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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공실종사건 발생, 당신도 개를 찾아 떠나시겠습니까?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년 작)
등록일 [데이터가 없습니다]l최종 업데이트 [데이터가 없습니다]l 문지선 기자 (mnjs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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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옷을 입고 개를 찾는 두 주인공. 노란색과 개는 영화의 중요한 상징이다.


어릴 적 보던 만화 를 기억하시는가. 소년 네로, 그리고 그의 개 파트라슈가 등장하던 동화 말이다. 네로는 가난한 형편에도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소년이다. 만화 마지막, 네로는 친구 아로아의 아버지의 돈지갑을 줍게 된다. 그 돈을 가진다면 점점 어려워지는 생활도 모면할 수 있고, 어쩌면 그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로는 망설임없이 눈길을 헤치고 아로아의 집으로 찾아가 돈을 돌려준다. 그리고는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그러나 구경할 돈이 없어 언제나 안타깝게 휘장 앞에서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던 루벤스의 그림을 바라보며 죽고 만다. 그의 개 파트라슈도 네로를 따라 그 옆에서 숨을 거둔다.
여기, 같은 이름의 영화 가 있다. , 등으로 친숙한 봉준호 감독의 10년 전 장편 데뷔작이다. 작품의 제목만 같을 뿐 스위스의 아름다운 시골도, 네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이 카메라를 들이댄 것은 한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대학원 졸업자 고윤주(이성재 분)와 관리사무소 경리로 일하는 박현남(배두나 분)이다. 감독은 무엇을 보려고 했을까.

봉 감독의 퍼즐 풀어가기, 이건 단순한 ‘견공실종사건’이 아니야
사건은 간단하다. 어느 아파트의 일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라 하겠다. 한 아파트에서 애완견이 자꾸 사라진다. 개 짖는 소리가 심하게 거슬렸던 윤주가 개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개를 몰래 잡아다 보신탕으로 만들어 먹는 데 재미들린 경비(변희봉 분)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애완견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편이 돼서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잃어버린 개 찾기에 발벗고 나서는 현남이 있다. 그러나 결국 현남에게 잡힌 것은 부랑자 최씨다. 그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개를 잡아다 구워 먹으려다가 현남에게 걸려 구치소로 가게 된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견공실종 해프닝’ 뒤에는 여러 가지 사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윤주는 왜 그렇게 유난히도 개를 못 견뎌 했을까. 원래 개라는 동물은 도둑을 내쫓고 집을 지키는 동물이다. 즉 간간히 들리는 개 짖는 소리는 불의를 쫓아내는 정의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윤주는 박사과정까지 마친 엘리트다. 그러나 명예와 부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교수로 임용되지 않은 상태의 그는 백수와 다름없다. 동창들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하는데다 넉넉지 못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윤주는 결국 학장에게 ‘떡값’을 바치기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떡값’을 준비하기로 계획한 윤주가 아내의 임신한 배를 쓰다듬으며 욕망 가득한 미래를 얘기할 때, 윤주의 신경을 너무나 거슬리게 하는 것이 바로 개가 짖는 소리인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윤주와 현남의 추격 장면. <괴물>, <살인의 추억> 등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추격은 모티브이자 서사가 진행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개를 잡아먹는 경비나 부랑자는 이미 정의를 무시한, 부패된 상태에 있다. 이들은 너무나 태연하게 개를 잡아먹으려 든다. 아직 경비나 부랑자가 되지 못한 윤주는, 처음에는 개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윤주는 옥상에서 개를 던져 죽여버린다.
이에 비해 현남은 아직까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젊은 세대다. 고학력의 윤주에 비해 현남은 변변한 대학도 다니지 못한, TV에 한 번 출연하는 게 소원인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다. 그러나 개를 잃어버린 당사자들보다도 더 열심히 개를 찾아다닌다. 관객들은 현남이 개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것은 TV에 출연할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실종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때 경비가 방송되는 것을 몹시 꺼리는 행태는, 켕기는 것이 없는 현남이 그만큼 때묻지 않았다는 방증이 된다.

노란색, 그리고 우리 시대의 윤주들에게
이러한 현남의 마음과 같은 순수함을 나타내는 상징이 바로 ‘노란색’이다. 개를 잃어버린 아이가 개를 찾는 전단지를 돌릴 때, 윤주가 옥상에서 개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현남이 그를 추격할 때, 그리고 부랑자로부터 개를 구해낼 때, 아이와 현남은 노란 비옷이나 노란 후드티를 입고 있다. 용기를 내서 부랑자에 맞설 때는 그의 상상 속에서 노란 비옷을 입은 관중들이 노란 물결로 현남을 응원한다. 노란색은 ‘개’를 지향하는, 아직은 때묻지 않은 정의로운 마음을 상징하는 색인 것이다.
현남 뒤에는 수많은 노란 군중이 응원을 보내고 있다. 물론 상상이지만 현남은 이에 힘입어 부랑자에 맞선다.

윤주도 노란 비옷을 입은 적이 있다. 아내가 퇴직금으로 사온 개 ‘순자’를 잃어버렸을 때다. 아내의 요구에 의해서건 아니면 양심을 찾기 위해서건, 윤주는 노란 비옷을 입고 꽤 열심히 순자를 찾아다닌다. 아내가 처음 순자를 사왔을 때 이미 윤주는 ‘떡값’을 바쳐서라도 교수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러나 개가 집안에 들어와서일까, 윤주는 다시 흔들린다. “어렸을 땐 교수 되려면 그냥 죽어라고 공부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라며 “난 교수되면 절대로 돈 같은 거 받지 말아야지”라고 중얼거리는 윤주.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속 ‘떡값’ 마련에 고심하던 윤주는 복권에 한눈을 팔다 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순자를 찾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을 도와준 현남에게서 자신이 죽인 개의 주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윤주는 심한 가책을 느낀다. “개를 죽인 놈이 정말 나쁜 것”이라고 더듬거리며 고백하는 윤주, 그러나 본인이 그랬다고는 끝내 말하지 못한다.
이러한 윤주를 우리는 얼마나 자신있게 욕할 수 있을까. 영화 밖에도 ‘윤주’들은 얼마든지 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학부생인 독자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쉽게 좋은 자리로 ‘낙하산’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그 유혹을 간단히 뿌리칠 수 있겠는가? 윤주와 같이 넉넉지 못한 경제생활을 한다면 유혹에 빠질 만한 근거는 더 확실하다. 만약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가 없고,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윤주는 괴로워하면서까지 ‘떡값’이라는 부당한 행동을 했을까. 부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그 욕망이 어디까지가 ‘생존’을 위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욕심’일지, 그것을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고 나서는 이런 딜레마를 겪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한때 학자로서 인정받던 교수는 이제 자신의 학문적 소신까지 접어가며 국무총리가 되려 하고 있고, 그 와중에 더 많은 비리가 드러나 버렸다. 그는 2007년 자전적 성격이 강한 에세이집 에서 ‘처음과 끝이 항상 같은 사람’, ‘속 다르고 겉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정한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윤주와 같은 고민을 겪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경비와 같아졌을까.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
앞서 말했듯이,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이유도 그 결과도 모두 당신의 몫이다. 그런데 선택을 내리기 전에, 당신은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대해 불만을 표할지도 모른다. 왜 윤주는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면서 살 수 없었을까. 그렇게 괴로우면서도 개를 죽이고 학장에게 잘 보여야만 했나. 이 사회에서 윤주의 지위는 자신의 학문이 아닌 돈과 명예로 결정된다. 교수가 됨으로써 얻고자 했던 명예도 결국은 안정적인 수입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 들어갈수록, 소위 ‘성공한’ 사람도 돈과 명예에 대한 질주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윤주는 결국 케이크 상자 속에 곱게 든 1500만원을 학장에게 건네고 교수가 된다. 끝까지 괴로워하면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자신의 양심을 팔고 말았다. 교수가 된 윤주는 처음 영화에 등장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 바깥의 자연을 보며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다. 아직 순수와 정의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윽고 학생들은 수업준비가 다 됐다며 검은 커튼을 쳐 바깥의 풍경마저도 가려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윤주는 과연 행복할까. 그토록 바라던 교수가 됐어도 자신의 지향점을 잃어버린 그는 어두운 강의실 안에서 서글픈 표정을 지을 뿐이다.
반면 현남은 윤주가 그리던 자연 속에 와 있다. 사람들의 개를 찾아주다 관리사무소에서 잘린 그는 “잘됐지 뭐, 놀러나 가야겠다”고 하더니 친구와 함께 산행을 온 것이다. 윤주가 갈망하는 순수의 공간에 현남은 실제로 서 있다, 깨끗한 흰 셔츠를 입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면 놓쳤을 장면. 관객을 향해 아무 말없이 거울을 비추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 때가 있다.

봉준호 감독은 그나마 젊은 세대에서 희망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영화가 나온 지 10년이 된 지금,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20대는 현남보다는 차라리 윤주에 가깝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취업과 생계를 걱정하며 스펙을 쌓는 데 치중하는 ‘88만원 세대’들에게 ‘개’를 찾아 나서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동화 의 네로는 그 선택이 설령 죽음을 부르는 것일지라도 망설임 없이 양심과 이상을 좇았고, 현남은 생계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윤주는 괴로워하면서도 정확히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 또한 세상에는 부정부패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만큼 무뎌진 기성세대도 존재한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산을 올라가던 현남과 친구는 관객을 향해 돌아보며 거울을 비춘다. 언젠가 친구가 현남을 위해 날아차기로 부숴버렸던 어떤 자동차의 사이드 백 미러. 거울은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며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찾아가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