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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미터의 녹슨 벽
등록일 2015.12.16 14:47l최종 업데이트 2015.12.16 14:48l 임가영 (서양화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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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Martin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에서는 종종 첫머리에서부터 미술사 속에 얼마나 신기하고 의미 있는 장면들이 존재하는가를 소개하게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하나의 유명한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것은 커다란 광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금속 벽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금속 벽은 지면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으며 광장의 바닥면을 채운 돌블럭이 만들어낸 동심원의 곡선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휘어져있다. 따라서 위에서 내려다볼 경우 광장의 무늬를 살짝 흐트러트리는 검은 곡선처럼 보인다. 평소 광장을 오가던 행인들은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3.6미터 높이의) 녹슨 금속판에 의해 앞이 가로막히게 된다. 이 금속 벽의 길이는 36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광장을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걸음을 돌려 크게 돌아가야만 한다.

  만약 이 작품을 미술품으로서 감상하기 위해 특별히 찾아온 이가 있다면, 36미터의 벽을 돌아가며 거대한 금속 벽과 자신의 신체/인지적 관계가 변화하는 경험을 갖는 것에 별 불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작품이 설치된 뉴욕 연방 광장을 상시로 오고가던 이라면, 별안간 자신의 일과에 전에 없던 노동 (같은 거리를 지나기 위해 몇 미터를 더 걸어야 하는)이 추가된 것이 꽤 성가시게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성가심이 ‘공공미술’이라는 명목으로 예술가가 설치한 작품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상당한 불만을 느꼈을 법 하다. 인류가 만들어낸 고안물, 그것도 예술품이라는 것이 공공장소에서 행인들의 진로를 방해할 뿐인 투박하고 거대한 녹슨 벽이라면, 평소에 현대 예술의 난해하거나 낯선 형식들에 대해 별 의견이 없던 사람이라도 ‘이래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공공장소로 나간 미술’이라는 단순한 기획 아래 이루어진 시도들은, 효과적이었든 아니었든 공중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이전과는 다른 논쟁거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예술 자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보다 훨씬 더 일찍 제기되어 대중이 쉽게 공감하지 못할 다양하고도 낯선 대답을 내어놓곤 했다. 하지만 19세기 마네의 그림을 찢기 위해 성난 기세로 휘둘러진 우산과 공공장소에 놓인 미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은 규모와 강도는 물론 미술사 속의 의미상으로도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일단 전자의 거부반응은 오히려 미술작품의 지위와 가치를 담보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선구적인 예술의 증거로서), 후자의 거부반응 - 예를 들면 공공장소에 놓인 미술이 그것과 마주치는 공중(대중)에게 보다 미술답게 느껴질 필요가 있다는 - 은 그렇게 쉽게 묵과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거대한 녹슨 벽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러한 미술 작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옹호하고 유지시키려는 사람들과 격한 논쟁을 벌였다. 우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작가의 의도나 작품과 장소 사이에서 작동하는 미학적인 고민/실험이 관객들의 관심사 밖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작품의 철거를 주장하는 관객들, 즉 주로 위에서 말한 광장을 상시적으로 오고 가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통행을 막는 커다란 벽은 무용하거나 아름답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무례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 커다란 벽은 그것이 가지는 존재감이나 무게감만큼의, 미술가 개인의 욕심으로 보였을 수 있다.‘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에 미술가 한 개인이 자신만의 욕심을 그토록 커다랗게 드러내 보였다는 것 하나로 사람들은 즉각 침해 당하거나 간섭 받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 미술이 제기하는 질문에 직면하는 것이 언제나 다소 짜증스러운 이유 하나가 있는데, 그러한 질문들 속에는 흔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것들에 대한 재규정, 내지는 재고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마찬가지로, 위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먼저 생각해볼만한 것은 ‘모두’의 개념이다. 과연 그 광장은 ‘모두’의 것인가? ‘모두’란 무엇인가? ‘공공장소’로 불리는 광장이라는 공간/장소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경험하곤 했던 것을 그렇게 쉽게 묶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미술가는 물론 사회적 장소나 그것과 연관된 사람들의 삶과 경험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응당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 개별 작품에 대한 미학적 이해나 해석 이전에 충분히 검토될 가치가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관객은 자신의 앞에 놓인 방해물에 대한 불편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넘어서 불쾌감과 적대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느낌을 기반으로 작품의 철거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단계들에서 그가 ‘모두’의 공간이란 무엇인지, 그 광장이 실제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것으로, 어떤 의미로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뒤늦게 밝히는 이 작품의 이름은 ‘기울어진 호(Tilted Arc)(1980)’이며 이 작품의 작가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다. 긴 시간에 걸친 논쟁과 법정 공방 끝에 1989년 이 작품은 결국 철거 되었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어쨌든 이 작품의 미학적 가치는 물론‘ 모두’에 대한 질문 역시 작품을 지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미술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여기에서 이끌어진 질문들은 기울어진 호라는 개별 작품을 넘어서서 공공장소의 미술, 공공미술, 또는 일상과 삶의 장소로 나아가 사회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미술 모두와 연관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어쨌든 세라의 작품이 철거된 자리에는 이후 아주 의미심장하게도, ‘누구나’ 편안하고 아름다우며 유용하다고 느낄 외형과 기능을 갖춘 공원이 ‘공공미술’로서 들어서게 되었다.

  ‘모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예술작품의 관객은 하나의 보편적인 대중으로서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이 현대 미술을 직면하는 아주 즉각적인 순간에 체험할 수 있는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현대 미술작품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작품은 물론 그것을 보는 사람 또한 일반화된 집단이나 뭉뚱그려진 대중으로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중예술은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영역의 것이다. 대중예술, 친절한 예술은 이미 알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예술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규명되지 않은 존재일 수 있음을 보여주곤 한다. 삶의 공간, 나아가 타인까지도. 나는 이러한 ‘재인식’의 기회가 단지 머릿속에서 촉발되는 흥미로운 사고과정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공 장소에 대한 논의의 발전은 우리가 물리적 조건 속에서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굳이 전문적일 필요는 없는 개개인들의) 숙고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현대 미술의 질문들이 고도로 실용적인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임가영 (서양화과 석사과정)
서양화과 대학원 14학번으로 현재 설치미술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