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호 > 문화
혼자가 아닌, ‘우리’들의 책읽는 시간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통해 ‘낭독’의 매력을 발견하다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김윤주 기자 (naoco9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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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카페 '별꼴'에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귀로 읽는 책' 낭독회가 열리고 있다.

“나의 문디(mundi)여, 고향을 상실한 이방인으로서 나는 너에게 말하련다. 내가 그나마 핏기가 도는 입술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조용한 방 가득히 시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50여 명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시인의 음성에 귀를 모은다. 시인은 한 구절을 읽고 잠시 쉬더니 다시 책장을 넘긴다. 아버지의 죽음이 등장하는 시구에 접어들자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조용히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슬픔의 목소리는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가 닿았다. 사람들은 시를 들으며 조용히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시인은 다시 세계의 또다른 이름인 ‘문디(mundi)'를 호명했다.
“나의 문디(mundi)여, 세계 중의 세계여, 내가 끝내 돌아갈 미래의 고향이여, 너는 지금 과연 어디에 있는가.”

광화문의 한 서점에서 심보선 시인의 낭독회가 열렸다. 시인이 시를 낭독하자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11월 12일 오후 3시 광화문의 한 서점에서 심보선 시인의 낭독회가 열렸다. ‘Mundi에게’를 포함해 시인의 신작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에 수록된 시가 시인의 육성을 통해 낭독됐다. 낭독 후에는 시인이 시를 쓰던 당시 가졌던 생각들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낭독만이 주는 매력이 무엇이냐”는 한 독자의 질문에 심보선 시인은 “낭독을 하면 매번 시가 새로 만들어지는 느낌이 든다”고 대답했다. “낭독할 때마다 시가 새롭게 다가온다”는 시인은 같은 시라도 항상 다르게 읽어보는 자신의 방법을 소개했다. 읽는 속도를 다르게 하거나, 문장의 끝어절을 내리고 올리는 변주를 통해, 시인은 묵독이 주지 못하는 낭독만의 매력을 느낀다고 밝혔다.
시인을 초청해 독자와의 대화 시간을 갖는 형식의 낭독회가 최근 활발히 열리고 있다. 주로 신간을 낸 작가를 위주로 이뤄지는 추세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출간회가 주로 작가의 사인회 형식으로 이뤄진 데 비해, 외국에서는 낭독이 비교적 일반화된 문화다. 유명 작가가 낭독하는 작품의 한 구절을 듣기 위해 독자들이 모이는 경우도 많다. 최근 국내에서도 출판사와 서점을 중심으로 낭독회가 활성화돼 낭독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시인이 낭독하고 창작 동기를 설명하는 강연과 같은 방식 뿐만 아니라, 낭독과 음악이 함께하는 북콘서트, 각자 다른 책을 들고 와 85쪽을 펼쳐 돌아가면서 읽는 낭독회, 역할극 낭독회 등 보다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기도 한다. 이처럼 색다른 낭독회는 책을 읽는 행위가 주는 생소함을 없애고 직접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낭독을 더욱 친숙하게 만들고 있다.

KBS ~낭독의 발견~의 한 장면. 2005년 7월 13일 방송에서는 인순이가 출연해 '거위의 꿈'을 낭독했다. c. KBS ~낭독의 발견~
TV와 인터넷, 스마트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만나는 낭독
굳이 낭독회에 가야만 낭독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KBS 교양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은 유명 인사를 초청해 낭독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밤 12시 35분이라는 늦은 방영시간에도 불구하고, 2003년에 시작돼 현재까지 꾸준히 방영되고 있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04년에는 ‘우수프로그램 작품상’, 2008년에는 ‘올해의 아름다운 방송언어상’ 등을 수상했다. 출연자들은 낭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다 진솔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낭독을 하는 도중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2003년 당시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홍경수 전 PD는 “출연한 낭독자 한명 한명이 다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특히 가수 인순이 씨가 출연했을 당시, 인순이 씨는 당시 투병 중이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거위의 꿈’을 눈물로 낭독했다. 진행자를 포함해 지켜보던 이들까지 감동을 준 진심어린 낭독이었다. 이외에도 영상매체라는 특성을 살려, 발레나 판소리를 접목시키는 등 고정관념을 깨는 다양한 낭독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낭독과 출연자의 특성에 맞는 악기를 골라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이를 무대 위의 시각적 요소를 통해 미술적으로 제시했다.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도 낭독을 접할 수 있다. 인터넷 문학 라디오 ~문장의 소리~는 국내 유일의 문학 라디오 방송으로 대본작가와 프로듀서, 진행자 등 주요 스텝까지 모두 문인이다. 소설가, 시인 등이 돌아가며 인상적인 구절을 읽어주고 작품을 소개하는 방송은 매주 월요일 저녁 ~문장의 소리~ 홈페이지(http://radio.munjang.or.kr)에 업데이트된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볼 때나 혼자 걸어갈 때, 나지막히 들려오는 문학작품의 구절은 특별하다.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이나 ~꿈타장의 유혹하는 책읽기~는 문학 작품을 읽어주고 진행자가 감상을 덧붙이는 낭독 팟캐스트다. 다루는 작품도 시에서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다양하다. 북카페 ‘꿈꾸는 타자기’를 운영하는 꿈타장 씨는 다른 낭독 팟캐스트를 듣고 ‘나도 해보자’는 생각에 방송 진행을 시작하게 됐다. 평소 좋아하는 책을 정해 한 구절을 읽어주고 이와 관련된 정보와 느낌을 덧붙인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글을 낭독할 때는, 영화 ~그을린 사랑~의 한 장면을 언급하며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단순히 낭독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컨텐츠를 접목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묵독이 아닌, 낭독만이 주는 매력
낭독이 주목받는 이유로 꿈타장 씨는 “책이 가지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꿈타장 씨는 “문장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듣게 되니 그만큼 책의 잔향이 눈으로 읽을 때보다 더 오래 남는다”며 “읽는 호흡이라든지 리듬을 달리함에 따라 느낌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낭독의 발견~이 다른 토크쇼와 차별화되는 이유도 ‘낭독’에 있다. 홍경수 전 PD는 “낭독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자기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출연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라며 “낭독은 사소한 행위 같지만 굉장히 자기고백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언술행위”임을 강조했다. ~낭독의 발견~이 출연자들의 상품화되지 않은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홍 전 PD는 낭독을 “텍스트가 몸에 침윤해 들어오는 경험”으로 정의했다. “낭독을 하면 나와 텍스트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같다”는 홍 전 PD는 “어떤 공간에서 문장을 소리내 읽으면, 그 파동 안에 녹아드는 느낌이 든다”고 낭독이 주는 매력을 밝혔다.
낭독은 직접 읽는 사람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도 색다른 경험이 된다. 심보선 시인의 낭독회에 참석한 시민단체 활동가 강언주 씨는 “영화 ~시~ 등을 통해서 낭독문화를 간접적으로만 접했는데 실제로 낭독회에 와보니, 같은 구절이라도 혼자 시를 읽을 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며 소감을 밝혔다. ~낭독의 발견~은 교양 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팬클럽이 있다. 완도 청산도 촬영 당시에는 열성적인 팬들이 찾아와 촬영을 참관했고, 실제로 팬클럽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어 낭독회 자리를 갖기도 했다.

함께 소리내 읽고 생각하며 허무는 벽
이렇게 낭독은 문학을 혼자 향유하는 것이 아닌, 함께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문학작품과 독자 뿐만 아니라, 읽는 이와 듣는 이 역시 낭독행위를 통해 ‘소통’한다. 문화예술카페 ‘별꼴’에서 이뤄진 ‘귀로 읽는 책 프로그램’은 낭독행위가 ‘소통’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시읽기 모임’과 ‘단편읽기 모임’은 11월부터 각각 매주 화요일 2시와 수요일 4시에 열린다. 낭독회 당시의 음성은 녹음돼, 노들장애인야학에 전해져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접하는 또다른 기회를 열어준다. 낭독회를 기획한 ‘별꼴’ 매니저 죠스 씨는 “혼자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는 것을 보통 낭독이라고 한다”며 “낭독을 매개로 생각을 나누고 소리의 울림을 공유하는 것이 장애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카페의 취지와 맞았다”고 낭독회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낭독회에는 특별히 큰 노력이나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일주일에 한번 모여 시나 단편소설을 읽고 서로의 고민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면 된다. 11월 22일 화요일도 어김없이 낭독회가 열렸다. 송경동 시인의 시집 『사소한 물음에 답함』을 돌려가며 읽다 색다른 방법이 시도됐다. 낭독자가 최근 고민을 털어놓은 뒤, 시집을 아무데나 펼쳐 왼쪽 페이지에 나오는 시를 낭독하는 것이다. 낭독 후에는 시가 주는 의미로부터 고민의 실마리를 함께 찾아보기도 했다. 노들장애인야학 김영학 씨는 “낭독을 통해서 각자의 생각, 고민을 털어놓는 시간이 좋다”며 낭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N’에서 공부하는 전승곤 씨는 “평소에 장애인과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는데, 낭독이 소통의 기회를 주는 것 같다”며 “함께 낭독을 하면 자기 생각에만 빠지지 않고, 문학작품을 통해 타인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카페 '별꼴'의 매니저 죠스 씨는 낭독이 '소통'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만이 아닌, 함께 소통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낭독문화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홍경수 전 PD는 미디어의 선구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홍 전 PD는 “새로운 문화를 미디어가 제시하면 시청자들이 반응하고, 이를 통해 더 다양한 문화로 정착시켜 나갈 수 있다”며 ~낭독의 발견~의 성공이 다른 낭독 프로그램들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별꼴’ 매니저 죠스 씨는 “낭독이라면 아직도 새롭게 소비되는 문화 컨텐츠로만 보는 측면도 있는데, 그런 차원에만 그친다면 낭독이 그냥 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며 “낭독은 단순히 기존의 문화를 더 세련되게 포장하는 수단이라기보다,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답했다. 죠스 씨는 “하나의 독특한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것보다 타인과 함께 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로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라며,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낭독이 가진 가능성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