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호 > 문화
영화에는 담기지 않은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영화, 피해생존자를 바라보는 협소한 눈
등록일 2016.05.03 00:36l최종 업데이트 2016.05.24 20:39l 은연지 기자(yeongee247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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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위안부였던 강일출 생존자의 경험을 각색한 영화 귀향(조정래, 2015)’은 개봉 18일차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는 일본군위안부군위안소에서 겪었던 고통을 보여주고, 사망한 피해자의 한을 진혼굿으로 달랜다. 작년 12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에 분노한 많은 이들이 귀향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며 일본군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군위안부를 다루는 영화는 대중에게 일본군위안부와 이들의 경험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영화의 시각은 관객이 일본군위안부를 바라보는 시선에 침윤한다. 그러나 영화 귀향300만 관객을 돌파한 시점에서, 우리는 영화가 제공하는 시각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식민지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


  일본군위안부는 식민지라는 상황과 빈곤, 그리고 젠더 관계가 교차하며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정부와 군 지도부는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에서 저지른 대규모의 전시강간으로 세계의 비난을 받자, 재범을 방지하고 성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군위안소를 구상한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차출한 여성들은 일본 출신이 아니었다. 일본정부에게 일본여성은 전쟁터에 내보낼 남아를 낳아야 하는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식민지였던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군은 납치나 거짓말, 유괴 등의 방법으로 빈곤한 가정 출신의 저학력 여성들을 동원했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은 전쟁터에서 여성의 일을 강요당했다. 배은경 교(사회학과)는 일본군위안부병사의 남성성을 확인해주고, 병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강조한다. 일본군위안부의 핵심적인 역할은 병사들에게 성적으로 봉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앙대 이나영 교수(사회학과)는 일본군 위안소를 체계적인 강간 시스템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는 성적 착취에 국한되지 않는다.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실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은 피해의 경험이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군은 납치와 유괴, 거짓말로 피해자를 삶의 터전으로부터 떼어냈으며, 일본군위안부를 감시하고 이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감시와 통제를 벗어난 일본군위안부에게는 신체적 폭력과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임신, 질병 등으로 성적으로 봉사할 수 없는 여성은 빨래, 설거지, 식사준비 등에 동원했다. 이 지점에서 일본군위안부가 겪은 폭력의 범위는 강간에서 여성의 성 전반에대한 착취,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말살로 확장된다.


 

일본군위안부영화의 적나라한 재현


  ‘귀향의 조정래 감독은 <한겨레>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 편의 극영화로 이런 현실을 이해하도록 돕고, 지금의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문화적 증거를 남겨둘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적대로 영화 귀향군위안소에서 일본군위안부가 겪는 고통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주인공 정민이 처음으로 강간을 당하는 장면은 끔찍하게 표현됐다. 카메라는 강간하는 일본군의 시선을 따르며 피해자의 몸을 바라본다. 이 장면 이후에도 피해자의 나체는 수차례 화면에 노출된다. 간만에 볕을 쬐며 쉬고 있는 장면에서도, 체벌을 받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폭행의 흔적이 남은 피해자들의 신체를 주시한다.



영화 '소리굽쇠'의 한 장면. 카메라는 일본군'군위안부'였던 귀임 대신 귀임을 강간하는 일본군의 시선을 따른다. ⓒ소리굽쇠.png

▲ 영화 '소리굽쇠'의 한 장면. 카메라는 일본군'위안부'였던 귀임 대신 귀임을 강간하는 일본군의 시선을 따른다. ⓒ영화 '소리굽쇠'




  다른 극영화들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영화 마지막 위안부(임선, 2014)’는 피해자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을 일본군의 시선에서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소리굽쇠(추상록, 2014)’ 또한 일본군이 귀임의 옷을 벗기고 강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한국정신대문제해결위원회(정대협)의 김동희 사무처장은 이와 같은 장면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지난 25년 동안 일본군위안부피해를 공론화하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했지만, 활자와 경험의 간극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귀향에 대해 주인공이 겪는 끔찍한 상황은 실제 발생했던 사건임을 강조하며 “‘군위안소내부는 정말 끔찍했던, 지옥과 같은 공간이었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스크린에서 다시 발가벗겨진 일본군위안부


  그러나 영화의 적나라한 묘사는 군위안소에서 피해자가 겪은 폭력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게 만든다는 우려 역시 존재한다. 손희정 영화평론가는 <씨네 21>의 칼럼에서 영화 귀향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을 우려했다. 보는 이가 피해자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을 의도했다고 하더라도, 관객이 피해자의 나체를 구경거리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손 영화평론가는 성 노예화 과정을 그리기 위해서 강간 장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대표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조혜영 프로그래머는 관객이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라면 재현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재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재현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가해자의 입장과 동일시된 것은 문제라며 누구의 시선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나체를 지속적으로 전시하는 것도 피해자의 몸을 구경거리로 만들 위험이 있다. 조 프로그래머는 한 번만 재현해도 관객들은 그 상황의 처참함을 상상할 수 있는데도 영화는 여성의 나체를 계속 전시한다재현의 과잉에 대한 우려를 보였다.


 

성폭력에 국한된 좁은 이해에서 벗어나야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극영화는 피해생존자의 고통을 드러낼 때 강간 행위 묘사에 집중한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피해생존자를 인터뷰했던 서울대 인권센터 인권교육부 최기자 전문위원은 강간의 경험만 보려고 하는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고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사실 일본군위안부의 삶 전체가 피해였다고 말했다.


  일본군위안부로 차출되는 과정에서 자행된 유괴와 납치는 피해자를 삶의 터전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았다. ‘군위안소내에서는 성적 봉사이외의 시간에는 여성의 일에 임해야 했고, 제대로 된 먹을 것도 거의 얻을 수 없었다. 신체에 남은 상흔도 이들의 고통을 전한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따르면 이들이 경험한 피해는 성폭력을 넘어선다. 군인에 의한 구타와 학대는 골절 등의 신체적 상흔을, 계속된 강간은 생식기의 파손과 성병을 남겼다. 성병 예방 차원에서 군의관이 놓았던 606호 주사로 불임이 되기도 했다.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약을 먹이거나, 임신중절수술을 시키는 일도 빈번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위안부영화는 군위안소이후 피해생존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군위안소가 남긴 상흔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됐다. 서울대 양현아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논문 증언을 통해 본 한국인 군위안부들의 포스트식민의 상흔에서 피해생존자가 성적 폭력의 후유증으로 성병에 시달리거나 불임이 됐다는 점을 짚는다. 정신적인 상흔도 지속됐다. 양교수는 피해생존자들이 군인을 보면 두려움을 느끼며,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많은 피해생존자들이 정신의 상흔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피해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피해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상황은 피해자들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배은경 교수는 피해자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끌려간 어린 여성들이었기에, 성매매를 했는지 강간을 당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만큼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이들은 피해자임에도, 화냥년이라는 말을 듣고 스스로를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전한다.


  자신의 몸이 혼인할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한 피해자들은 정상적인 혼인관계를 맺는 것을 주저했다. 어렵게 결혼을 한 피해자도 있었으나, 불임으로 인해 남편의 집안으로부터 축출당하거나 스스로 집을 나와야 했다. 일본군위안부의 경험이 피해생존자의 사회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배 교수는 정상적인 혼인관계를 맺지 못한 피해생존자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부장 없이 굴곡진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피해생존자가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동안 한국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1991년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정대협이 결성되기 이전까지, 한국사회에서 5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최기자 씨는 우리 주변의 어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들의 존재나 경험은 조용히 알려지고 있었으나 학자와 지식인, 언론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공론화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배은경 교수 또한 한국의 시민사회, 국민이나 정치가 일본군위안부의 희생을 알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한국 사회의 무책임함을 짚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 피해생존자의 강인함과 주체성


  영화 속 일본군위안부피해생존자는 소극적으로 그려진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귀향의 나이든 영옥(손숙)소리굽쇠의 귀임은 자신의 과거를 주변에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말을 하더라도 이들은 한이 많은 인물일 뿐, 우리는 이들을 주체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주인공 정민은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친한 이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귀향.jpg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주인공 정민은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친한 이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영화 '귀향'



  그러나 현실의 일본군위안부는 강인하다. 이들은 일본군위안부경험이 남긴 정신적, 육체적 상흔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치유해왔으며, 한국전쟁과 분단, 군사독재 등 한국사회의 지난한 역사 속에서 생존해왔다. 또한 1991년 김학순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시작으로 생존자들은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은경 교수는 피해자의 증언을 침묵과 금기를 깨고 자신의 상처를 헤집으며 나오는 것, 그리고 사회의 기존 인식과 싸우며 이루어진 것이라 말한다. 정대협의 김동희 사무처장 또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회적 배경도 미비했고, 가족이나 속한 공동체의 눈치가 존재하는 상황, 즉 강요된 침묵 속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임을 말하며 피해생존자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초기 수요시위 사진이다. 피해생존자도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에 해결을 촉구하며 시위 자리를 지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jpg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초기 수요시위 사진이다. 피해생존자는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에 해결을 촉구하며 시위 자리를 지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지금까지 238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임을 밝혔고, 일부는 1,000회가 넘는 정대협의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현장을 지켰다. 김동희 사무처장은 피해생존자가 스스로 피해자로서 안주하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얘기하는 것을 넘어서 나는 사죄를 받고 싶고, 가 인정할 만큼 사죄하는 것이 사죄라고 말하며 피해자의 적극적인 역할과 피해자를 넘어서는 활동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전한다. 다른 피해생존자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주변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최기자 씨는 자신이 인터뷰한 피해생존자에 대해 할머니는 자식을 갖고 싶어서 아들을 입양했고, 마을 속에 녹아서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큐 '낮은 목소리'의 한 장면. 일본군'군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모여 사는 '나눔의집' 텃밭에서 피해생존자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다듬고 있다. 이들은 무기력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2.jpg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의 한 장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모여 사는 '나눔의집' 텃밭에서 피해생존자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다듬고 있다. 이들은 무기력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 '낮은 목소리'



  일본군위안부는 영화에서 그리는 것처럼 불쌍한 사람, 혹은 한 많은 여자가 아니다. 이들은 사죄를 요구하는 피해자이자 평화를 외치는 운동가이며, 우리 주변의 사람이다. 정대협 김동희 사무처장은 생존자들이 지난 25년 동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해결하고자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 사건을 기억하고, 현재도 투쟁하고 있는 피해생존자와 연대할 것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