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호 > 문화 >필름通
괜찮아져야만 했던,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던 월터의 이야기 조디악 포스터 감독, <비버>, 2011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김나연 (nyhope@snu.ac.kr)

조회 수:907

누군가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우리는 흔히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지만 그 무엇도 그를 구제할 수 없었던 ‘월터’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누군가의 아픔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문제가 없게끔 적어도 겉으로는 “괜찮을 것”을 강요하는 가족과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위의 기대에 맞춰 괜찮은 척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끝내 괜찮아질 수 없었던 월터의 이야기 통해 삶의 역경을 마주하는 방법, 진정한 소통 등의 주제를 밀도 있게 풀어낸다.


아버지 월터, ‘비버’가 돼야 했던 남자
월터는 ‘대책 없이 우울한 사람’이다. 중년 남성인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장난감 회사의 경영자다. 한때 가족들과 행복했던 기억과 사업가로서 성공했던 적도 있지만 이제 월터에게 그런 과거는 현재의 무기력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뿐이다. 월터는 현실에서 도피해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 영화 속에서 잠은 무기력함의 상징이다.
월터에게 우울증을 극복할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각종 자기 계발서를 읽고 유행하는 치료법을 시도해보지만 그 어떤 것도 효과가 없다. 가족들은 월터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그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다 큰 성인이 만성적인 무기력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그의 의지 부족으로만 생각하고 외면할 뿐이다.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월터의 노력은 계속 실패하고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되는 늪처럼 월터를 무력감에 빠져들게 해 그의 숨통을 조여든다.
월터는 손에 인형 '비버'를 끼고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심리 치료의 일환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비버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월터의 또다른 자아다.
절망감을 견디지 못한 월터가 자살을 결심해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누군가의 “어이”라는 외침에 월터는 뒤로 넘어져 기절한다. 놀랍게도 죽음의 순간에 월터를 멈추고 기절한 그를 깨운 것은 그가 무심코 주워왔던 귀여운 손인형 비버였다. 비록 절망감에 나락으로 떨어진 월터였지만,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삶에 대한 의지로 월터는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도울 새로운 자아, 비버를 창조해낸다. 월터는 손에 비버 인형을 끼우고 마치 사람과 말하듯 비버와 대화하기 시작한다. 비버는 월터에게 가망 없는 그의 인생을 구제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일상으로 돌아간 월터는 가족과 회사 사람들에게 비버는 인형을 통한 심리치료라고 알린 뒤, 월터는 사임하고 비버가 사장이 됐다고 발표한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비버를 점차 받아들이게 된다. 월터보다 비버가 훨씬 더 유쾌하고 재미있고 생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버는 무척 성공적이다. 비버는 회사에서 새로운 상품의 개발로 매출을 획기적으로 높인다. 큰 아들은 여전히 월터를 혐오하지만 아내와 막내아들과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비버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강연도 시작해 인기를 끈다. 손인형의 이야기에 주목할 정도로 절박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이제 월터의 인생은 스스로가 ‘예전 모습을 거의 되찾은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인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결혼 기념일, 아내는 월터에게 비버 없이 둘만 있고 싶다고 말한다. 비버가 없는 저녁식사, 월터는 불안하고 초조해 보인다. 아내와의 대화에서도 기운 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몇 마디를 쥐어짜낼 뿐이다. 아내는 월터에게 결혼 후 행복했던 순간을 담은 사진들을 선물하며, 사진 속 월터처럼 충실한 가장으로 다시 돌아가 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월터에게 과거의 기억은 부담일 뿐이다.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월터에게 아내는 예전의 월터를 사랑하고 필요로 한다며 소리 지른다. 아내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월터는 결국 비버를 다시 꺼내 자신은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며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아내는 물러서지 않는다. “난 당신에게 헌신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왜냐면 당신을 사랑하니까. 예전 모습으로 제발 돌아와 줘.” 아내는 월터의 노력도, 현재의 월터의 모습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두 사람은 끝내 소통에 실패하고 관계는 요원해진다.
비버를 없애기를 바라는 주변의 기대와 월터를 장악하려는 비버의 압박으로 월터는 너무 지쳐버린다. "잠에서 깨고싶다"고 중얼거리면서 월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가족들은 월터를 두고 집을 떠난다. 혼자 남은 월터는 이전처럼 비버를 앞세워도 밝게 지낼 수 없다. 처음에는 월터의 조력자였던 비버가 마치 ‘지킬과 하이드’의 하이드처럼 월터를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강하고 유쾌해 보이는 ‘스마일 마스크’를 유지하면서 아무에게도 속내를 터놓을 수 없었던 월터의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간다. 비버는 가족과의 불화로 상심에 빠져 무기력해진 월터를 달래기는커녕 한심하다며 계속 다그친다. 월터는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비버로부터도 소외된 것이다. 월터는 끊임없이 강박감을 주는 비버를 견디지 못하고 비버와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지만, 비버도 월터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결국 자해를 하게 되는 셈이다. 어떤 방법을 써도 비버와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월터는 끝내 자신의 팔을 잘라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아들 포터, 더 많이 상처받는 유전자가 유전될까 두려웠던 소년
월터의 장남 포터는 가족 구성원 중 그에게 가장 적대적이다. 포터는 아버지와 닮은 것에 극도로 싫어해 심지어 자신의 방에 아버지와 닮은 점을 써 붙여뒀다. 포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뒤 ‘나를 버리는 여행’을 떠나 아버지와 닮은 자신의 버릇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목표다. 포터는 무기력한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의 우울한 성격이나 더 많이 상처받는 유전자가 유전되는 것은 아닐지, 자신의 인생도 월터처럼 무기력함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한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포터는 월터에게 더 날카롭게 대하고 월터는 미안한 마음에 포터를 대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월터와 포터의 사이는 가까워질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인다.
포터에게는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능력이 있다. 그는 학교 내 암암리에 대필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글을 부탁하는 학생들에게 큰 돈을 받아 ‘나를 버리는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노라가 포터에게 글을 청탁한다. 노라는 만점만 받는 치어리더이자 졸업생 대표인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학생이다. 그녀에게는 마약 때문에 죽은 오빠가 있다. 노라는 졸업연설문에 오빠 이야기를 담아내려 노력하지만, 죽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포터를 찾는다.
노라의 졸업 연설 대필을 맡은 포터는 노라가 한 때 재능 있는 그래피티 작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그림을 그만 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하지만 노라는 그래피티로 인해 공공기물 파손죄로 체포되면서 오빠로 인한 슬픔만으로도 벅찬 어머니께 자신이 걱정거리를 안겨드렸다는 생각에 그래피티를 다시 생각할 마음이 없다. 포터는 노라가 오빠와 관련된 아픔을 덜어내고 노라의 재능을 꽃피우기 바라면서 그래피티 도구를 준비한다. 한사코 거절하는 노라 대신에 포터가 벽에 ‘브라이언(노라의 오빠) 고이 잠들라’는 문구를 쓴다. 노라는 정색하고 두 사람이 싸우던 도중 경찰이 와 그들은 경찰서로 연행된다.
포터는 경찰서에 그를 찾아온 아버지, 월터가 부끄럽다. 월터는 노라 앞에서 여전히 비버를 앞세워 말하고 그의 이런 모습은 노라에게 포터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뿐이다. 극도로 화가 난 포터는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월터에게서 비버를 빼앗으려 한다. 당황한 월터는 포터를 말리려 하지만 포터는 계속 월터를 몰아붙이고 결국 월터는 포터를 밀쳐내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월터와 포터는 다시 한 번 멀어진다.
이렇게 노라와의 관계가 소원해져 상심한 포터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쁜 일이 또 생긴다. 그가 대필한 레포트가 발각되면서 지망했던 대학 입학이 취소된 것이다. 좋아하던 친구와도 멀어지고, 꿈도 요원해진 포터는 인생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아무것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 포터는 잠만 잔다. 늘 잠만 자던 무기력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포터 본인이, 역설적이게도 잠만 자게 된 것이다.


서로의 아픔을 그대로 감싸 안을 수 있다면
우리를 위하는 누군가의 진심어린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마치 포터가 그랬듯. 노라의 그래피티는 포터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의욕을 잃은 포터의 무기력한 모습은 마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던 월터와 그의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다행이 포터에게는 그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친구가 있다. 바로 노라다. 포터에게 실망한 것처럼 보였던 노라는 포터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그래피티를 그린다. 포터에게 그래피티를 보여주며 노라는 “내가 비록 엉망이기는 해도 내 인생에는 중요한 게 많아. 죽은 오빠가 전부는 아니야. 넌 참 멋진데 스스로를 비하해. 힘내”라며 포터를 응원한다. 그리고 포터에게 졸업연설을 맡긴다. 누군가가 애정을 가지고 지켜 봐 준다는 것으로도 포터의 초점 없던 눈에는 생기가 돈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감싸 안게 된다. 노라는 포터가 부끄러워했던 그의 가정사정을, 포터는 노라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아픔을 숨죽여 들어주고 다독여주게 된 것이다.
마침내 졸업식 당일. 노라는 포터가 써준 원고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녀의 짧은 연설에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모든 메시지가 담겨있다. “전 지금 괜찮지 않아요. 전혀요. 사실 저는 뭔가를 잃었어요. 제가 어쩌면 좋을까요? 누군들 별 수 없겠죠.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는 뻔한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하는 누군가는 여러분을 도와주고 다독여주고 입 맞추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생각해주고 사랑해줍니다. 다 잘될 수만은 없겠지만 이것만은 진실이에요. 혼자 감당하지 마세요.”
노라의 연설을 들은 포터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아버지 월터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 사이에는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지만 곧 부자는 서로를 껴안고 눈시울을 붉힌다. 문 밖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이들의 뭉클한 화해 순간을 깨뜨릴까 조용히 나간다.

서로를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었는지. 너무나 많은 일을 겪고 부자는 다시 마주한다. 말없이 끌어안은 그들의 모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귀 기울인 적이 있나요
영화에서는 끝내 월터가 왜 그렇게 괴로웠는지, 왜 만사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실마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월터의 가족을 포함한 그의 주변 인물 중 그 누구도 그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극적으로 치달아 월터와 비버가 혈투를 벌일 때, “난 널 포기하지 않아. 가족 따위 필요 없어. 너를 진짜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어. 넌 혼자서도 아무것도 못해. 내가 있어야 하지”라는 비버의 협박은 그 자체로도 섬뜩할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그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귀 기울여줄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야만 했던 월터의 절박함을 보여주기에 더욱 안타깝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자극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아파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쉬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월터에게 필요했던 건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의 고뇌에 귀 기울여 줄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실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월터에게는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마음을 기대고 싶어 했던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귀 기울여 왔는지, 혹은 귀 기울이는 시늉만 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무의식 중 그에게 괜찮을 것을 강요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