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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억과 200만원
등록일 2016.06.10 22:08l최종 업데이트 2016.06.11 18:00l 신일식 기자(sis62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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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부터 마감까지 머리를 떠나지 않던 숫자들이다. 301억 원은 KEC가 노동조합의 공장점거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청구한 손해배상액이다. 노동자들에게 그랬듯 내게도 비현실적인 숫자다. 학식은 몇 그릇이고 지하철은 몇 번 탈 수 있나. 아니다. 강남 오피스텔에 살며 차 사서 학교 다녀도 한참 남겠다. 200만 원은 KEC 한 간부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선고받은 벌금이다. 이건 제법 손에 잡힌다. 한 학기 등록금을 내기에 조금 비는 돈이다.


  우리 사회에서 돈은 무엇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하는 주된 수단이다. 회사는 14일간 공장을 정지시킨 값으로 301억을 매겼다. 이 숫자는 한국 사회에서 결코 공장 점거를 해선 안 된다는 간결하고도 명확한 신호를 준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시급을 받아온 200여 명의 노동자들로서는 갚을 길이 없는 돈이기도 하다. 곧 있을 1심 판결에서 패소하면 공장 점거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를 제외하고 월급과 재산을 압류당한다. 회사는 관대하게도 퇴직하는 이들은 소송에서 빼주겠다고 했다. 회사로서도 입증할 수 없었던지 76억까지 금액을 깎기도 했다.


  200만 원은 너그러운 숫자다. 부당노동행위를 했지만, 한 달 월급이 채 안 되는 돈을 내면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여자 기숙사에 수백 명의 용역을 투입하고, 형형색색의 티셔츠를 입혀 교육하고, 노동조합 파괴 플랜을 세우는 행위들은 200만 원 정도 잘못됐다. 공장과 공장 경영권은 301억만큼 중요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인격과 단결권은 200만 원만큼 중요하다.


  기실 노동조합 가입의 득보다 실이 훨씬 컸음에도 여전히 40여 명이 넘는 KEC 공장 점거자들이 회사에 남았다. 합리와는 거리가 먼 선택이다. 1년 넘게 농성 중인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의 선택도 그렇다. 나는 자칫 어느 노사민정위원회에서 나온 말처럼 “노조 안 하면 안 되느냐?”고 물을 뻔했다. 차마 묻지 못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 남을 이들에 대한 미안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억울함이 이들을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짚어본다.


  이들이 견뎌준 덕일까. 사회 곳곳에서는 단결권의 소중함이 나타난다. 올해 우리 학교의 한 노동조합은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최저시급보다 300원쯤 더 받게끔 교섭할 수 있었다. 희망퇴직을 권고받고 떠밀려 나갈 뻔한 4개월 차 사무직이 직장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학교 안 또 다른 노동조합 덕분이다. 단결권은 소중하기보다 당연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301억과 200만 원 사이의 간극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사회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