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호 > 문화
페미니즘, 대중의 목소리를 입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 티셔츠 #FREE THE NIPPLE
등록일 2016.09.16 21:57l최종 업데이트 2016.09.17 22:50l 김세영 기자(birdy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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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페미니즘은 뜨거운 ‘문화 콘텐츠’다. 대중문화 곳곳에서 페미니스트의 발화가 거세다. SNS를 통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페미티’를 입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한다. 그동안 검은 봉투에만 담겨있던 생리대가 인사동 한복판에 대담하게 전시되기도 했다. 출판계 역시 새로 번역·출판되는 페미니즘 서적의 열기로 뜨겁다. 현재 페미니즘은 일상과 문화 속에서 실천되며 ‘가장 일상적인 것의 정치성’을 폭로하고 있다. 대중의 목소리를 입은 페미니즘은 어떻게 발현되고 있을까.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2016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선정한 ‘성평등 디딤돌상’ 수상 대상에는 사람도, 단체도 아닌 트위터의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이 있었다. SNS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공로였다.

사진1. 윤나리 씨가 제작한 트위터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모음집 ©여성주의 저널 '일다'.jpg
윤나리 씨가 제작한 트위터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모음집 
ⓒ여성주의 저널 ‘일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은 2015년 2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중적으로 이슈화된 수많은 여성혐오 발언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계기가 됐다.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과 이유를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올렸다. 페미니스트인 이유는 간단하다. “동생은 남자라는 이유로 하지 않았던 청소와 빨래를 해야 했기 때문”이고, “두 딸을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이며, “인간이기 때문”이다. 해시태그 페미니즘 운동은 SNS를 타고 삽시간에 확산됐고, 이는 1년 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보다 직설적인 해시태그를 달고 나타났다. 2016년 5월 초에는 포항공과대학교(POSTECH·포스텍) 내에서 앞선 운동과 같은 내용의 ‘#포스텍 페미니즘’이 등장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비평가 손희정 씨는 2015년 시작된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배경에 “대중문화의 여성혐오에 저항해온 더 오랜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미 온라인에서 여성주의 시각을 가진 이들이 결집하고 목소리를 내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유행한 페이스북 대나무숲 해시태그 놀이의 하나였던 ‘시월드 옆 대나무숲’에서는 익명의 며느리들의 서러운 경험이 공유됐다. 2012년 ‘나는 꼼수다’의 ‘비키니 논란’ 때는 인터넷 카페 ‘삼국카페’에서 ‘나꼼수’ 지지 철회 성명을 내기도 했다. 여성들이 소위 ‘야한’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했던 2011년의 ‘잡년 행진(slut walk)’ 역시 트위터를 통해 모집되고 진행된 퍼포먼스였다. 

  이러한 문화에서 비롯된 온라인 선언 운동은 페미니즘의 문턱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으로 시작되는 여러 인터넷 댓글들에서 알 수 있듯,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나 문턱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페미스트입니다’와 같이 일상의 고백에서 시작된 선언 운동은 페미니즘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됐다. 해시태그를 달며 타인에게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고백인 동시에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선언은 현실에서의 성과도 가져왔다. 손희정 비평가의 말대로 페미니즘 운동은 온라인에 그치지 않고 오프라인과 함께 움직였다. ‘#포스텍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시작한 포항공대 학부생 강미량 씨는 “포스텍 해시태그 운동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처음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 포스텍 해시태그 운동은 이후 경험담을 넘어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흐름으로 이어졌고, 결국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스터디 창설의 계기가 됐다. 운동의 이러한 3단계 변화는 주동자 없이 참여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대표자 없이 모두가 함께 이끌어나가는 온라인 운동의 성격이 오프라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원하는 대로 신체를 드러낼 권리

  페미니즘 선언과 가시화는 구체적인 실천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온라인에서는 여성의 신체에 부여된 규율에 저항하는 퍼포먼스가 유행처럼 번졌다. 자신의 젖가슴 사진과 겨드랑이 사진을 SNS에 올리는 ‘프리더니플(FREE THE NIPPLE)운동’과 ‘겨털 콘테스트’가 대표적이다. ‘프리더니플 운동’은 여성의 상체 노출 사진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SNS에서 삭제된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Free the nipple!(가슴노출을 허하라!)’을 외치는 사진들은 여성의 가슴에만 적용되는 검열의 이중잣대를 비판한다. 해외 유명 연예인뿐 아니라 정치인까지 자신의 가슴 사진을 올리며 운동에 동참했다. 중국에서 진행된 ‘겨털 콘테스트’에 참여한 여성들 역시 사회적 편견에 의해 여성의 신체, 심지어 겨드랑이털까지도 통제되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사회적 불문율을 깨뜨리자는 오프라인 캠페인도 있었다. 숙명여대 중앙여성학동아리 S.F.A는 축제 때 ‘보지 좀 보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캠퍼스 내에 성기를 포함한 여성의 신체 그림이 전시됐다. 미디어에서 대상화된 신체만 접할 뿐, 여성들이 스스로의 몸에 대해 탐색할 기회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퍼포먼스의 출발점이었다. 노골적인 그림이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S.F.A의 권재영 회장은 “처음부터 가시화를 위한 행사였다”고 말했다. 원하는 방식대로 가공된 여성신체이미지만이 소비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충격요법인 셈이다.

  여성의 몸과 관련된 일련의 SNS 해시태그운동과 퍼포먼스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신체를 드러낸다. 이는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룰지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한다는, 신체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요구다. 나아가 여성의 신체를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사진2. 인사동 생리대 붙이기 퍼포먼스 ©경향신문.jpg 
인사동 생리대 붙이기  퍼포먼스 ⓒ경향신문

  7월 3일 인사동에서 진행된 ‘생리대 붙이기 캠페인’ 역시 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영역을 가시화했다. 여성들은 생리대 가격 인하와 생리에 대한 인식 전환을 요구하며 붉은 물감을 칠한 생리대를 벽에 붙였다. 캠페인 참여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생리가 언제나 사적 공간의 일로 간주되며, 따라서 인구의 절반이 겪는 생리가 ‘인권’의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꼬집었다. 생리대를 구매할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을 대신 사용해야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나, 생리대가 개인의 ‘취향’ 문제로 취급돼 긴급 구호 품목에서 제외됐던 사례는 그들이 지적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생리대 붙이기 캠페인에 대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화장실의 한 구석, 혹은 여성들의 귓속말 속에만 존재했던 생리대를 전시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생리는 비로소 사회문제로 가시화될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소비한다는 것

  페미니스트 선언은 소비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최근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담은 굿즈의 유통, 판매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병, 야구점퍼, 티셔츠, 배지 등 굿즈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양하다. ‘나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이다’라며 특정 여성혐오 발언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가하면, ‘I’m not your baby’라는 메시지를 담기도 한다.

사진3. 페미니스트 티셔츠 ©한겨레.JPG

페미니스트 티셔츠 ⓒ한겨레


  특별한 디자인 없이 ‘FEMINIST’라는 단어 하나가 적힌 ‘페미티’는 2차 공동구매 때 1,147장이 판매됐다. “가장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페밍아웃’하는 옷”에 제주도, 울릉도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구매요청이 왔다. 공동구매를 진행한 대학원생 민수지·홍혜영 씨는 ‘그래 나 페미니스트다. 그래서 어쩔래?’라는 마음으로 페미티 공동구매를 시작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존재하는 만큼, 더욱 드러내고 표현해야한다는 생각이었다. 페미티 공동구매는 페미니즘에 대한 선입견에 대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페미니즘 굿즈의 유행에 대해, 페미니즘이 단순히 스타일로써 소비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굿즈의 소비는 단순한 ‘소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여성 성기 모양 자수를 활용한 페미니즘 굿즈를 판매하는 ‘버자이너 빅토리’의 강철 대표는 “페미니즘 굿즈의 구입은 여성 소비자를 지우지 말라는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즉 페미니즘 굿즈 소비 행위에는 상품이 담은 페미니즘적 가치를 지향하고 이를 공론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즘 굿즈가 생산되는 방식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대량생산체제가 아니라는 점, 일부 상품의 경우 그 수익이 여성단체에 기부된다는 점 역시 페미니즘 굿즈 소비의 사회적 의미를 환기하는 대목이다.

  페미니즘 굿즈의 소비는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이자 페미니즘의 사회적 가시화다. 손희정 비평가는 “굿즈를 포함한 페미니즘 의제가 관심을 끌고 ‘팔리는 것’이 되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에서 소통될 수 있는 가치가 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는 곧 페미니즘이 “세계에 개입하는 영향력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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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광화문점의 페미니즘 관련 코너 ⓒ권소현 사진기자


  일상의 분노에서 출발한 목소리는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현재 출판계에는 페미니즘 도서 열풍이 불고 있다. 주요 서점에서 여성학·젠더 분야 판매량이 100% 이상 증가했다. 사회과학도서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페미니즘 서적이 쉽게 눈에 띈다. 이론서뿐 아니라 일상의 성차별에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즘 대중서의 출판도 활발하다. 일상의 성차별에 대응할 수 있는 ‘실전 매뉴얼’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발간 한 달만에 1만부 가까이 팔렸다. 

  지난 5월에는 해외 페미니즘 논문과 기사를 번역·소개하는 온라인 여성주의 정보생산 협동조합 ‘페미디아(Femidia)’가 탄생했다. 페미디아 운영진은 “폭넓고 다채로운 페미니즘 자료들을 얻고 싶다는 바람에서 페미디아가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페미디아를 통해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자료들은 SNS 관계망을 타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현재 페미디아는 페미니즘 게임 및 영상 콘텐츠 자체제작도 계획 중이다. 

  페미니즘 콘텐츠에 대한 열망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다. 손희정 평론가는 “최근의 문화운동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여성혐오’라고 명명할 수 있는 언어를 얻음으로써 가능했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혐오’로 명명된 것에 저항할 수 있는 언어를 얻기 위한 고군분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크게는 대중문화가 성차별을 공고히하는 주된 동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손희정 비평가는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적인 재현은 여성 대중의 욕망과 정신세계에 깊이 개입해 들어온다”고 지적한다. 대중문화에 녹아든 성차별을 부지불식간에 체화했던 여성들이 다시금 문화의 형식으로 이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실천되는 페미니즘 움직임은 하나의 페미니즘, 혹은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페미니즘 문화운동에는 기획자가 없다. 참여자들은 온라인에서 ‘점조직’의 형태로 모이고, 운동을 유희로서 즐긴다. 이러한 문화운동을 통해 불과 1년 사이 페미니즘 담론이 확대됐고, 말하는 주체도 늘어났다. 홍혜영 씨는 “단기간에 생리대, 몰래카메라, 데이트폭력 등 여러 이슈가 쏟아져 나왔다”며 이는 “스스로 문제제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 속에 녹아드는 페미니즘 문화는 페미니즘이 더 이상 일부 여성단체, 혹은 소외된 여성 개인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 깊숙이 스며든 가부장제의 문제를 인식한 모두는 곧 페미니스트다. 지금 다양한 정체성의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등장하고 있는 이유다. 현재 대중문화의 옷을 입고 드러나는 것은, 그동안 배제돼왔던 다양한 목소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