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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하는가, 관리하는가
등록일 2017.10.21 19:23l최종 업데이트 2017.10.21 19:23l 이하영 사회부장(heavenlee6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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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절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런 가까운 과거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생각을 하는 건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흐릿한 조각들을 건져 올리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그때로 돌아가는 어마무시하게 생생한 꿈을 꾼다. 지각 직전인데 아무리 뛰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교실, 시간 안에 반밖에 풀지 못한 시험지 등, 무의식은 과장도 많이 하지만 엄연히 직접 거쳐 온 시간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학교에서는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이면 교복 위에 패딩을 겹쳐 입고 등교한 학생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허리춤 아래로 두른 무릎담요와 튀는 색깔의 수면양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토가 달렸지만 결국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 걸 보면 '질서'는 꽤 적절한 명분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는 조금 달랐다. 각자의 목표에 몰두한 학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훌륭하게 자기검열을 해냈다. 기록이 남는 상벌점과 성적에 반영되는 '태도점수'는 깔끔하고 손쉬운 통제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바른생활부는 월요일 아침마다 후배들의 머리색과 입술색을 검사하며 이름을 적었고, 기숙사 자습시간에는 사감선생님이 자습실 문 앞을 지키고 앉아 출입을 막았다.


  십대의 끝은 입시가 장식했다. 내 십대의 열매도 입시 결과로 맺어질 것처럼 보였다. 한 유명 인터넷강사는 자신이 학창시절 잠을 쫓기 위해 포크로 무릎을 찍으면서 공부했다며 학생들에게 '치열한' 수험생활을 권면했다. 업계에서 손꼽히게 돈을 잘 버는 강사였다. 어느 시험기간, 밤을 새워 공부하던 친구가 교실 벽면 화이트보드에 "마포대교 파티 구해요"라는 말을 작게 적어놓았다. 장난 같은 낙서에서 읽히던 고갈된 체력과 불안과 자학의 비명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정해진 기준에 어긋나는 케이스에 '불량' 도장을 찍고, 눈에 보이는 성과대로 줄세워 1에서 9까지 등급을 매기고, 더 나아가 이 과정을 그 대상이 스스로 할 수 있게까지 유도하면 일이 굉장히 간편해진다. '관리'는 '보호'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보호는 사랑을 품은 마음으로부터만 가능하고,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보호는 관리에 불과하며, 보호가 아닌 관리는 대상자가 아닌 관리자의 편의에만 봉사한다. 내 무의식이 기억하는 학교는 나를 보호해왔을까, 아니면 관리해왔을까.


  후유증은 길었다. 극심한 무기력증이 새내기생활의 팔 할을 채웠다. 목적지 없이 걷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대학생활문화원의 개인심리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것 등이 무기력증에 대한 나의 반응이었다.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청소년들의 범죄를 바라보며, 그들을 향한 무수한 손가락질들을 지켜보며, 그 손가락의 주인들은 그 자리로부터 얼마나 안전했을지 궁금해해 본다. 나는 얼마나 안전했을까. 규율에 대한 순응적 태도를 너무나 성공적으로 학습한 탓에 나도 모르게 선택한 표출방식이 무기력이었던 것은 아닐지, 혹시 그것이 폭력을 대신한 무기력은 아니었을지, 잠시 생각도 해 본다.


  이런 생각을 단지 상상으로 남겨 두고, 한 달 동안 취재한 결과물을 인쇄해 배포대에 꽂아 두고 다시 내 삶의 자리를 향해 금방 발걸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내가 저 사건의 등장인물들과 얼마나 달라서일까. 무엇이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었을까. 다시. '보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관리'는 죄가 아닌가. 법이 제재하는지 뒷받침하는지를 떠나 더 많은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을 굳이 가리자면 범법행위를 행한 청소년일까 아니면, 청소년을 관리의 대상으로 대해 온 누군가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취재가 그랬듯 이번에도 답을 찾지는 못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는 자리에서 더 많은 고민거리를 만들어냈을 뿐. 다만 이번에는 데스크칼럼이라는 귀한 지면이 허락된 틈을 타, 함께 고민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사랑을 담아 고민해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덧붙여 전해 본다.