행가방 속에서 2명의 아이들이 나오고 해가 지자 장녀 교코까지 돌아와 5명의 가족이 모두 모인다. “아이가 많으면 이웃들이 싫어하니까 절대 들키면 안돼.” 싱글맘인 엄마는 그렇게 아이들을 단속한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그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가 모두 다른 4명의 아이의 엄마가 됐다. 학교에 보내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학교에 가면 아빠 없다고 왕따 당할거야’라고 대꾸하는 이 철없는 엄마는 어느 날 약간의 돈과 편지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네 남매는 홀로 남게 됐다. 아무리 야무지다고는 해도 어린 아이인 장남 아키라. 그는 엄마와 잤던 남자들을 찾아가 받은 돈으로 동생들을 보살핀다. 하지만 그마저 떨어지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유통기한 지난 인스턴트 식품들 뿐이다. 주변 어른들은 아이들이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편의점 아르바이트 언니가 가끔 안부를 묻고 소소한 도움을 준다. 또래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에 상처받은 왕따 소녀만이 그들의 곁을 지킨다. 한창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야 할 시기에 그렇게 남매들은 홀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버텨 나간다.
관심의 부재가 앗아간 것들 베란다에는 아이들이 심어놓은 화초가 자란다. 아이들이 물을 주고 볕 잘 드는 곳에 놓아두자 화초는 잘 자라난다. 하지만 물을 주지 않고 방치한 화초는 금세 잡초가 무성해져 까맣게 타들어가 버린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키라는 의젓하게 동생을 돌보는 장남임과 동시에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다른 또래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고, 야구도 하고 싶다. 하지만 보살핌의 부재는 달려가려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 현실에서 그는 서툰 계산으로 가계부를 쓰며 돈 걱정을 해야 하고, 편의점에 찾아가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을 구걸해야 한다. 그 나이에 맞는 당연한 소망은 그에게 사치로만 다가올 뿐이다. 장녀 교코 또한 이러한 소망들을 참아야만 한다. 장난감 피아노를 치며 다음에는 진짜 피아노를 사겠다고 돈을 모았지만 그마저도 생활고에 빼앗겨 버린다. “학교 가고 싶어”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녀의 손에 엄마가 발라줬던 매니큐어는 꼭 엄마의 부재만큼 벗겨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장난꾸러기 시게루의 소원은 밖에 나가서 뛰어 노는 것이다. 하지만 밝은 세상에 나가면 존재를 들킨다. 그래서 그는 작은 방 안에 갇혀 밖에 나가 노는 꿈만을 꿀 수밖에 없다. 막내 유키의 꿈은 가장 소박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실컷 먹는 것. 하지만 그 소원을 유키는 죽어서 이룬다. 어느 날 유키는 의자에서 떨어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죽음이란 단어조차 배우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키가 그들의 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키를 여행 가방 속에 초콜릿과 함께 넣어 비행기가 보이는 곳에 묻는다. 편의점 아저씨는 말한다. “소풍가는 거니? 좋겠구나.” 편의점 아저씨도 엄마도 그 어떤 어른도 아무도 몰랐다. 그저 아이들만 알았다. 유키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남은 이들은 남은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살핌의 울타리 밖에서 상처입는 영혼들
티없이 밝은 4남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들의 표정만큼 밝고 아름답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눈물을 보이는 건 우리들이다. 그토록 순수한 아이들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 죄책감, 그리고 그것이 실화라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들이 조용히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아무도 몰랐던 그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국지역아동센터 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나홀로 아동은 180만 명이다. 이 중 정부시설에서 보호받는 20만 명을 제외한 160만 명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나홀로 아동’이란 맞벌이 등의 이유로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방임 아동들을 말한다. 생활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기된 아동들은 성장기에 필요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마치 영화 속 4남매처럼 그들은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A양은 주말인데도 방과 후 수업에 참가하기 위해 등교했다. 휴교일이라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고 A양은 운동장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그 날 A양은 학교에서 1km정도 떨어진 그의 집으로 끌려가 성폭행 당했다. 지난 2월에 일어난 ‘김수철 사건’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범행이 일어날 때 직장에 있었다. 슬픈 동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7월 발생한 대구 성폭행 사건의 피해 아동 역시 나홀로 아동이었다. 아이는 고혈압인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못해 오빠와 함께 방기돼 있었다.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동 성폭력이 절반 이상이 낮 시간대 집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닌다 하여 열쇠아동으로 칭해지기도 하는 나홀로 아동들이 홀로 집에 있다 피해를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홀로 아동들은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가고 있다.
정부 지원 사각지대를 떠도는 나홀로 아동
나홀로 아동이 겪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충분한 보살핌과 관심을 받아야 할 시기에 이들은 PC방과 친구 집을 전전한다. 조금이라도 넉넉한 아이들은 학원에 간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지역아동센터가 있지만 예산은 부족하다. 지역아동센터에 지원되는 예산은 한 달 평균 320만원이다. 이는 2006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한달 평균 적정 운영비인 600만원과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이다. 예산이 부족해 지역아동센터는 제한 인원을 둘 수밖에 없다. 누나는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봄을 받지만 동생은 다니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의 평가 지표 또한 나홀로 아동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평가지표에 따르면 아동이 기초생활수급권자 차상위계층 등이 아니면 평가에 불이익을 받는다. 이 획일적 지표에 따른다면 맞벌이 부부의 자녀나 법적으로 재산이 있는 나홀로 가정의 자녀는 수용이 어렵게 된다. 심지어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정부는 나홀로 아동들에 대한 전수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홀로 아동에 대한 기초통계가 전무한 상황이다. 말 그대로 그들이 보살핌을 제대로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기초통계가 부실한 데 예산 집행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관계 부처간 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한 아동에게 중복으로 지원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 통계의 사각지대에 4남매가 있었고 나홀로 아동들이 있다.

아이들의 운명을 바꿀 이웃들의 작은 관심
지난 2월 일어난 김수철 사건은 나홀로 아동을 대상으로 발생한 범행이었다.
그들을 잊은 건 정부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4남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는 수많은 가구들이 살고 있었다. 집세를 걷으러 온 주인 아주머니가 4남매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그 뿐이었다. “엄마는 일하러 오사카에 가셨어요. 저희들은 친척이에요.” 그 한마디에 주인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선다.
소통이 단절되고 교류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 이웃들의 무관심은 당연한 것이 됐다. 그것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풍토로까지 인식되는 것도 사실이다. 돌봄의 정신도 희박해졌다. 사람들은 옆집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대신 집의 애완동물을 돌본다. 지역아동센터와 방과 후 돌봄 교실에서 적은 예산이나마 돌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웃들의 관심없이는 반쪽짜리 대안일 뿐이다. 영화에서 4남매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 주는 이는 왕따 소녀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들이 보인 것은 돌봄이라 하기엔 거창할 정도로 작은 관심이다. 하지만 애정 어린 한 마디 말이 4남매에게는 큰 힘이 된다. 우리 곁의 나홀로 아동들도 조그만 관심이 있었다면 아픔을 겪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다. 하지만 작은 관심이 아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비약일까.
철저한 감시보다 햇살처럼 따뜻한 관심을
감독은 아이들의 뒷모습을 따뜻한 햇살 아래 내려놓는다. 햇살처럼 따뜻한 관심이 그들에게 미치길 바라는 것처럼.
영화의 목적은 누구에게 책임소재를 묻기보다는 따뜻한 관심과 시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고 그저 지켜 보라고 한다. 그리고 강조한다. 이것은 실화였고, 우리 옆에 실제로 존재하는 일들이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막내를 잃고 3남매가 된 아이들과 이들의 곁을 지키는 왕따 소녀의 뒷모습을 비춘다. 아이들은 비극을 겪었고 이들 앞에는 아직도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어둡게 그려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따뜻한 햇살이 어루만진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는 듯이. 현 정부는 우범지대를 없애기 위해 CCTV를 설치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CCTV로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는 이제 안다. 아이들에게는 범죄를 감시하는 CCTV의 차가운 기계 눈보다 인간적인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감시가 아니라 햇살처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